제516화
전투가 끝난 뒤, 스틸월 백작군은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라고는 해도 적의 영토에서 완벽하게 뒤처리를 할 수는 없다.
아군의 시체는 마법 상자에 넣어 돌아가고, 적의 시체는 모아 불태워 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적이 가지고 있는 전리품도 깔끔하게 챙겼다.
완벽히 승리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뒤처리였다.
“수고했다, 스녹.”
바위산에서 내려오는 스녹을 보고 지크는 손을 흔들었다.
이번 전투에서 공이 가장 많은 사람을 정하라면 단연 스녹이었다. 바위산에 숨어 작은 산사태를 일으킨 자가 바로 그였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중갑병도 그의 솜씨였다.
“움직임이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더군.”
스녹의 움직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위산에서 쏟아져 내려와 연합군의 지휘관이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던 바로 그 중갑병들의 움직임이었다.
“저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니까요.”
쿠!
스녹의 대답에 노웸이 큰 소리로 호응했다.
바위산에서 나타난 중갑병들은 예전 드라우드 수림에서도 사용했었던, 속이 텅 빈 갑옷을 스녹의 힘으로 움직인 것들이었다.
능력을 이용해 바위 속에 숨어 기다리던 스녹은 적이 원하는 곳까지 진입한 순간 작게 산사태를 일으켰다. 그렇게 해서 적의 혼을 아주 쏙 빼놓았다.
거기에 적이 아군과 한창 교전하고 있을 때 정 반대편에서 텅 빈 중장갑을 이용해 적들의 퇴각을 유도하기까지 했다.
아드로원 대수림에서는 스녹의 능력이 되지 않아 대부분을 라일라의, 제작자 왈 쓰레기 골렘으로 채워 넣었지만 그의 능력이 높아진 지금은 혼자서 충분히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있었다.
물론 근접전을 한다면 안이 텅 빈 것을 들킬 염려가 있던 터라 최전선에 있던 중갑병들은 스녹과 같이 숨어 있던 기사들이었지만, 병력을 부풀린 공로는 분명 스녹의 것이었다.
“도련님!”
한 기사가 지크에게 다가왔다.
대니 크리스넌. 강철검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스틸월 백작이 지크의 부관으로 붙여준 자다. 천하의 강철검 기사단의 부단장이 부관으로 붙은 것은, 지금 스틸월 백작군 내에서 지크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어떻습니까?”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적습니다. 특히 적에 비하면 말이죠.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닙니다만, 감사합니다.”
지크는 누구를 찾는 듯 뒷정리를 하고 있는 아군을 바라봤다.
“그레이그는 어디 있습니까?”
“지금 다른 분들과 함께 시체를 처리하고 계십니다.”
“스스로 그렇게 움직일 정도면 정신적 충격은 완전히 벗어났다고 판단해도 되겠군요.”
“모두 도련님 덕분입니다.”
지크를 보는 대니의 눈에 강한 존경심이 깃들었다.
지크가 스틸월 백작가에 돌아온 후 보여줬던 모든 것들은 정말로 경이롭다라고밖에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적들을 처치해 숨통을 끊어 놓으시겠습니까?”
적의 추격대를 말살할 수 있다면 분명 이번 전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녀석들의 병력은 우리보다 위입니다. 무턱대고 들이받는 건 그리 좋은 수는 아니죠.”
“그럼….”
“우리는 피네 자작령을 칠 겁니다.”
“피네 자작령 말입니까.”
대니는 곤혹스러워했다. 물론 처음 그들이 출진하는 목표는 피네 자작가의 함락이었으니, 그다지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격대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아무리 피네 자작가의 병력이 적을 거라고는 하지만, 우리를 상대로 시간을 끌 정도는 될 겁니다. 그때 적군이 우리 뒤를 들이치면 상당히 곤란에 빠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크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대니의 걱정을 일축했다.
“적은 우리를 쫓지도 못할 거고, 피네 자작가는 우리를 상대로 시간을 끌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도망친 적을 속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아무래도 피네 자작가를 단숨에 함락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만.”
“그건 괜찮습니다.”
지크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 지크의 행동에 완전히 익숙해진 일행조차 학을 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고 싶게끔 만드는 그런 미소였다. 당연히 대니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
“남아 있는 피네 자작가의 병사들도 대부분 우리를 잡으러 본성을 비울 테니까요.”
“…최소한의 방어 병력까지 전부 말입니까? 물론 그렇게 된다면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을 가능성은 높아지겠습니다만, 정말로 그렇게 될까요? 누가 봐도 도박수인데요. 그것도 저쪽이 너무도 불리한 수 말입니다.”
만약 연합군이 스틸월 백작군을 놓친다면, 그대로 피네 자작령의 본성을 내주는 일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한 번 졌다고 해도 아직 병력의 우세를 점하고 있는 연합군에게는 이득보다는 손해가 큰 수였다.
하지만 지크는 확신했다.
“저쪽에 미끼를 줬으니 확실합니다.”
“미끼 말입니까?”
“네, 미끼. 다른 곳이 모두 망하더라도 우리를 잡아 족치고 싶어 할 만한 미끼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지크는 적이 도망간 곳을 쳐다봤다.
‘자, 그렌 제너드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껴두고 아껴두던 정보를 풀었다. 그때 바보같이 일그러진 그렌의 얼굴은 장관이었다. 회귀 전과 후의 시절을 모두 합쳐 봐도 그것보다 좋은 광경은 보지 못했다.
‘초상화로 재현해서 두고두고 감상하고 싶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못내 아쉬웠다. 이미 머릿속에는 그 장면을 완전히 기억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강조까지 꽝꽝 박아놨지만, 아무리 지크라도 기억이 열화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크는 곧 아쉬움을 지웠다.
