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8화
그렌의 행동은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렌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지만 플로드 백작은 고위 귀족이다.
게다가 군기를 잡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 위계질서를 중시해야 하는 전시상황에서는 오죽할까.
때문에 머리에서 손을 뗀 플로드 백작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호통을 치는 일이었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그러나 그렌의 태도를 보건대 그의 호통이 먹혀든 것 같지는 않았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말이야 질문을 한다고 하지만 눈을 희번덕거리는 것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실력행사라도 할 것 같았다.
플로드 백작도 성이 났다. 그는 결코 온화한 성격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표독하고 음습하며 잔인하고 집요했다.
결단코 그는 자신의 앞에서 이런 오만방자한 자를 내버려 두는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하나의 전력이 아쉬운 상황.
그렌 제너드란 인물은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연합군에서 확실하게 내밀 수 있는 고위 전력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렌의 동료 또한 뛰어난 마법사와 신관이었고 독립적으로 가담한 전 카르위먼 세력을 이끄는 루스 전 신관 또한 그렌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자였으니.
어느 모로 보나 연합군에서 희귀한 인재들과 연관되어 있는 이가 그렌 제너드였다.
‘젠장!’
당장이라도 이놈을 끌어내 목을 치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플로드 백작이 할 수 있는 건 속으로 욕설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뭘 말이오.”
“적들에 대한 정보를 왜 알려주지 않은 겁니까!”
“적들에 대한 정보?”
“마탑의 전 탑주와 그 일행!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 엘프! 성녀 루벨라! 이래도 모른다고 할 셈입니까! 설마 그런 정보를 얻지 못할 정도로 연합군은 무능한 겁니까!”
“그 무슨 생트집이오! 이미 그 정보는 알아챈 지 오래요!”
“그럼 어째서 내게는 알려 주지 않은 겁니까!”
“당신이 천막 안에서만 처박혀 있지 않았소!”
생트집도 이런 생트집이 없었다. 얻은 정보를 공유하려 해도 자신에게 배정받은 천막에만 틀어박혀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자가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로 뒷감당 생각 않고 이놈을 죽여야 할까 플로드 백작은 격렬히 고민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창피함을 느끼고, 올바른 사람이라면 사과를 할 상황이다. 하지만 그렌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생각에 빠져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플로드 백작은 화보다는 오히려 의구심이 들었다.
‘이 인간, 이 정도까지 변해 버린 건가? 대체 유라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분명 계획 초반 때까지만 해도 그렌은 제법 개념도 잡히고 정의감도 풍부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에겐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목표만 쫓는 전투마처럼, 주변 모든 것에 신경을 끄고 멋대로 날뛰는 중이었다.
“그 외에 다른 정보 같은 건 있습니까?”
“나가서 부관에게 물어보시오. 잘 설명해줄 테니까.”
그렌과 드잡이질을 하는 데 힘을 쓰는 것조차 싫다. 플로드 백작은 손을 내저으며 그를 부관에게 떠넘겼다. 그렌은 천막을 나갔다. 끝까지 사과는 없었다.
그나마 나가기 전에 인사랍시고 고개를 한번 숙인 것이 다였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가.’
욕설을 내뱉으며 더 행패를 부리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아무리 그렌이 중요한 인물이라도 이 이상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처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로드 백작은 의자에 늘어져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한시라도 빨리 병력을 재편하고 새로운 전략을 짜야 했지만, 지금은 조금만 쉬고 싶었다.
* * *
첼시는 커다란 천막에서 나섰다. 신선한 바깥 공기를 크게 들이쉬었다.
‘아, 살 것 같아.’
자욱한 피비린내와 고통스러운 신음이 가득한 천막 안에서 해방되니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첼시는 자신이 나온 커다란 천막을 돌아봤다. 그곳은 부상병들 중에서도 중상자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곳이었다. 연합군 내에 얼마 안 되는 신관으로서 그녀는 지금껏 부상병들을 향해 계속 성법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력에도 한계는 있다. 더 이상 성법을 발휘하지 못하자 겨우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첼시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카르위먼을 나왔지만 그녀는 아직 카르위먼의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반드시 카르위먼에 복귀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새하얀 옷감에 수놓아진 문양들이 신비로운 기색을 발하는 신관복은, 지금은 피에 절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새하얀 옷감이 오히려 말라붙은 피를 강조했다.
‘더러워.’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묻은 피를 손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그런다고 피가 지워질 리 없었다.
‘어째서 내가 이런 짓을….’
카르위먼의 성녀로서 만인의 우러름을 받으며 고상하게 살아야 하는 자신이 이런 더러운 곳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이나 돌봐야 하다니.
성녀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지만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더러운 곳을 빨리 떠나고 싶다. 그녀는 걸음을 서둘렀다.
부상자들은 계속 보였다. 경상을 입은 자들은 야외에서 처치를 받고 있었다. 그들도 부상의 고통에 연신 신음하고 있었다.
절로 동정심이 드는 광경이었지만 첼시는 그저 짜증만이 났다.
