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7화
카앙!
그렌은 화살을 쳐냈다. 지크와 틸의 협공이 제법 매서웠기에, 그 은밀한 화살을 눈치채는 것은 꽤 힘들었다. 자칫하다간 정말로 위험할 뻔했다.
궁사의 실력이 어찌나 좋은지 그렌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의 심장 쪽에 화살을 쏘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렌이 느낀 것은 위기감보다는 거센 짜증이었다. 지크를 죽이는데 또다시 방해를 받았다.
‘어떤 새끼야!’
그렌은 급히 자신을 저격한 상대를 찾았다. 만약 그의 손에 걸린다면 곱게 죽이지 않을 그런 기세였다.
상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상대가 너무 눈에 띄었다.
가벼운 경장에 활 하나를 쥐고 시위를 메기고 있는 여인.
그녀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것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긴 귀였다.
그러나 굳이 귀까지 확인하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그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몰라볼 수가 없다. 그녀는 그의 완벽한 인생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레오나!’
엘프 일족의 공주인 그녀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아는 눈초리가 아니다.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던 레오나의 시선은 존경심과 정이 뚝뚝 떨어지던 것이다.
저런, 적을 보는 것처럼 싸늘한 눈초리는 절대 아니었다.
“괜찮아, 지크?”
그녀가 저런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날리는 것도 지크가 아닌 자신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향한 건 살기가 담긴 화살촉뿐. 지크를 걱정하면서도 그녀는 그렌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렌을 시선조차 떼기 위험한 적으로서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오나가 지크와 같이 여행을 다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라마저 지크의 편으로 돌아선 지금, 그 사실은 자그마한 위안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그렌이 지크를 쳐다봤다. 어떤 의도를 담은 시선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낸 인간임이 분명한 지크에게 절로 시선이 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결정을 후회해야 했다. 아주 미미한 표정 변화였지만, 그는 바로 눈치챘다.
지크의 입가가 살짝 올라간 것을.
그건 분명 조롱이었다. 자신의 동료의 훌륭함을 자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렌은 거기에 하나의 의미를 더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자신에게서 빼앗은 동료를 과시하는 것.
틸은 그렌에게 있어 적일 뿐이다. 때문에 그가 지크의 편으로 나타났을 때 놀랐을 뿐, 분노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오나는 다르다. 그녀는 그의 완벽한 인생에서 옆에 서서 훌륭한 조연이 되어 줘야만 하는 자인 것이다.
그런 레오나가 증오스러운 지크에 편을 들어 자신을 적대하고 있다.
‘라라에 이어서!’
정말로 너무도 화가 나서, 심장을 몸 밖으로 꺼내 차가운 얼음물에 식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렌이 분노할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 멀쩡해.”
“그러기엔 상처가 많은 것 같은데?”
“이 정도야 그냥 생채기 정도야. 게다가 조금쯤 심하게 다쳐도 상관없어.”
그리고 지크는 여봐란 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돌아가면 루벨라에게 치료해 달라고 하면 되니까.”
“루벨라…. 분명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 카르위먼의 성녀를 말하는 거지?”
또다시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이야기가 들렸다.
루벨라가 지크 쪽 진영에 있단다. 어째서 중립을 선언한 카르위먼의 성녀가 적진 쪽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이번 시간선 초창기부터 지크와 루벨라의 사이가 가까웠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의 올바른 동료가 세 명이나 지크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죽여 버리겠어.”
그렌이 중얼거렸다. 전장이라는 소란스러운 환경 안에서 울린 작은 목소리였지만, 지크 일행은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저 사람, 예전에 봤던 그 사람이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고 하지 않았어? 말하는 투를 보니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하지만 레오나의 그런 의문은 지크의 얼굴을 보고 풀렸다.
“하긴, 너도 그거였지?”
“맞아. 나도 그거지.”
지크는 낮게 웃으며 긍정했다.
“그래도 우리 고매하신 명예 성기사께서 화가 잔뜩 나신 것 같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안 그래도 그럴 셈이야.”
레오나는 그렌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성질 더러운 작자로 보이니까. 딱 악당의 얼굴이야.”
“크큭, 정말 그렇지?”
레오나의 말이 이어질수록 지크는 웃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반대로 그렌의 분노는 끝도 없이 솟아올랐다. 그와 함께 토르니움에 주입되는 마력도 커져만 갔다.
‘전부 죽인다!’
그렌은 마음먹었다. 더 이상 이 시간선에 남은 희망을 버리기로. 완벽한 인생의 조연이든 나발이든, 일단 전부 죽여 버리고 이 시간선을 되돌리기로 했다.
쾅! 쾅! 쾅!
지크, 틸의 검과 그렌의 검이 다시 충돌했다. 그 틈을 간간이 레오나의 화살이 파고들었다.
지크와 틸의 협력만으로 미세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던 그렌이다.
거기에 레오나의 화살이 곁들여지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뛸 것만 같던 그렌의 손발이 차츰 어지러워졌다.
쿠웅!
“크윽!”
또다시 날아온 화살을 그렌이 간신히 쳐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크와 틸의 검을 상대하는 데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콰앙!
어찌어찌 틸의 공격은 막아냈다. 하지만 그사이 지크의 검은 정말로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렌은 땅바닥을 굴러 지크의 검을 피했다.
급히 일어서서 다음 공격에 대비하는 그렌. 하지만 지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폭소를 간신히 참아내는 듯한 지크의 얼굴. 녀석은 자신을 열렬히 비웃고 있었다.
‘제기랄!’
토르니움의 자루가 부서지지 않을까 손에 힘을 준다. 어떻게든 지크만은 죽이고 싶었다.
