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1화
연합군의 사기는 좋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스틸월 백작령에 발을 디딘 후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조금씩 밀어붙이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또 모르련만, 그들의 공격은 스틸월 백작군이 만들어 놓은 방벽을 허물지도 못했다.
그래도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상당한 파상 공세를 펼쳤기에 상당히 훼손시킨 곳도 일부 있었지만, 그런 곳들을 다음 공격 때 이미 깔끔히 보수되어 있었다.
숙련된 기사 한 명의 칼질 한 방으로 손쉽게 구멍이 날 목제 방벽이, 연합군의 눈에는 마치 전설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지옥의 성채처럼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연합군 상층부의 회의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지휘부의 천막에 플로드 백작을 위시해 중요한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플로드 백작의 부관이 설명하는 현재 연합군의 상태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당연히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부관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담담히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만으로도 여기 모인 사람들의 골치를 지끈거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게 현재까지 연합군의 피해 상황입니다.”
“많이 죽었군.”
한 귀족이 툭 내뱉었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현재 연합군의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른 이가 부관에게 물었다.
“적의 피해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우리에 비하면 극히 미미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렇겠지. 적을 공략하기는커녕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목제 방벽 하나 뚫지 못했으니까.”
허술하기 짝이 없다고 하기에는 스틸월 백작군이 세운 방벽은 완성도가 좋았지만, 부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런 말을 해봤자 본전도 찾지 못할 게 뻔했다.
“아무래도 지금같이 무작정 공격을 하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 같군요.”
“동감이오. 적의 방어가 예상보다 너무 단단하오. 계속 이런 공세를 해봤자 아군만 죽이는 결과가 될 것이오.”
회의장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한다. 하지만 입으론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하면서도 그들의 눈은 가장 상석에 자리하고 있는 플로드 백작에게 쏠려 있었다.
그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하든, 그걸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결정하는 건 백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멍청한 공세를 지속하지 말라고 백작에게 압박을 내는 것과 동시에 정말로 좋은 의견을 찾기 위함이기도 했다.
“우리가 많은 병사를 잃었다지만 아직도 병력은 이쪽이 훨씬 더 많소. 우리의 확실한 이점이지. 그걸 살리는 게 가장 좋을 듯하오.”
“적과 비슷한 군세를 이곳에 남겨 적을 견제하고 남은 병력은 스틸월 영지의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이 어떻소. 녀석들의 주도를 직접 공격한다면 녀석들도 분명 동요할 것이오.”
“그럴 바엔 아예 스틸월 영지 그 자체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녀석들의 동요도 더욱 커질 텐데요.”
“다만 우리가 스틸월 영지를 차지할 때 얻을 이득이 팍 줄어들겠지. 게다가 아무리 스틸월의 주력이 이쪽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녀석들이 주요 거점지에 최소한이라도 병력을 남겨놓지 않았을 리가 없네. 지금 사기가 낮아진 우리 병사들이 과연 그곳을 돌파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럴 경우 본진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병력의 질은 저쪽이 위입니다. 만약 우리가 적과 비슷한 병력만 본진에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을 다른 곳으로 파병할 경우, 저들이 기습적으로 본진을 들이쳤을 시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함락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차라리 적 거점을 완전히 포위하는 건 어떻습니까. 보급을 완전히 차단시켜 말려 죽이는 겁니다. 우리 숫자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피네 자작이 입을 열었다.
“어떤 방법이든 시간이 오래 걸리면 안 됩니다.”
시선이 피네 자작에게 쏠렸다.
“어제 영지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전하가 사람을 보내셨더군요.”
“크로뇽 왕국의 왕이?”
이곳에 모인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피네 자작은 크로뇽 왕국의 귀족이다. 그리고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곳도 크로뇽 왕국의 영토다.
당연히 크로뇽 왕국 왕의 거취에 사람들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전쟁에 크로뇽 왕국이 끼어든다고 했소?”
“다행히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나 봅니다.”
사람들은 안도했다. 지금 상황에 크로뇽 왕국이 본격적으로 참전을 한다면 그들의 승리 확률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진다.
하지만 완전히 안도할 만한 상황도 아닌 모양이었다.
“하나, 이번 전쟁에 확실한 불쾌감을 표했다고도 합니다. 전쟁을 그만두는 게 좋지 않냐고 넌지시 말했다고도 하고요. 만약 전쟁이 늘어지기라도 한다면 왕국 자체가 끼어들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허!”
“으음….”
왕국의 참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당장 일어나진 않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크로뇽 왕국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우리도 우리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왕국끼리의 전면전이 될 텐데, 우리나라가 그런 부담을 감당하려 하겠소? 제대로 된 전쟁 준비도 되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우리가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다면 모를까, 압도적인 병력 차이를 가지고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말이오.”