어느 정도 걷자 그녀는 자신에게 배정된 천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신분이 높은 자, 혹은 군에서 중요한 자들에게 배정된 자들의 천막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대부분 전쟁의 뒤처리로 바쁜지 인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예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첼시의 천막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이 보였다.
“루스 신관님?”
웬 기사 한 명과 대화를 하고 있던 루스가 첼시의 부름에 돌아봤다.
“윈드네 신관이로군.”
“뭐 하고 계시나요?”
“잠시 이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첼시는 루스의 곁에 있는 이를 봤다. 이름은 모르지만 첼시의 기억에 있는 자였다.
‘분명 스틸월에서 배신한 기사라고 했지?’
그는 할튼 바이너였다. 스틸월 백작가가 밸리드의 주구라고 내부 고발을 한 인물. 분명 첼시에게 이득이 될 만한 행위를 한 자였지만,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잘 좀 하지!’
만약 그가 증언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했다면 카르위먼이 지금처럼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닌, 연합군의 한 축으로서 참전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소수의 신관이 저 많은 중상자를 커버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네는 이만 가보게.”
“알겠습니다.”
할튼은 루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첼시에게도 한 번 인사를 하고 그는 떠났다.
“저 사람에게 뭔가 볼일이 있으셨던가요?”
“뭔가 아는 정보 같은 게 있으면 공유해달라고 했을 뿐이네. 아무래도 우리에게 들어오는 정보와 기사들이 얻는 정보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정보를 얻기엔 루스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할튼이 제격이었다.
“물론 저자에게도 그리 좋은 정보가 갈 것 같진 않네만. 배신자라는 건 웬만하면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지.”
“그래서 저렇게 안색이 안 좋나 보군요.”
첼시는 방금 전 본 할튼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것보다는 전장에서 낙담할 만한 무언가가 있던 모양인데, 그런 개인적인 사정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지.”
그리고 루스는 주제를 바꿨다. 그에게 할튼이란 존재는 고작 그 정도의 존재였다.
“부상병들의 치료는 어떤가.”
“최선을 다했지만 부상병들이 너무 많아요. 부상의 정도도 심하고요.”
“심한 자들 대다수는 아마 적 마법사들에게 당한 걸 거다. 이번에 아주 화려하게 날뛰었다고 하더군.”
“우리도 마법사들이 있지 않나요?”
첼시는 피나를 떠올렸다. 이번 전쟁에 미친 듯이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동료.
“이번 전투에서 적 마법사들에게 완전히 밀린 모양이야. 과연 마탑의 전대 탑주와 그 제자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다지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첼시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 그래도 전쟁에서는 이기겠죠?”
“물론이지. 반드시 그래야 해.”
하지만 루스의 단언에도 그녀의 불안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루스의 그것은 누가 봐도 근거를 갖춘 확신이 아닌, 자기 다짐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근거 없는 다짐에서조차 위안거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 지금의 첼시였다.
루스는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첼시는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이들에게 배정된 것보다 명백히 넓은 막사다.
하지만 첼시는 여전히 답답함을 느꼈다. 피투성이의 신관복을 갈아입으려 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어떤 옷을 입든 또 피로 더러워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냄새 나는 간이침상에 드러누웠다. 아무리 관리를 잘 한다 하더라도 전장인 이상 침상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 첼시의 코를 뾰족뾰족하게 찔러댔다.
부상병들을 치료하느라 굉장히 피곤했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또 그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눈만 말똥말똥해졌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펄럭!
그때 천막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첼시는 상대를 확인했다.
‘어쿠스.’
들어온 자는 피나였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로브는 먼지투성이었으며 평소 그리도 열심히 관리하던 지팡이 또한 이곳저곳에 흙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퀭한 눈두덩이와 딱딱한 얼굴이 그녀의 심기가 무척 불편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첼시에게 인사를 할 여유조차 없는지 자신의 짐 앞에 쪼그려 앉아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곧 원하던 걸 찾았는지 그녀는 벌떡 일어서 다시 천막 밖으로 나가려 했다.
첼시의 말이 그녀의 등을 때린 건 그때였다.
“이번 마법전에서 성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면서요?”
피나의 걸음이 뚝 멈췄다. 천막 안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하지만 첼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 좌우될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적 마법사들에게 부상당한 사람이 많아요. 어떻게 안 되는 건가요?”
애초에 첼시는 그리 성격이 좋은 인간이 되지 못했다.
지금까지야 리더인 그렌의 존재와 외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 때문에 있는 대로 내숭을 떨고 있었던 것뿐.
하지만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그녀는 점점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게다가 파티의 리더인 그렌도 지금 뭔가 이상하지 않던가.
분명 화풀이였고 첼시도 그 점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엔 지금처럼은 안 될 거야.”
억눌린 목소리가 피나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제발 그러길 바랄게요. 더 이상 그런 끔찍한 부상자는 보고 싶지 않아요.”
피나는 대꾸하지 않고 천막을 나갔다. 첼시도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닌지라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작은 화풀이를 한 탓일까. 지금껏 똘망똘망하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곧 천막 안에는 첼시의 작은 숨소리만이 들어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