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0화
윌위스, 레오나와 헤어진 지크, 루벨라가 그녀의 숙소 근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후웅! 후웅!
어렴풋이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섬뜩하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제법 검술의 경지가 높다는 걸 알렸다. 소리는 그들의 앞쪽 방향에서 들려왔다.
“어머, 한스 씨네요.”
루벨라가 검을 휘두르는 자를 발견하고 말했다.
한스는 본격적인 수련을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크가 가르친 만큼 한스는 수련을 할 때 거의 몸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스의 검은 시원시원하게 뻗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력을 다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전쟁터에서 몸을 푸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장에서는 당연한 행위. 하지만 지크는 그의 검에서 분함이란 감정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
한스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라라가 앉아 있었다. 그녀 옆에 놓인 검과 흘러내린 땀방울을 보면 그녀도 조금 전까지 검을 휘두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한스가 지크를 발견하고 휘두르던 검을 멈췄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해라. 널 찾으러 온 건 아니니까.”
“아뇨, 안 그래도 슬슬 끝내려던 참이었습니다.”
한스는 검을 집어넣었다.
“성녀님과 함께 계시는군요.”
“무리하고 있기에 억지로라도 숙소에 집어넣으려 데려가는 중이야.”
“지크 님….”
루벨라가 지크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지크는 꿈쩍할 인간이 아니다. 미스릴과 오리할콘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송곳 정도가 되어야 지크의 뻔뻔한 피부를 뚫을 수 있지 않을까 한스는 생각했다.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너무 성녀님이라서 문제지.”
“그만 못 해요?”
루벨라의 도끼눈이 당장이라도 굵은 나무 정도는 한 번에 베어버릴 정도까지 날카로워지자 지크는 물러났다.
“그래, 몸 푸는 중이었냐?”
“네. 라라 씨와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몸을 일으킨 라라가 한스의 옆에 섰다.
“언제 전투가 일어날지 모르니 몸은 계속 풀어 놓아야죠.”
“마음가짐은 좋다만, 그러다 필요 이상으로 체력을 소모하면 오히려 손해인 거 알지?”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요.”
“하긴, 라라 너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알겠지. 한스 저 놈이야 내가 몸에 때려 넣으면서 가르쳤고.”
한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크가 시킨 훈련에 고마움을 느끼고 불만을 갖지도 않지만, 그 훈련이 고되다 못해 정신이 나가기 일보 직전의 것이라는 게 변하는 건 아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조건 반사로 오한이 났다.
“그런데 한스. 너, 검에서 뭔가 분한 감정이 보이던데.”
“…눈치채셨습니까?”
한스는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지금껏 그가 겪어 온 지크의 능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알지. 왜, 분해? 그렌 제너드에게 그렇게 밀린 게.”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놈은 강해졌어. 네 말대로 나조차 혼자서는 대적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지. 네 실력으로 녀석을 감당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 정도는 한스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 눈을 돌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분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라 생각했던 인간이 어느샌가 자신은커녕 자신의 스승보다도 훨씬 더 앞서가 버린 것이다.
지크는 한스를 바라봤다. 평소엔 지크의 시선에 바짝 긴장하던 한스가, 지금은 똑바로 지크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크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래. 그 정도 호승심은 있어야지.”
호승심은 곧 향상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경지를 높이기 위해 향상심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정이기도 했다.
물론 어느 것이나 그렇듯 지나친 향상심은 오히려 악영향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한스는 그것을 잘 컨트롤하고 있었다.
초조함에 빠져 지금 같은 전쟁 상황에서 무리하게 수련을 하려 하지 않고 몸만 풀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 분함을 잘 기억해라. 그게 네 실력을 훨씬 더 높은 곳으로 올려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렌 제너드 그 자식을 지나치게 의식하진 마. 그놈의 그건 분해할 가치도 없는 일이니까. 외부의 힘을 빌려 억지로 경지를 끌어올린 것이기에 부작용이 속출할 거다. 녀석은 지금 자신의 생명을 연료 삼아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네!”
