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9화
그렇게 각자의 생각 속에 전장의 뒤처리가 이어지고 있는 연합군의 진영과 같이, 스틸월 백작가의 진영도 뒤처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 붕대 좀 더 갖다주세요!”
성녀를 상징하는 새하얀 옷은 이미 피와 먼지에 더러워져 그 신성함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루벨라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손은 피로 절여져 있다시피 했고 고운 얼굴에도 점점이 피가 묻어 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머리카락조차 상태는 다르지 않아, 누가 본다면 오히려 그녀가 심각한 부상자인 것처럼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차라리 동네 시장 구석에 돌아다니는 거지가 더 깔끔하게 보일 정도로 엉망인 루벨라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겉모습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여느 때와 같이 와이그가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언제나 루벨라 곁에서 반걸음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조용히 대기하는 그였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뿌득!
“끄아악!”
그의 밑에 깔린 부상자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와이그는 한쪽 발을 이용해 우악스럽게 그를 짓눌렀다.
뿌득!
다시 한번 끔찍한 소리가 나고, 부러져 피부를 뚫고 나와 있던 뼈가 제자리를 찾았다.
“좋아, 다 됐어! 잘 참았네!”
참긴커녕 병사는 있는 대로 고함을 지르고 몸을 뒤틀었었지만 와이그는 병사의 팔뚝을 두드리며 칭찬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이번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스틸월 백작가 병사들을 치료하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전투가 스틸월 백작가 쪽의 승리로 끝난 만큼 부상자들의 숫자는 훨씬 적었지만, 그렇다 해도 절대적인 숫자는 상당했다.
루벨라가 하는 일은 당연히 그들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압도적인 성력으로 부상병들을 치료했지만, 아무리 성녀라 해도 한계가 있었다.
아직 그녀도 젊은 만큼 모든 재능을 개화시키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성력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쉬는 걸 거부했다. 카르위먼의 신관들은 성력과 성법의 계발과 함께 다른 치료 방법도 함께 배운다.
성력이 떨어졌을 때부터 그녀는 지식을 이용해 부상병들을 최대한 치료했다.
와이그도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는 옆에서 묵묵히 그녀의 치료를 도왔다. 카르위먼의 성기사는 치료의 성법을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인 치료 방법은 그들도 배운다.
무엇보다 칼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 만큼 외상에 관해서는 나름 전문적인 지식도 갖고 있는 것이다.
방금 전 와이그가 한 부상병의 부러져 튀어나온 뼈를 맞춘 것도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루벨라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성녀를 수호하는 기사인 만큼 그녀가 무리하는 건 막아야 했다.
와이그는 루벨라를 데리고 부상병들이 있는 막사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슬슬 쉬시죠, 루벨라 님.”
“체력이라면 괜찮아요. 나름 단련한 몸이니까요.”
그리고 알통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한쪽 팔을 들어 구부려 보였다. 그 모습이 기특해 보여 절로 눈웃음이 지어졌지만, 와이그는 애써 정색을 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제 쉬셔야 합니다. 다른 분들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 루벨라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은 충분히 휴식을 취했지 않습니까. 휴식을 취하지 않은 사람은 루벨라 님뿐입니다.”
“하지만….”
루벨라가 항변하려던 그때, 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와이그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루벨라와 와이그가 고개를 돌렸다. 지크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크 님!”
“두 분 모두 고생하시는군요.”
와이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카르나 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거야 압니다만, 두 분이 힘을 쓰신 일에 감사를 표하는 건 또 다른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지크는 루벨라를 바라봤다.
“하지만 루벨라 님은 와이그 님 말씀처럼 좀 쉬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전 아직 움직일 수 있어요.”
루벨라가 항의했지만 지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치료자가 주의해야 할 점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직시하는 겁니다. 치료자가 아파 버리면 치료를 해야 할 사람이 없어지니까요. 그럼 환자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되어 버리죠. 루벨라 님은 그러길 바라십니까?”
“…알았어요. 조금 쉴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루벨라 님.”
와이그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는 여기서 조금 더 치료를 돕고 가겠습니다. 숙소에 혼자 가실 수 있겠죠?”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리고 저한테 쉬라고 그토록 말씀하신 와이그 님은 계속 치료를 돕겠다는 건가요?”
“어쩌겠습니까. 성기사는 신관들보다 체력이 압도적으로 높으니까요. 성녀님께서 혹 성기사로 직책을 바꾸시겠다면 제가 하나하나 가르쳐 드릴 의향도 있습니다만.”
“됐어요.”
와이그는 껄껄 웃었다.
“혹시 루벨라 님이 아무도 모르게 다른 부상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실지 모르니, 제가 숙소까지 확실하게 모셔다드리죠.”
“역시 지크 님. 눈치가 아주 비상하시다니까요.”
“두 분 다 거기까지 하세요.”
루벨라가 살짝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쿠, 이런! 더 이상 루벨라 님을 놀렸다가는 뒷감당이 무섭군요. 아무쪼록 루벨라 님을 잘 모셔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지크 님.”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와이그는 지크와 루벨라를 향해 고개를 한 번씩 숙이고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지크는 루벨라를 데리고 그녀의 숙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분이 상한 걸 표현하겠다는 듯 루벨라는 고개를 돌리고 지크를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오래 가지 않았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계속 화를 내는 척을 하기엔 루벨라의 심성이 너무 착했다.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건 좀 어떻습니까?”
