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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12화 (512/628)

제512화

지크의 의견에 스틸월 백작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슬슬 연합군이 다른 공격 방식을 선택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아마도 우세한 병력을 십분 이용할 겁니다. 우리를 포위해 보급을 끊거나 병력 일부를 떼어내 영지의 다른 곳을 공략하려 하겠죠.”

“음, 우리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중에서도 후자가 가능성이 높겠지. 주변 영지나 왕실도 슬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정말로 참전을 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움직임만으로도 적들에겐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 시간을 오래 끌 순 없을 거다. 우리를 말려 죽인다는 전략은 피할 수밖에 없어.”

역시나 전장에 잔뼈가 굵은 백작이니만큼 현재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꿰고 있었다.

“문제라면 녀석들이 주요 거점 공략을 주목표로 삼을지, 아니면 무차별 파괴와 학살을 주목표로 삼을지겠죠?”

“그렇지.”

백작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적들이 전자를 선택한다면 그나마 괜찮다. 주요 거점에 어느 정도 병력을 남겨뒀으니 쉽게 뚫리진 않을 터.

그동안 자신들은 전력이 줄어든 적의 본진을 공략하면 된다. 병력의 질은 스틸월 백작군이 훨씬 위였으니까.

그도 아니라면 그들도 별동대를 꾸려 영지 내부로 진격한 적 병력을 괴롭히는 선택지도 있었다. 적은 병력을 더 쪼개야 하지만, 지금까지도 병력 수가 열세인 상황에서 잘 방어를 해오지 않았던가.

적들이 병력을 쪼갠다면 본진에 대한 압박도 약해질 테니 스틸월 백작군도 별동대를 동원할 여유가 생긴다. 적이 거점을 공격할 때 거점에 있는 병력과 함께 적들을 앞뒤로 공격한다면 쏠쏠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적들이 초토화 작전을 개시할 때다. 놈들이 거점 같은 건 모조리 무시하고 학살과 약탈에 중점을 둔다면 스틸월 백작군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초토화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를 공격하든 적의 본진을 공략해 전쟁을 끝내든 행동을 요구받게 된다.

그리고 그건 병력이 열세인 스틸월 백작군에겐 심한 부담이 된다. 그렇다고 초토화 부대를 내버려두면 병사의 사기가 떨어지고 전쟁 후에 스틸월 영지에도 막대한 부담이 걸리게 될 터.

물론 연합군도 초토화 작전을 선택하는 것에 부담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지크나 스틸월 백작은 알고 있었다.

“플로드 백작, 그 망할 영감탱이라면 태연히 무차별 파괴와 학살을 명령하겠지.”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도 피네 자작가를 치자는 게냐? 영지를 초토화시키려는 부대를 방치하고?”

“막을 수 있습니까?”

“별동대를 만들어 정면 승부를 최대한 피해 적의 발목을 붙들고 근처에 있는 영민들은 대피를 시켜야지.”

“생명은 어느 정도 살릴 수 있겠지만 재산이나 농토의 피해는 막대할 겁니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정면으로 적들을 막아서기엔 우리가 떼어낼 수 있는 별동대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백작은 어디까지나 냉철했다. 눈앞의 손해를 막자고 전 재산을 들이붓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입맛이 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피네 자작가를 치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놈들은 피네 자작가로 향하는 별동대를 우선해서 공격하려 할 테니까요.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주도적으로 나가야죠.”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만 문제가 있는 작전이란 건 알 테지?”

하지만 스틸월 백작의 목소리에 비난의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하라는 투였다.

“지금껏 계속 말해왔지만 별동대를 만들어봤자 그 숫자는 그리 많지 못할 거다. 그런 병력으로 피네 자작가를 공략할 수 있겠느냐.”

“최대한 질을 높일 생각입니다. 엘프를 포함해 제 부하들과 기사들만으로 꾸린다면 가능하겠죠.”

“안 돼. 그렇게 했다가는 본진의 방어력이 너무 떨어진다.”

백작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이 세 배가 넘는 병력 차이에도 수월하게 방어를 성공시킬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마법사, 엘프 등 고위 병력의 존재였다. 그중 엘프들에 스틸월의 기사들마저 별동대에 동원한다면 본진의 전력이 너무 약해진다.

그러나 지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피네 자작가를 공략하기 위해 별동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녀석들도 많은 고위급 병력을 우리를 잡는 데 파견할 테니까요. 그럼 본진의 병력으로도 그럭저럭 방어가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피네 자작가의 상징성 때문이죠. 플로드 백작가를 비롯한 옆 나라 놈들이 뻔뻔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스틸월을 밸리드의 주구로 몰아 정의를 세우기 위한다는 입 발린 명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스틸월과 같은 크로뇽 왕국 소속의 피네 자작가가 도움을 청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무리수가 있긴 했지만 일단 형식은 왕국 내 영지전의 성격을 띄게 만들기 위해서죠.”

그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피네 자작가를 점령한다면 그 명분을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럼 왕국이 나설 명분이 한층 더 강화되죠. 연합군으로서는 무척이나 피하고 싶은 일일 겁니다.”

“일리는 있군.”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약하다. 저 빌어먹을 영감탱이라면 오히려 역으로 스틸월 백작령을 쑥대밭으로 만들려 움직일 수도 있어. 우리의 힘이 급감한다면 저 영감탱이로서도 나쁜 일이 아니니까.”

“물론이죠. 지금 말한 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내보일 명분입니다.”

“그럼?”

“일단 묻건대, 스틸월 영지 내에 왜 이렇게 밸리드 놈들의 흔적이 많은지는 알아내셨습니까?”

