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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15화 (515/628)

제515화

지크의 목소리는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았다. 이번 전쟁으로 연합군 안에서 상당히 인지도가 높아진 지크였기에 여기저기 알아보는 사람이 나왔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그렌과 말 그대로 세상이 흔들리는 게 아닐까 싶은 전투를 벌이는 인간이니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더 이상했다.

주변 플로드 백작군이 주춤했다. 전장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음을 불사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전투 기계인 그들이지만, 아무래도 지크가 보여줬던 엄청난 힘 앞에서는 위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이 지크를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지크의 고함에 바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후웅!

바람이 인 것 같다 생각한 순간.

툭!

하나의 인영이 지크의 근처에 내려앉았다. 지크가 그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도 지크에게 못 박혔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친다.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수련을 쌓은 주변 기사들조차 방심했다면 균형을 잃을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충격파의 중앙.

지크와 그렌은 검을 맞대고 서로를 노려봤다.

“하핫! 부른다고 냅다 달려오다니! 훈련받은 개새끼도 그 정도로 충직하진 않을 것 같다만.”

지크가 입꼬리를 비틀며 빈정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죽인다!”

“이루지 못할 일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놈이라고 해줄까?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노력가라고 해줄까? 말만 해. 그 정도는 해줄 테니까.”

“입만 살아서는!”

퍼엉!

토르니움에서 뿜어낸 마력에 지크의 몸이 뒤로 날렸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렌의 공격이 바로 쇄도했다.

쾅! 쾅! 쾅!

자비 없는 그렌의 공격은 폭풍과도 같았다. 검은 마력이 포악스럽게 지크를 향했다. 지크는 그 하나하나를 튕겨냈다. 지금까지 싸워온 경험이 있는지라 지크는 나름 그렌의 공격을 잘 방어해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준 차이가 나는 터라 지크는 금방 수세에 밀렸다.

“뭐냐! 말만 번드르르하더니 고작 이 정도냐! 잘난 친구들도 오늘은 없는 모양이지!”

지크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것일까. 그렌이 외쳤다. 하지만 지크에게 대꾸는 없었다. 그는 묵묵히 그렌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했다.

말을 할 여유도 없다. 그렌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부는 사실이기도 했다. 지크의 집중이 조금이라도 끊어진다면 토르니움은 바로 지크의 몸에 꽂힐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그렌의 소망이 이뤄지는 일은 오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렌이 지크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전투는 스틸월 백작군이 유리했다. 연합군의 숫자가 많은 건 분명했지만, 아무리 정예병이라도 매복과 함정으로 정신이 몰린 상태에서 받은 기습이다. 평소보다 검을 휘두르는 팔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엘프의 활은 지금도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때문에 쓰러지는 비율은 연합군 쪽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합군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었다. 많은 병력을 바탕으로 착실하게 스틸월 백작군을 몰아붙이려 분투했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심을 끊어버리는 일이 나타났다.

쿵!

다시 한번 바위산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연합군은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또?’

‘말도 안 돼! 아군이 있는데 산사태를 일으킨다고?’

연합군의 시선이 바위산을 향했다. 다행히 돌과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어쩌면 산사태보다도 더 끔찍한 모습이었다.

산사태라면 적들도 같이 휩쓸릴 터이니, 그 틈을 타 어떻게 적들의 피해를 더 도모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위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들은 육중한 갑옷을 입고 있는 병력이었다.

“적들이 더 있었다고!”

지금껏 침착한 모습으로 기습과 함정에도 군을 지휘해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있던 연합군의 지휘관도 뜬금없이 나타난 병사들의 모습에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에 숨어 있던 거지?’

고작해야 나무 몇 그루밖에 보이지 않던 바위산에서 갑자기 병력이 튀어나오다니. 하지만 분명 돌진해오고 있는 적 병력은 현실이었다.

‘설마 연합군의 일부를 끌어내 각개격파를 하려던 적의 계략이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멋지게, 그리고 멍청하게 적의 계략에 놀아난 꼴이다. 아무리 지금껏 잘 버텨온 연합군이라고 할지라도 바위산에서 돌진해오는 중갑병들까지 끼어든다면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 뻔했다.

“대장님!”

부관도 창백한 안색으로 지휘관을 불렀다. 지휘관은 으득 이빨을 갈았다. 지금은 고민할 틈조차 없다.

“퇴각하라!”

지휘관은 결국 퇴각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능한 능력이 어디로 가지 않는지 바로 병력 일부를 잘라 양옆에 배치해 스틸월 백작군을 막았다. 물론 배치된 병력은 목숨을 대가로 시간을 버는 용도였지만, 정예인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명령에 따랐다.

그 틈을 타 다른 병력들은 전투 지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단하게 말을 하더니 이번에도 졌네?”

그렌을 혼자 막아낸 지크의 몸은 꽤 참혹했다. 온몸의 베인 상처에서 새어나온 피가 옷을 물들였고, 들고 있는 검도 토르니움을 견디지 못해 이곳저곳 이가 나가 있었다.

그러나 지크의 표정은 몰골과 다르게 무척이나 해맑았다.

그리고 반대로 그렌의 얼굴은 아까의 자신만만함은 사라진 채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개자식이!”

그렌이 다시 한번 토르니움을 휘둘렀다. 충격음이 나고, 지크의 검이 토르니움을 막아냈다. 이번에도 지크의 검의 이가 깨져 나갔다. 그 상태로 그렌은 지크를 밀어붙였다.

“후퇴한다 해도 너만은 죽이고 간다!”

“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질척이는 게 딱 여자에게 인기 없는 스타일이야.”

그리고 지크는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 라라한테도 차였지.”

콰앙!

“큭!”