“그렇다면 역시 크로뇽 왕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려 들기 전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 가장 깔끔하겠군.”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지휘부 안에 한숨 소리가 감돌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작님.”
사람들의 의견이 대부분 나온 것 같자 부관이 조용히 물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하나둘 플로드 백작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일단 한시라도 빨리 적을 처리해야 하는 건 모든 분들이 공감하는 것 같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에 동의하오. 따라서 결정을 내리겠소.”
모두의 시선이 백작의 입에 쏠렸다.
“병력을 쪼개겠소. 적 병력보다 조금 많은 수의 병력을 이곳에 주둔시키고, 그 외의 병력은 스틸월 백작령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겠소.”
“하면 주도인 비올사를 노리겠습니까?”
“아니.”
백작의 눈에 잔혹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스틸월 백작령을 불태우겠소.”
사람들이 당황했다. 그런 의견이 나오긴 했지만 백작이 설마 초토화 작전을 꺼내 들 줄은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주변에서 상당한 비난을 받을 겁니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얻을 것이 적어지는 건 덤이고요.”
“오히려 이번 작전이 크로뇽 왕국의 참전을 촉진시킬 수도 있습니다.”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백작의 결심은 확고했다.
“여러분들의 걱정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린 밸리드의 주구를 치러 왔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 사악한 마수가 스틸월 밖으로 뻗치기 전에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하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플로드 백작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어떻게든 이 전쟁은 이겨야 해!’
개전 초와는 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된 지금도 플로드 백작은 철저하게 승리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백작은 슬쩍 주변에 앉아 있는 인간들을 관찰했다.
물론 전쟁에서 승리를 바라는 건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에게 절박함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스틸월 영지와 경계를 맞닿아 있는 이들이 아니다.
이 전쟁에서 패한다고 해도 자기 영지로 후퇴하면 그만이다. 분노한 스틸월의 보복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플로드 백작에게 떠넘기면 된다고 여기고 있을 테니, 절박함을 갖고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플로드 백작은 달랐다. 스틸월 백작령과 경계를 맞닿고 있다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내가 전쟁을 포기하는 걸 그놈들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플로드 백작은 이 전쟁을 위해 말 그대로 악마와 손을 잡았다. 바로 밸리드라는 악마와. 그들은 어떻게든 스틸월 백작가를 멸망시키길 원했다.
‘만약 여기서 내가 물러나기라도 했다간 녀석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아니, 설혹 능력이 부쳐 패배한다고 해도 똑같을 거다.’
손을 잡고 있긴 하지만 그라고 밸리드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을 뿐.
그러나 그건 플로드 백작가의 문제일 뿐이다. 백작의 발언에 인상을 쓰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밸리드의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이득을 챙기러 온 것이다. 신실한 신앙심으로 온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물론 플로드 백작도 그들의 반응을 눈치챘다.
“설혹 그 때문에 적절한 이득을 얻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 플로드 백작가에서 손해를 보충해 주겠소.”
“크흠, 그러시다면야….”
“역시 호탕하시구려.”
그제야 사람들은 인상을 폈다. 조금 겸연쩍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백작의 제안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피네 자작의 생각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틸월 영지가 초토화된다면 그가 가장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저도 괜찮습니다.”
피네 자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그가 플로드 백작에게 항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전쟁에 패한다면 같은 왕국에 영지 경계도 맞닿아 있는 피네 자작령은 스틸월 백작령에게 확실한 보복을 당할 테니.
그들도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밸리드의 주구인 그가 이번 전쟁에서 발을 뗄 수는 없었지만.
“이야기는 정리된 것 같군요. 그럼 서둘러 병력을 재편합시다.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지.”
그렇게 연합군의 지휘부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스틸월 백작군이 먼저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 * *
“피네 자작가를 치겠다고?”
스틸월 백작의 의구심 담긴 시선이 지크를 향했다.
“그렇습니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틸월 백작을 포함해, 지휘부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냐.”
현재 상황에서 피네 자작가를 치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아무리 스틸월 백작군이 적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병력의 열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피네 자작가를 공격하려면 병력의 일부를 떼어내야 하는데, 그렇다면 본진의 방어가 취약해진다. 자칫하다간 본진이 괴멸할 수도 있다.
게다가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으니 별동대를 떼어낸다고 해도 그리 많은 수를 떼어낼 수도 없다. 그런 병력이 과연 적 영지를 공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적 영지에 대한 역공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의 말을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미 지크의 위상은 그 정도로 올라와 있었다. 지크에게 되물은 스틸월 백작도 순수한 의문을 표한 것일 뿐, 지크를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녀석들도 슬슬 무작정 공격을 하진 않을 겁니다. 우리만 유리한 짓이라는 걸 잘 알았을 테니까요. 플로드 백작도 머리가 그 정도로는 굴러가죠.”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함부로 부르는 지크지만 거기에 관해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그들과 플로드 백작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