스틸월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지크가 물은 것은 이번 전쟁을 제외하면 백작을 가장 짜증 나게 하는 일이었다.

“아니.”

씹어 먹듯 내뱉는 백작에게 분노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 바퀴벌레 같은 놈들, 찾으면 당장에 짓밟아버릴 거다!”

“보통 집 안에 출몰하는 바퀴벌레는 가까운 곳에 있는 법입니다. 집 안에 둥지를 만들거나, 그렇지 않다면 옆집에서 옮겨 오죠.”

“옆집?”

스틸월의 옆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곳 중, 지금 전쟁에 관련이 있는 곳은 플로드 백작가와 피네 자작가 둘이다.

그리고 지금 지크가 치자고 하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면, 지크가 가리키는 곳은 한 곳뿐이었다.

“설마 피네 자작가에 밸리드의 소굴이 있단 거냐?”

“정확히 말하자면 피네 자작가 자체가 밸리드의 소굴입니다.”

그건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백작을 비롯한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경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놈들이 밸리드의 주구였다고?”

“그렇습니다.”

“그런 주제에 밸리드의 주구인 우리에게 피해를 입었다면서 다른 놈들을 끌어들였고?”

“그렇죠.”

“…….”

“이제 아시겠죠? 왜 우리가 피네 자작가를 공격한다면 녀석들이 우리 별동대를 잡으려 기를 쓸지 말입니다.”

만약 피네 자작가가 밸리드의 주구란 사실이 밝혀지면 상황이 완전히 뒤집힌다. 당장 왕국과 주변 영지가 스틸월을 지지해 바로 참전을 선언할 것이고 카르위먼이 스틸월 백작가의 편에 서서 연합군을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스틸월 백작가의 승리는 확고한 것이 된다.

“…하지만 피네 자작가가 자신들의 본진을 지켜야 한다고 방방 뛰어봤자 다른 이들이 반대하면 그만 아니더냐.”

상대는 연합군이다. 피네 자작이 아무리 자신의 영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다 해도 다른 이들이 거부할 수도 있다.

“연합군에 참가한 이들이 전부 밸리드의 주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만.”

“적어도 플로드 백작가는 밸리드와 협력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충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지크 혼자만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플로드 백작도 피네 자작이 밸리드의 주구란 것까진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만,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밸리드는 무조건 플로드 백작을 움직이겠죠.”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피네 자작은 연합군의 일원일 뿐이지만 플로드 백작은 연합군에서 가장 지분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자 연합군의 총사령관이다. 연합군에 끼치는 영향력 자체가 다르다.

“전 이번 별동대에 와이그 님을 대동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걸 상대에게 흘릴 생각이고 말입니다.”

“…벨리 와이그가 피네 자작가에 있는 밸리드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전쟁은 끝나겠군.”

“당연히 그를 막기 위해 연합군은 별동대를 노릴 수밖에요.”

백작은 생각에 잠겼다. 지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분명 해볼 만한 작전이었다.

문제는 피네 자작가가 밸리드의 주구라는 지크의 말을 믿느냐, 그리고 별동대가 과연 연합군의 집요한 추적을 견디면서 피네 자작가를 공략할 수 있느냐였다.

“…이 말을 꺼냈다는 건 별동대는 네가 이끌겠다는 거겠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냐는 듯한 시선이 백작에게 향했다.

“굉장히 힘든 일이 될 거다. 자신은 있고?”

“놈들에게 지옥 같은 나날을 선사해줄 자신이라면 차고 넘치죠.”

자신감이 넘치는 대답.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병력을 제안해라. 최대한 맞춰주마.”

허락이 떨어졌다. 지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지크는 지휘부 막사를 나갔다. 한 시라도 빨리 병력을 뽑아야 했다. 이미 대략적인 구성은 생각해 뒀지만 그것을 세세하게 만드는 것도 충분히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문득 지크는 걸음을 멈추고 옆쪽을 바라봤다. 흩어져 있는 막사와 그 사이로 보이는 목제 방벽 너머로 연합군의 진지가 있다. 저 안에 그렌 제너드가 있을 것이다.

지크는 히죽 웃었다.

밸리드의 흔적이 들키는 것을 막기 위해 연합군이 별동대를 추격한다고 말을 한 지크지만, 솔직히 그런 이유까지도 필요 없었다.

‘내가 별동대를 이끌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놈은 무조건 나를 쫓아올 테니까.’

그러니 연합군이 별동대를 무시하고 스틸월 영지를 공격한다는 소리는 머리에서 지워도 좋다.

‘남은 건 이 별동대로 놈들과 어떻게 노느냐인데.’

그것도 이미 대략적인 계획은 세워져 있었다.

‘놈도 슬슬 알아야지. 지금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자신을 보고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그렌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크는 키득댔다.

* * *

지크의 계획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지크는 원하던 인재들을 백작에게 요구했고 백작은 허락했다. 며칠 후, 야음을 틈타 스틸월 본진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병력이 빠져나갔다.

그 움직임은 스틸월 본진을 감시하고 있던 척후병에게 발견, 바로 연합군에게 보고됐다.

갑작스러운 스틸월 백작군의 움직임에 연합군은 일단 신중을 기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들은 계속해서 척후병을 보내 파악했다.

척후병들은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겼지만, 대략적인 정보는 알 수 있었다.

적들의 목표는 피네 자작가로 추정되며 병력을 이끄는 건 지크. 추가로 벨리 와이그로 보이는 인물이 끼어 있다는 정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받는 즉시, 발칵 뒤집힌 인물 몇이 연합군 안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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