그렌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이 없는 한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 정리를 했다고는 해도 전 동료이자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의 이상을 안 라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럼 그는 오래 살지 못하는가요?”
“그건 모르지. 힘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상한 방법을 쓴 건 확실하고 그에 부작용이 따라올 것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만, 그 방법이 어떤 방법인지, 그리고 따라올 부작용은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해. 일찍 죽을지, 아니면 폐인이 될지. 하나 확실한 건 녀석의 미래는 불우하기 짝이 없다는 것뿐이다.”
“대체 왜 그렇게 변해버린 걸까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다.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나 반쯤 한탄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크는 그에 대한 답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근본적인 생각부터가 잘못됐어, 라라. 놈은 변한 게 아니야.”
라라의 눈에 깃든 의아함을 확인하며 지크는 말했다.
“본성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거다.”
라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 * *
첫 번째 전투에서 이렇다 할 힘도 써보지 못하고 패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합군은 고이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연합군을 이끌고 있는 플로드 백작은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는 추스른 병력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공격에 나섰다.
우와아아아아!
연합군의 병력이 우렁찬 함성을 토해내며 달려간다. 그 기세는 말 그대로 산을 뒤엎고 바다를 가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세는 기세일 뿐. 드높은 기세가 좋은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 경우는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크악!”
“커헉!”
스틸월 백작군의 반격에 연합군의 병사들이 우수수 쓰러지기 시작했다. 산을 뒤엎고 바다를 가르긴커녕 오히려 연합군 병사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들의 피가 바다를 이룰 것 같았다.
하지만 연합군은 끊임없이 스틸월 백작가를 두들겼다. 확실한 병력의 우위를 이점 삼아 계속 진채의 빈틈을 노렸다.
그러나 왕국의 강철벽이라는 별명을 가볍게 얻은 것은 아니라는 듯, 스틸월 백작군은 그 공격을 잘 방어해내고 있었다.
퍼엉!
토르니움의 검은 마력이 지크를 노린다. 클로원 제국의 비의에 의해 엄청나게 강화된 그렌의 실력이다. 일단 지금 공격은 막을 수는 있지만 그 뒤에 추격해 오는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크는 별 걱정 없이 공격을 막아냈다.
콰아아아앙!
손이 얼얼해지고 근육이 삐걱거린다. 예상대로 지크의 자세는 크게 무너졌다. 하지만 그렌은 추가타를 넣을 수 없었다.
후웅!
옆에서 날아오는 대검이 살벌한 마력을 뿜어낸다. 뒤로 물러서는 지크를 향해 아쉬움 듬뿍 담긴 시선을 보낼 여유도 없이, 그렌은 토르니움을 옆으로 휘둘러야 했다.
쿠우웅!
“큭!”
그렌의 반격을 받은 틸이 고통스러운 음성을 냈다. 그의 거대한 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놈부터 확실히 끝내야 해!’
그렌이 틸의 검을 밀어 내며 토르니움의 검 끝으로 틸의 심장을 노리려 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그렌의 시도는 방해받았다.
후웅!
미약한 파공음. 벌써 몇 번째나 듣는 소리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그 위험도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렌이 고민했다.
‘무시할까?’
상처를 입는 걸 각오하고 토르니움을 더 밀어 넣는다면 적어도 틸만은 확실하게 퇴장시킬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틸 혼자만 상대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지금 들어오는 공격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작용할지도 몰랐다. 결국 그렌은 토르니움의 방향을 꺾었다.
콰앙!
날아오던 화살이 튕겨져 나갔다. 그렌은 이를 갈며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을 노려봤다.
