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6화
전쟁터에서 어울리지 않는, 경쾌하다 못해 경박한 말투. 하지만 거기에 담긴 특유의 자신감은 말을 한 자의 개성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었다.
그건 한스와 라라에겐 구원의 소리였고, 그렌 또한 반길 소리였다.
“지크 님!”
반가움에 한스가 지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지크는 한스의 상태를 훑었다.
“어이구, 꽤 당한 모양이네.”
“치명상은 없습니다.”
“그래 보인다. 그래도 일단 물러가서 쉬어.”
“아군이 수적으로 부족해 한 명의 전력이 아쉬운 상황이지 않습니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그러냐. 그러면 네 좋을 대로 해라.”
어차피 ‘고작’ 저 정도 다쳤다고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약하게 훈련시키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크는 제자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만은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한계를 재는 일도 가르쳤다.
몸이 부서질 걸 각오하고 움직이는 것과, 뭣도 모른 채 감정에 휩쓸려 나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아직 포션은 남았지?”
“네. 하지만 굳이 사용해야 할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은 아껴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 공적으로 인해 대량으로 얻었던 포션도 지금은 그 수가 간당간당했다. 지크의 고된 수련과 그들의 여행의 강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써. 쓸 때는 써야지. 게다가 이번 전쟁에서 이기면 또 잔뜩 뜯어낼 수 있지 않겠냐.”
지크는 이번에 아예 밸리드의 거점인 피네 자작가 또한 쓸어버릴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보상이랍시고 꽤 많은 포션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지크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거부할 이유도 없다.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션을 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잠시 그렌에게 향했다.
“조심하십시오, 지크 님. 저자, 예전 그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더 강한 것 같다고?”
“…네.”
지크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솔직히 말을 했던 한스가 슬쩍 지크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지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한스도 애초에 지크가 이런 말에 기분이 상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안다.
다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걱정을 했을 뿐. 지크의 그렌 혐오를 한스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알겠다. 너희는 이만 다른 녀석들을 도와라.”
“네!”
한스는 라라를 데리고 다른 기사들을 돕기 위해 이동했다. 걱정이 되는지 라라는 몇 번 지크를 돌아봤지만, 한스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지크에 대한 한스의 믿음이었다.
“얘기는 끝났나?”
평소의 존대는 온데간데없다. 하지만 지크는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저 녀석이랑 가면 쓰고 존댓말 해대던 때가 더 소름 끼쳤지.’
이제야 대놓고 서로 간에 적의를 마음껏 표출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렌의 태도가 변했기에 가능한 것. 언제나 용사라는 가면을 쓰고 있던 그렌이 저런 변화를 겪었다는 건 심경의 변화가 무척이나 크다는 방증이다.
‘역시 저번 유라스에서의 일이 충격적이었던 거겠지.’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저렇게 충격을 받으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부터는 더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텐데.
“끝났지.”
지크도 가면을 벗어던지고 반말로 대꾸했다. 그렌에게 하는 존댓말을 걷어치우자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 없었다.
“후회는 없길 바라마. 그게 네 마지막 대화일 테니까.”
“오, 이거 무서워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데?”
지크가 마치 거센 한파 속에 서 있는 마냥 자신의 몸을 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지크의 조롱은 그렌에게 어떤 동요도 주지 못했다. 그의 목표는 확고했다.
지크의 죽음.
그렌이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앙!
두 개의 검이 충돌했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 전투의 굉음은 격렬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가로막은 은색의 궤적에 검은 검신이 미친 듯 쏟아져 들었다.
쾅! 쾅! 쾅! 쾅!
지크는 그렌의 검을 모조리 쳐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크가 그렌을 대등히 상대하는 건 아니었다.
‘역시 버겁군.’
지크는 날아오는 참격을 또 한 번 튕겨내며 생각했다.
무슨 짓을 했는지 급격히 강해진 그렌은, 확실히 지금의 지크보다 강했다. 게다가 검의 차이도 뼈아팠다. 회귀 전의 애검인 토르니움의 성능은 지크도 잘 알고 있다.
