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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13화 (513/628)

제513화

플로드 백작은 척후병이 가져온 정보들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적들이 노리는 바와 구성원 등은 대략 알려졌다.

적들의 목적은 피네 자작가. 아마도 피네 자작가를 함락시켜 연합군이 크로뇽 왕국에 들어온 명분 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의도이리라.

피네 자작가가 사라진다면 지금도 머뭇거리고 있는 크로뇽 왕국이 스틸월을 영지전의 승자로 선언하고 연합군에게 왕국에서 즉각 퇴각하라고 요구할 명분이 생긴다. 아마 요구로만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의 의도를 완벽히 알아냈다고 하기엔 플로드 백작의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런 의도밖에 없는 건가?’

스틸월 백작가가 질 위험 부담에 비해 얻을 이득이 너무도 빈약했다.

우선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더 나눴다. 따라서 본진의 방어력이 하락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처럼 파상 공세를 펼친다면 지금은 적진을 함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 부담에 비해 적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연합군의 명분을 날리는 것뿐. 하나, 그것도 연합군이 무시하면 그만이다.

만약 크로뇽 왕국이 참전을 한다 해도 그 전에 적 본진을 함락시키고 스틸월 영지를 초토화시킨다면 플로드 백작은 그리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게다가 목적을 이루는 것도 문제다. 피네 자작가도 나름 방어 준비를 해 왔을 터. 그리 숫자가 많지 않을 별동대가 피네 자작의 영지를 함락시킬 수 있을까도 의문이 든다.

아무리 봐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일단 녀석들이 군을 쪼갠 건 사실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연합군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일단 녀석들의, 혹시 있을지도 모를 다른 의도를 고민하는 건 나중으로 미룬다. 적어도 지금 정보로는 알 수 없어.’

그리고 혹시 또 아는가. 스틸월 그 건방진 놈이 중압감에 돌아 버렸는지도. 물론 그런 확률은 무척이나 낮지만.

‘그럼 어쩔까. 이대로 계속 녀석들의 본진을 공격할까. 아니면 우리도 병력을 떼어내 놈들의 별동대를 쫓을 추격대를 만들까. 아니, 처음 생각대로 스틸월 영지를 초토화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선택지는 많고 모두 나름대로의 이득이 있다. 어떤 것이 연합군 아니, 자신에게 가장 좋을지 플로드 백작이 머리를 굴릴 때였다.

바깥에서 경비병이 방문자의 존재를 알렸다.

“백작님! 피네 자작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게 해라!”

무슨 일일까. 플로드 백작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피네 자작을 불러들였다.

‘골치 아픈 일이 아니면 좋겠는데….’

그러나 플로드 백작의 소원은 허무하게 깨져 나갔다.

막사 안으로 들어 온 피네 자작은 답지 않게 제법 다급해 보였다. 초조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슨 일이오.”

“스틸월 백작군이 별동대를 우리 영지로 파견 보냈다는 걸 들으셨을 겁니다.”

“물론이오.”

“당장 놈들을 막아야 합니다! 제 영지에 병력을 파견하십시오!”

플로드 백작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고작 저런 말을 하기 위해 온 것인가. 아무리 자기 영지의 일이 소중하다지만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그다. 피네 자작이 이래라저래라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부탁도 아닌 저런 무례한 명령조라니.

‘내가 이 작자를 너무 풀어줬었나.’

그래도 이번 전쟁을 크로뇽 왕국 내의 영지전 성격으로 묶어 놓을 수 있는 명분이었기에 백작의 성격답지 않게 부드럽게 대해주긴 했다. 그게 잘못된 것일까.

‘역시 본때를 보여 줘야겠군.’

물론 다짜고짜 목을 날리거나 지위를 박탈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겉으로는 동등한 연합 체계에 속한 인물이었으니. 하지만 명분이 어떻든 힘의 차이는 크다.

그리고 연합군이 실패한다면 가장 크게 손해를 볼 인물도 피네 자작이다. 기를 꺾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플로드 백작의 분노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피네 자작은 바깥에 있는 경비병의 눈치를 보듯 흘끗 막사 입구 쪽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허리를 굽혀 앉아 있는 플로드 백작에게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이 밸리드와 협력한 사실을 들키기 싫다면 말입니다.”

플로드 백작이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어 검을 찾았다. 하지만 검은 풀어진 채 막사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플로드 백작의 살의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꿈틀댔다. 당장이라도 팔을 뻗어 피네 자작의 목을 움켜쥐어 꺾어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뻗은 살기를 알아챈 피네 자작이 급히 말했다.

“진정하시죠. 저도 밸리드의 신자이니, 당신에 대해 주변에 알릴 일은 없을 겁니다.”

플로드 백작의 움직임이 멎었다.

“…당신이 밸리드 신도라고?”

“그렇습니다.”

“허!”

플로드 백작은 긴장감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털썩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숨을 크게 한 번 쉬더니 피네 자작을 바라봤다.

아무리 밸리드와 협력을 하고 있던 플로드 백작이라도 피네 자작이 밸리드의 신도였다는 사실은 제법 충격적인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밸리드와 협력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퍼져 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잠깐이나마 생각했던 게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그런 것일까. 의외로 피네 자작이 밸리드 신도였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졌다.

“놀라 죽는다는 느낌이 어떤지 알겠더군. 늙은이의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해주게.”

“아직 정정하신 것 같습니다만. 바로 절 죽이려 움직이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피네 자작은 정색을 했다.

“실없는 소리는 이만하죠. 이건 정말 급한 일입니다. 당장 스틸월 백작가의 별동대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군. 자네가 밸리드의 신도라면 영주 성에도 제법 밸리드의 흔적이 남아 있겠지.”