앞 쪽에서는 틸이 다시 대검을 겨누고 뒤에서는 지크의 날카로운 눈이 빈틈을 찾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레오나가 화살을 시위에 건 채 언제나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긋지긋한 포진. 전투 때마다 저들은 자신을 둘러싼 후 협공을 벌이고 있었다. 처음엔 조금 어색한 면이 없잖아 있었건만, 합을 맞춘 지 얼마나 됐다고 셋의 협공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지금처럼 싸운다면 결과야 이제까지와 똑같을 것이다.
힘에 밀려 후퇴.
말이야 후퇴지 결국 도망치는 것이지 않은가.
“한 명을 상대로 비겁하게 세 명이 덤비는가!”
울분을 담아 지크를 향해 외쳐본다. 하지만 그렌의 시도가 통할 리 없었다. 지크는 보란 듯 귀를 후볐다. 대놓고 그렌의 목소리를 개소리 취급한 것이다.
연합군의 본진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이미 몇 번이나 전쟁터에 울린 소리다.
퇴각 신호.
그렌은 이가 부서져라 갈아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과 함께 연합군의 진영 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스틸월 백작군은 이번에도 깊이 쫓지 않았다.
또 한 번의 전투에서 스틸월 백작가가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아군과 같이 진채 안으로 들어온 지크는 무언가를 찾아 돌아다녔다.
‘저기 있군.’
전투 이후의 어수선한 분위기의 병사들을 헤치며 시선이 향한 곳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한스가 고개를 숙였다. 손을 한 번 들어 화답해 준 후, 지크는 한스의 앞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기사 한 명을 내려다봤다.
투구를 옆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그의 안색은 무척이나 좋지 않아 보였다.
“처음 겪는 전쟁은 어떠냐, 동생아.”
그레이그는 눈만 움직여 곁에 다가온 형을 쳐다봤다.
“…최악이야.”
빳빳하게 말라붙은 입술 사이에서 나온 말에 지크는 키득댔다.
“그 정도 말을 할 수 있다면 아직 괜찮네.”
지크의 시선이 한스에게 향했다.
“수고했다. 잘 지킨 것 같군.”
슬슬 예전에 받은 정신적 충격에서 거의 벗어난 그레이그를 지크는 이번 전쟁에 투입시켰다. 조금 남은 정신적 충격마저 씻어버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충격에는 충격으로 덮어씌우는 것도 좋은 일이지.’
게다가 이 전쟁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스틸월 백작가가 존속된다면 후계자인 그에게 전쟁이란 한평생 떼놓을 수 없는 일생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상당한 반대가 있었지만 스틸월 백작의 허락 아래 그레이그는 이번 전쟁에서 처음으로 적을 상대했다. 물론 전쟁 통에 죽어버리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한스를 그레이그의 호위로 배치했다.
이미 한스의 실력은 백작가 내에서도 유명한 데다 백작 부인의 영향으로 백작도 한스에게 상당히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지크는 다시 그레이그를 쳐다봤다.
“몸 잘 추슬러라. 잘 먹고 푹 쉬고. 앞으로 계속 전쟁에 나가려면 몸 상태를 잘 관리해야 하니까 말이다.”
“…알았어.”
다시 전쟁터에 나간다는 생각에 오만상을 찌푸리는 그레이그였지만 그래도 반발하진 않았다.
‘이 녀석의 치료도 거의 끝났군.’
치료란 명목으로 그레이그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이미 만족할 만큼 괴롭혔던 터라 지크도 썩 아쉽지는 않았다.
“다음 전투는 언제일까요?”
한스가 방벽 너머 연합군의 진영이 있는 곳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뭐, 녀석들이 원하는 때 멋대로 뛰쳐나오겠지.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남았다.”
한스와 그레이그가 의문 섞인 눈으로 지크를 바라봤다.
“아무리 머리 안 돌아가는 멍청이라도 이만큼 들이받고 깨졌으면 슬슬 다른 방법을 모색하겠지.”
그리고 지크는 미소 지었다. 한스와 그레이그는 오한이 일었다. 그만큼 지크의 미소는 소름끼쳤다.
“그리고 우리도 슬슬 때려야 하지 않겠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