혹시 지크처럼 자신도 도움을 청할 자들이 있을까. 하지만 그들의 주변에 다가오는 자는 없었다.
아무리 기사들이라도 웬만한 실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들의 전투에 끼어들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정도 수준의 기사들은 이미 다른 자들과 맞붙고 있었다.
수는 연합군이 많다고 하더라도 질은 스틸월 기사단이 위였기에, 연합군의 실력 있는 기사들은 최대한 스틸월 기사단의 고위 기사들을 붙잡아둬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합군의 기사들은 같은 기사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컥!”
한 스틸월 백작가의 기사를 몰아붙이던 연합군의 기사 한 명이 푹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목엔 화살 한 대가 박혀 있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연합군 기사들이 그렌을 도우러 오는 건 지난해보였다.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하지만 그렇게 불평을 해 봐야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곧 연합군의 상황을 더욱 암울하게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연합군이 잔뜩 몰려 있는 지역에 불기둥이 솟았다.
동시에 작은 화염탄들이 연합군의 기사들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마법사들을 격퇴하고 병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한 마법사들의 발길이 기사들이 부딪치는 지점까지 닿은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나?”
치열한 전투 와중에 들리는 느긋한 목소리. 그건 하늘에서 들려왔다. 한 명의 인간이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이번에도 그렌이 아는 자였다.
‘윌위스 드웨인까지!’
미래에 마도의 마왕이라 불리게 되며, 지금도 마법에 관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간이 바로 그다.
그런 이가 또 지크의 아군으로서 등장했다.
“필요 없어. 이미 몰아붙이고 있으니까. 너는 가서 네 손녀나 돌보는 게 어때?”
레오나가 윌위스를 보며 불퉁하게 말을 했다.
“그 녀석은 문제없다. 내 다른 제자들과 같이 그나마 안전한 진채 안에서 마법만 쏘고 있으니 말이야. 게다가 나름 실력 괜찮은 호위도 붙어 있고.”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윌위스의 목소리에는 뭔가 못마땅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렌은 윌위스의 미묘한 내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귀에 들린 건 단 하나였다.
윌위스의 손녀라면 엘레나를 말하는 것일 터.
‘엘레나도 지금 저기에 있다고?’
라라, 레오나, 루벨라 거기에 엘레나까지.
그의 완벽한 인생을 위해 점찍어 놓은 자들이 전부 적들의 진영에 있었다.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일인가.
그렌의 이는 이미 갈 대로 갈렸다. 너무 갈아서 이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머릿속에 울리는 생각은 당장 지크를 죽이고 싶다는 것뿐.
그러나 안 그래도 밀리고 있는 판국에 윌위스마저 적으로 가세한다면 승리는 날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가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뿌우우우우우!
커다란 신호가 울린다. 연합군 측에서의 퇴각 신호였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그렌이 느낀 감정은 짜증이었다. 저 빌어먹을 지크를 눈앞에 두고 등을 돌려 도망치라니.
하지만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분노에 먹히지 않은 얇은 이성이 그렌에게 경고를 보냈다.
지금은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다. 안 그래도 불리한 상황에서 주변 아군마저 사라진다면 그는 홀로 적진에 고립될 것이다.
분노로 몸이 떨렸다. 그가 부작용을 감수하고 힘을 급격히 끌어 올린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지크를 타도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 정도까지 했으면서도 결국 눈앞의 지크를 처리하지 못했다.
무력감이 몸을 휘감았다. 절대 이러기 위해 이 전쟁을 유도한 게 아니다.
그는 지크를 노려봤다. 꽤 많은 상처가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얄미웠다.
‘어떻게든 저 녀석을 죽인다!’
그 때까지는 절대로 시간선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다른 시간선의 지크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지크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다음에는 꼭!’
그렌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며 자기 진책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연합군의 다른 기사와 병사들도 천천히 퇴각을 했다. 스틸월 백작가도 무리하게 쫓지 않았다.
그렇게 첫 번째 전투가 끝났다.
* * *
스틸월 백작가의 진책 앞으로 무수한 시체가 널브러졌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연합군의 것이었다. 연합군은 무수한 시체만을 만들었을 뿐, 결국 스틸월 백작가의 진채 안으로는 한 발도 들이지 못 하고 후퇴했고, 스틸월 백작가는 나름 피해를 입긴 했지만 연합군에 비해 무척이나 적은 피해로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첫 전투는 누가 봐도 이견이 없는, 스틸월 백작가의 완벽한 승리였다.
당연히 퇴각하고 돌아 온 연합군의 사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한 번의 전투에서 패했다고 사기가 땅을 뚫고 들어갈 정도까지 된 건 아니었다. 아직 숫적으로 적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위안이 됐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병사들의 입장이었다.
오늘의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 전략을 짜야 하는 지휘부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아야 했다.
‘단단하군.’
플로드 백작은 스틸월 백작가의 진영을 그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만큼 잘 어울리는 표현도 없었다.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상황이 돌아간 터라 이번 전쟁이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전투에서 설마 적의 방벽 일부를 점령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드러난 결과는 최악이었다.
벌써부터 부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스틸월 백작가와 맞부딪쳤을 때 항상 나왔던 결과가 이번에도 똑같이 나올 것 같았다.
바로 패배라는 결과가.
‘그럴 순 없지.’
이 기회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가. 절대로 예전과 똑같은 결과가 있어서는 안 됐다.
‘오늘의 전투를 교훈 삼아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하지만 그의 상념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백작님!”
경비병의 제지도 아랑곳없이 다짜고짜 자신의 천막 안으로 들이닥친 그렌을 보며 플로드 백작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