슬쩍슬쩍 지크의 눈치를 보며 화가 풀렸다는 걸 어필해야 하나 고민하던 루벨라는 지크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걸어오자 냉큼 응했다.
“솔직히 힘들어요. 하지만 그래도 해야죠. 생명을 구하는 일인 걸요. 카르위먼의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에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냐며 투덜거리고 있는 첼시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생각. 루벨라의 밝은 얼굴을 보면 그 말에 거짓은 없는 게 분명했다.
“돌아가신 분들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저희의 처치로 살아난 분들도 많아요. 그런 분들의 얼굴을 보면 힘들다는 생각도 싹 날아간답니다.”
“과연 성녀님이시군요.”
“과찬이에요. 하지만 알고 계시죠? 저분들은 이번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걸요.”
“네, 압니다.”
스틸월 백작가 쪽에 머물고는 있지만 루벨라는 어디까지나 중립적 인물이다. 이번 전쟁에 도움을 줄 순 없다. 그 때문에 맺은 계약이 그것이었다.
더 이상 전쟁에 투입할 수 없는 중상자들을 루벨라에게 맡기되, 그 병사들이 모두 회복한다 하더라도 이번 전쟁에서 완전히 제외한다는 것.
“어차피 가만히 뒀으면 죽었을 병사들입니다. 스틸월 백작가 쪽에서는 어느 쪽이든 전쟁에 투입하지 못한다는 결과는 같죠.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는 쪽이 좋으리라는 판단하에서 내려진 결정입니다. 다른 말을 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됐어요.”
그렇게 둘이 루벨라에게 배정된 천막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래, 그래서 지크와 여행을 하게 됐다고?”
“네, 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엄청나게 꼬인 것이, ‘퍽이나 대화하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 목소리였고 하나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였다.
지크와 루벨라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었다.
“저분들은….”
“스녹과 드웨인 씨로군요.”
재미있는 조합이었다. 둘도 지크와 루벨라를 눈치챘다.
“아, 왔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일단 묻기는 한다지만 지크의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보니 대략 무슨 상황인지는 예상이 가는 모양이었다.
“뭐, 별거 아니네. 그저 이 청년에게 이것저것 질문할 것이 있어서 물어보고 있는 것뿐이야. 늙으면 그렇지 않던가.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아지지.”
별것 아니라는 듯 윌위스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는 스녹의 신변을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나이 먹은 자의 단순한 호기심이라기엔 정도가 지나쳤다.
“할아버지!”
그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뾰족한 미성이 울려 퍼지자 윌위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에 반해 긴장하고 있던 스녹의 어깨는 조금 내려갔다.
엘레나가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가 막혀! 또 스녹을 괴롭히고 있던 거예요?”
“괴롭히기는! 내 물어볼 것이 있어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야.”
“정말이야?”
엘레나가 자신을 바라보자 스녹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옆에서 눈을 부라리는 윌위스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리한 엘레나는 스녹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너 말고 노웸에게 물은 거야.”
언제나처럼 스녹의 어깨에 찰싹 붙어 있던 노웸은 윌위스를 쳐다봤다. 윌위스는 노웸에게도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천하의 대지의 환수인 노웸이 고작 그 정도 눈초리에 압박감을 느낄 이유가 있겠는가.
쿠!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노웸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거 보세요!”
“내 저놈의 두더지를 당장 실험대에 올려버릴까 보다!”
뒤가 구린 사람이 진실이 밝혀졌을 때 곧잘 하는 반응처럼, 윌위스도 덮어놓고 노웸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손녀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노웸을 괴롭히지 마요! 그리고 만약 노웸을 실험대에 올린다면 내가 먼저 할 거예요!”
쿠?
아직 포기하지 않았단 말인가! 윌위스를 향해 당당하게 맞서던 노웸도 엘레나의 그 선언에 무척이나 배신감에 사무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조손의 말다툼이 이어졌다. 그건 엘레나가 스녹을 끌고 간 뒤에야 끝났다.
“하여간 손녀라고 키워 놨더니 할애비에게 언성을 높이기는!”
홀로 남은 윌위스는 연신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기세 넘치는 말과는 달리 그의 어깨는 미묘하게 처져 있었다.
“스녹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지크가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그분이 뭔가 했나요?”
그에 비해 루벨라는 영문을 몰라 했다.
“그냥 이유 없이 미운 놈이 있는 법일세.”
“이유가 없진 않지 않습니까.”
지크의 말에 윌위스는 할 말이 궁해 입을 닫았다.
“하여간 나이를 먹었다고 하는 놈이 행동은 어린애가 따로 없다니까.”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윌위스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졌다.
“사람 말을 엿듣고 다니다니. 그건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인 게야.”
“엿들은 게 아니야. 들린 거지. 우리는 인간보다 훨씬 더 귀가 좋단 말이야.”
느긋하게 다가오던 레오나가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그것참 좋겠구나.”
“편하긴 하지.”
누가 봐도 레오나와 윌위스의 2차전이 시작될 모양새다. 지크는 루벨라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저 생산성 없는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다. 루벨라도 지크의 신호를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루벨라 님을 모시고 가고 있던지라. 여태껏 부상병들을 치료하느라 휴식이 절실하시거든요.”
다행히 두 사람은 지크와 루벨라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으르렁댈 뿐.
지크와 루벨라가 떠난 자리에 두 천적 간의 작은 말다툼이 이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