‘불가능한 건 어쩔 수 없지.’
게다가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도 아니다.
‘앞으로 그보다 더 심한 얼굴을 볼 수도 있으니까.’
상당히 직접적인 정보를 언급한 지크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정보를 알려준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기가 회귀 전의 정보를 안다는 것뿐.
‘내가 회귀를 했다거나 녀석이 더 이상 회귀를 할 수 없다는 건 알려주지 않았지.’
아마도 지크 또한 회귀의 힘을 손에 넣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회귀를 할 수 없다고까지 생각할까.’
지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까 충격적인 정보를 듣고 반쯤 넋이 나갔던 그렌의 반응을 떠올렸다. 무방비 상태의 그렌의 검을 튕겨내고 칼을 녀석의 배에 꽂아 넣었다.
‘하지만 녀석은 토르니움을 놓치지 않았어.’
지크의 공격으로 옆으로 튕긴 검 때문에 팔이 함께 옆으로 크게 젖혀졌지만, 녀석의 손은 검을 꽉 붙들고 있었다.
‘회귀라는 힘에 그토록 매몰되어 있는 녀석이라면 과연 거기서 검을 붙들고 있을 여력이 있었을까?’
애초에 미약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완전히 얼이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당시에는 너무 당황해서 아예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러나 지크는 기억했다. 기사에게 붙들려 가면서도 검만은 꽉 붙잡고 있는 그렌의 모습을.
‘아마도 회귀라는 능력이 완전히 무력화됐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 할 거야. 내가 회귀를 했다는 것에 생각이 닿는 정도겠지.’
어쩌면 그것조차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뭐, 어느 쪽이든 녀석이 할 일은 뻔해.’
그리고 그 때문에 이번 작전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열심히 고뇌하고 증오해 달라고, 용사 지망자님. 그래야 널 살려준 보람이 있지.’
* * *
패퇴한 연합군은 숲과 바위산의 근처를 벗어나 한참을 달려 겨우 멈춰 섰다.
그들의 행색은 비참했다. 기사의 상징이던 번쩍거리는 갑옷은 피와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고 말도 대부분 잃어 두 발로 지면을 뛰어야 했다.
팍 줄어버린 병력의 수가 방점을 찍었다.
지휘관은 일단 병력을 수습했다. 그래도 적절한 상황 판단과 병력의 정예도에 힘입어 기습, 함정, 또 다른 기습이라는 세 번의 갑작스러운 공세 속에서도 나름 병력은 온존되었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뿐이었다.
애초에 빠른 이동을 예상해 짐을 극단적으로 줄였던 추격대였지만, 그래도 사람인 이상 최하의 식량과 물품은 가지고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번에 전부 날아갔다.
‘한두 번은 몰라도 계속 전투를 하는 건 무리겠군.’
지휘관은 일단 진채를 세우기로 했다. 휴식이 필요하기도 하거니와 퇴각할 때 흩어진 일부 아군을 다시 그러모을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만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먹을 것이 없었다.
‘일단 급한 대로 사냥을 보내긴 했지만 어림없겠지. 주변을 약탈하려 해도 여기는 적 영지가 아니고.’
잘해야 돈을 주고 식량을 사는 게 전부일 텐데, 그 돈조차 대부분 잃어버렸다.
‘일단 피네 자작령의 본성까지 후퇴를 해야겠어.’
거기라면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다. 피네 자작령에 지원군으로서 합류하는 것이 원래의 계획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휘관의 선택은 이번에도 기분 나쁜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지휘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진저리가 나는 목소리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남자, 그렌을 쳐다봤다.
귀한 포션을 사용해 복부에 꿰뚫린 상처는 깔끔하게 메워져 있었다. 하지만 대미지를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닌지 조금의 피로가 엿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자신의 피로에 관심이 없다는 건, 그의 얼굴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마치 부모의 부고라도 들은 것마냥, 그렌의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부관이 그렌을 험상궂게 노려봤지만 그는 부관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내쉬고 지휘관은 입을 열었다.
“일단 피네 자작령의 본성으로 들어갈 겁니다. 물자도 얻을 수 있고 자작령도 지킬 수 있으니 당연한 판….”
“안 돼!”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갈. 지휘관이 불쾌한 표정을 했다. 부관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렌의 목을 치고 싶은지 손을 움찔댔다.
“저들이 어디로 움직일지 알고 본성으로 간단 말입니까!”
“녀석들의 진군 목표는 일찌감치 알려졌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명령은 피네 자작령을 구하는 것이고! 본성으로 가는 것에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뒤에서 부관이 소리쳤다.
“그러다가 저 녀석들이 스틸월 백작령으로 돌아가면 어쩔 생각입니까! 자칫하다간 본대가 당할 수도 있습니다!”
추격대의 편성으로 연합군 본대의 전력이 낮아진 건 사실이기에 부관은 일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휘관이 보충했다.
“정찰을 할 인원을 뽑아서 적들을 감시하면 됩니다. 적들이 귀환한다면 그때 우리도 귀환하죠.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 물자가 없습니다. 아무리 기사들이 며칠 정도 먹지 않고도 힘을 쓸 수 있다지만 전력의 약화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거야 주변 마을에서 징발하거나 피네 자작령에 요청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래 봤자 지금 적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적들은 병력조차 우리와 맞먹는 상황입니다. 물자를 기다리다 기습이라도 받는 날에는 필패입니다.”
그렌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지휘관은 단호하게 손을 들었다.
“우리는 본성으로 향합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납니다. 결정에 따르십시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