지금 상황에 피네 자작이 밸리드의 주구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연합군에게 결코 좋은 상황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은 플로드 백작의 상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흔적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밸리드의 북부 지부가 토벌당했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알지. 카르위먼이 보통 홍보를 한 게 아니니까.”

“그를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북부 지부가 바로 우리 피네 자작가의 영지입니다.”

“뭐?”

“그리고 그 북부 지부의 책임자가 될 사람이 바로 저고요.”

일반적인 밸리드의 신도와 밸리드 북부 지부의 책임자는 그 중요도 자체가 다르다. 아까처럼 발작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중대한 사안에 플로드 백작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가 당신과 협력한 이유는 새로운 북부 지부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안정화시키기 위함입니다.”

“…나를 이용했다는 거군.”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플로드 백작은 피네 자작을 노려봤다. 하지만 아까처럼 무력을 사용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좋아. 어차피 서로 이용하는 사이에 신뢰나 믿음 같은 멍청한 소리를 하진 않겠어. 한데 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내게 한 거지?”

“지금의 계획이 우리 밸리드에게도 무척 중요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별동대를 막을 군을 편성해 주시지요.”

“밸리드의 북부 지부라면서 그 정도 병력도 막지 못하는가.”

“상대 쪽에 벨리 와이그가 포함되어 있다는 보고가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현재 카르위먼의 위치상 전장의 감시를 위해서 동행하는 걸 텝니다만, 오히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남은 병력들이 어떻게든 밸리드와 연관이 있는 모양이군.”

“순수한 병력은 정말로 한 줌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위험하다. 만약 벨리 와이그가 피네 자작령의 병사에게서 밸리드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자칫했다간 그들이 예전에 카르위먼을 끌어들여 스틸월 백작령을 치려 했던 계획이 역으로 현실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거부한다면?”

“그러실 수 있습니까? 백작님은 이미 저희와 한배를 탄 상태일 텐데요.”

“내가 잡아떼면 그만 아닌가. 밸리드의 말을 믿는 이들은 없을 텐데.”

“그 정도로 어리석은 분이 아니란 건 압니다. 보통 안건도 아니고 새로운 밸리드 북부 지부에 관한 일입니다. 카르위먼뿐만 아니라 크로뇽 왕국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사태를 파악하려 하겠죠.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자신이 있으시다면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너희들은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지겠지?”

“이를 말입니까. 저택에 증거도 꽤 많이 모아 놨죠.”

플로드 백작은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 자작령에 지원군을 보내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하지만!”

백작은 자작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번이 중대한 예외 사항임을 명심하도록! 혹여나 너희들이 나를 꼭두각시처럼 다루려 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한배를 탔다는 표현에 거짓은 없으니까요.”

자작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자작의 저자세에 마음이 풀린 것인지 백작은 눈에 힘을 풀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요구를 내밀다니. 하지만 자작이 저자세를 풀지 않았기에 백작은 일단 말을 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이번 작전에 그렌 제너드를 포함시켜 주십시오.”

“…자네 돌았나?”

플로드 백작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하지만 백작은 피네 자작을 모욕할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정말로 자작의 대가리 속 구조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 작자가 아무리 지금은 약간 아니, 꽤 미친 것처럼 보인다지만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게 부정되는 건 아닐세. 한데, 그런 자에게 이 일을 맡기자고? 지금 우리가 밸리드와 협력 관계라는 걸 대놓고 밝히자는 소리인가? 혹시 자네 카르위먼의 첩자인가?”

“어차피 적에게 벨리 와이그가 동행하고 있는 이상 우리 신도들을 사용할 순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를 파견한다고 해도 손해를 볼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그렌 제너드는 현재 우리 영역에서 손에 꼽히는 무력을 가진 자 아닙니까. 적들도 별동대에 정예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크니, 질이 떨어지는 우리 군을 생각하면 그를 파견해야 균형이 맞습니다.”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플로드 백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의도는 그것뿐인가?”

“그 외에 무슨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그렌 제너드라는 고급 인력을 빌려야 영지를 지킬 가능성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백작님께서 그렌 제너드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이유로 이번 일에서 제외시키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믿지.”

“그럼 그렌 제너드는….”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은 해 보겠네. 자네는 이만 나가보게.”

“…알겠습니다. 모쪼록 제 의견을 깊이 생각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피네 자작은 백작에게 인사를 하고 막사를 나왔다.

그는 일단 막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훑어봤다. 다행히 그들이 안에서 나눈 이야기를 들은 낌새는 없었다.

피네 자작은 자신의 막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행동은 태연했지만, 그의 속내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알려버렸군.’

플로드 백작을 이용하면서도 정체를 숨기고 계속 거리를 두던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일.

물론 그의 근거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큰 의구심을 느끼고도 있었다.

‘무조건 그렌 제너드를 추격대에 포함시키라니. 대체 뭐 때문이지?’

기실, 그렌 제너드를 추격대에 포함시키자는 의견은 피네 자작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었다.

명령의 의도에 대해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그는 곧 그것을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난 시킨 대로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것도 문제다. 일단 플로드 백작이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 보겠다 했지만 미래는 또 모르는 법이다.

‘만약 그가 그렌 제너드를 포함시키지 않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설득을 해야 할지 협박을 해야 할지, 그에 대한 근거로는 뭘 내세울지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머리가 더 이상 복잡해질 일은 생기지 않았다. 피네 자작의 제안대로 그렌 제너드가 추격대에 포함된 것이다.

곧 연합군 진영 내에서도 일단의 병력이 피네 자작가를 향해 출발했다.

그 앞에는 살기 가득한 눈을 빛내고 있는 그렌 제너드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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