더욱 강해지는 힘에 지크가 신음을 흘렸다. 방금 전의 도발은 무척이나 효과가 있던 모양이다. 그렌의 눈에 선 핏발이 아주 잘 보였다.

지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조금만 있으면 토르니움이 지크의 칼을 잘라버리고 지크마저 베어버릴 것 같다.

그러나 지크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화를 내? 설마 진실을 들이대면 부정하는 스타일이신가? 피곤한 성격이 하나 더 붙어 있군. 그것도 인기 없는 원인이야. 혹시 라라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더 차이지 않았어?”

“이익!”

“이봐, 제너드 경! 뭘 하는 거야!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고!”

동료인 기사 한 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료가 부르는데? 가지 않아도 되겠어?”

“네놈을 죽인다!”

“충고하건대 혹시 사랑 고백을 할 때는 절대 이런 식으론 하지 마. 백년의 사랑도 식어버릴 거야. 차이기 이전에 권유조차 못 한 것도 그 때문 아니야?”

“뚫린 입이라고 헛소리를! 그딴 적도 없어!”

“없을 리가 없을 텐데?”

지크는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음모를 꾸미는 어둠 속 악당처럼. 비열한 미소와 함께 지크의 목소리가 그렌에게 들려 왔다.

“루벨라와 레오나. 네 동료로 끌어들여야 하는 그녀들에게 말도 못 걸었지.”

“그거야 네놈의 협잡…!”

그렌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렌의 지금 상태를 묘사하기 적절한 것도 없었다.

“…루벨라와 레오나가 뭐라고?”

“뭘 놀라고 그래? 라라와 같이 네가 동료로서 끌어들이려고 한 사람들이잖아? 나에 대항해서.”

그렌의 눈이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 정확히는 그냥 지크가 아닌, 힘의 마왕 지크 모어에 대항해서겠지.”

“너, 너….”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아니면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 아, 다른 질문일 수도 있겠네.”

그 순간, 지크가 그대로 토르니움을 밀쳐냈다. 경악에 빠진 그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지크는 토르니움에 바짝 눌려 있던 몸을 그대로 튕겨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그렌에게 달려갔다.

썩어도 높은 경지에 오른 터라 그렌도 나름 방어를 한답시고 검을 휘둘렀지만, 지금껏 지크를 압도해왔던 실력에 비교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당연히 지크에게 그런 방어가 통할 리 없었다.

챙!

마검이라는 이명답지 않게 토르니움이 너무도 쉽게 튕겨 나갔다. 지크는 망설임 없이 텅 비어버린 그렌의 복부에 검을 찔러 넣었다.

푸슉!

“컥!”

검이 그대로 그렌의 배를 관통했다. 고통에 그렌이 신음을 흘렸다. 지크는 검에 힘을 더 집어넣었다.

콰직!

“크헉!”

지크의 검이 자루까지 그렌의 배에 박혀들었다. 지크는 피가 가득 묻은 손으로 그렌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이야.”

“너… 너… 뭐….”

입에서 피를 뱉어내면서도 그렌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 경악 그리고 공포라는 감정이 지크는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글쎄. 뭘까? 세상의 정의를 위해 마왕과 대적한 용사 지크 브레이브? 아니면 반대로 세상을 피로 점철하며 공포에 떨게 만든 힘의 마왕 지크 모어? 그도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

마치 사람을 회롱하고 죽음으로 인도하며 비웃는 악귀처럼, 지크는 그렇게 웃었다.

“너는 뭐라고 생각해?”

“으아아아앗!”

누군가 옆에서 검을 휘둘러왔다. 지크는 미련 없이 그렌을 그자에게 밀어붙였다.

“큭!”

갑자기 떠밀려든 그렌을 보며 검을 휘두르던 기사가 경악했다. 그렌이 정확히 검의 사선에 들어온 것이다. 당연히 지크가 일부러 넣은 것이었다.

다행히 검은 기사의 필사적인 노력에 빗나갔다. 하지만 기사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퍼억!

그의 머리에 지크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투구는 물론 머리까지 산산이 부서졌다. 스러지는 기사의 몸에서 지크는 검만 챙겨 들었다. 그리고 그렌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다른 기사가 그렌을 들쳐 업고 뛰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여러 기사들이 가로막았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렌을 지키겠다는 비장함이 뿜어져 나왔다.

‘자기들보다 전쟁에 더 도움이 되는 그렌을 지키겠다는 거군.’

연합군에게는 그게 더 효율적인 일일 것이다. 기사 몇보다도 그렌이 훨씬 더 강하니, 안 그래도 상대적으로 병력의 질이 낮은 연합군에게는 당연한 선택이다.

‘명령일까. 아니면 본인들의 의지일까.’

하지만 지크는 곧 의문을 접었다. 어떤 이유이든 결과는 하나뿐이다.

‘개죽음이지.’

지크는 여기서 그렌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일부러 공격도 복부를 노리지 않았던가. 한데, 저들은 그렌을 지키겠답시고 지크의 앞을 막아섰다.

‘그렌 제너드를 추격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적인 이상 앞을 막아서는 놈들을 가만히 놔두는 것도 웃긴 일이겠지?’

그렌과의 전투에서 생긴 상처는 여전하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전투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작전대로 승리는 이뤄졌으니 굳이 다른 쪽을 도우러 갈 필요도 없고. 좋아, 눈앞의 불쌍한 운을 가진 놈들을 제대로 대접해 줘야지.’

끝까지 개죽음이라는 불운의 종막을 선사해줄 정도로, 지크는 퍽 자비로웠다.

그렇게 스틸월 백작군의 별동대와 연합군의 추격대의 첫 번째 충돌은, 별동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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