나름 명검이긴 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검인 지금의 검으로는 토르니움을 수월히 상대할 수 없었다.
‘윈두르가 그리워지네.’
괴상한 모양의 새침데기 애검이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그렌의 커다란 공격에 지크의 검이 크게 튕겨 나갔다. 그의 품이 텅 비었다. 그렌은 빈틈 안으로 토르니움을 비집어 넣었다.
후웅!
하지만 몸을 뒤로 던지다시피 한 지크의 반응에 가슴을 살짝 베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그렌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쁜 눈빛으로 지크를 쫓아갔다. 지크가 흘리는 피가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콰직!
마력으로 보호하고 있었지만 역시 토르니움의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버티긴 무리인 모양이다. 지크의 검에 살짝 금이 갔다. 이도 이미 여기저기 나가 있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그렌은 신이 났다.
그에게 있어 지크란 존재는 하늘 위의 구름 같은 존재였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그저 올려다보기만 해야 하는 그런 존재. 하지만 회귀를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그 감정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 대단한 지크조차 자신의 계획에 이리저리 휘둘려, 결국 브레이브에서 모어로 타락했다. 하늘을 떠다니는 커다란 구름에 밧줄을 감아 진창으로 처박는 것 같은 저열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 시간선은 너무도 달랐다. 이제는 완전히 진창에 묻혀 더 이상 고고하게 하늘을 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지크가, 자신이 묶어 놓은 밧줄을 완전히 풀어버리고 다시 높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예전에 느꼈던 그 암담함이 다시 떠올랐다.
물론 회귀라는 완벽한 힘이 있는 한 자신이 질 리는 없다. 그러나 다시 떠오른 그 불쾌한 감정은 계속 그렌을 자극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번 시간선을 끝끝내 지속한 이유가.
그런 지크가 지금 자신의 힘에 완전히 짓눌리고 있었다. 하늘의 구름을 다시 한번 진창에 패대기치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죽인다!’
지크를 죽이고 그의 주변을 모조리 뒤집어엎어 변수의 근원을 찾아낼 것이다. 그럼 다음 회귀부터는 더욱 적절한 계획하에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완벽한 인생을 위하여.
하지만 공격을 하면 할수록 그렌의 표정은 점점 나빠졌다. 분명 그렌은 지크를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그의 승리로 끝날 것만 같은 전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빌어먹을!’
회심의 일격이 막힌 후에 그렌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좀 죽어!”
속에 차오른 울화를 크게 내뱉으며 거세게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앙!
하지만 이번 공격조차 막혔다.
“힘과 속도는 올랐지만 그 덕에 움직임에 빈틈이 많잖아. 너 그 힘, 제대로 얻은 게 아니지?”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지만 움직임은 멀쩡한 지크가 유들유들 입을 열었다.
“몸이 힘에 휘둘리는 게 훤히 보인다.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도 유분수지. 얼마나 열등감이 높으면 그딴 맞지도 않는 옷에 팔다리를 억지로 구겨 넣고 있냐?”
지크야 평소처럼 상대를 조롱하는 혓바닥을 놀린 것뿐이다. 하지만 지크의 예상보다 더 그의 언변은 그렌에게 틀어박혔다.
지크의 입에서 나온 열등감이란 소리가 열쇠였다.
“죽어어어어!”
그렌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그 기세가 무척이나 삼엄해 지크도 경시하지 못하고 방어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의 혀는 계속해서 돌아갔다.
“뭐야, 왜 흥분해? 설마 내가 한 말 중에 정곡을 찌른 말이라도 있는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화를 낼 게 아니라 스스로를 겸허히 돌아봐야지. 이렇게 화만 낸다면 넌 영원히 나아가지 못해.”
“그딴 말은 날 쓰러뜨리고 나서 해라! 내 공격에 제대로 반응도 못 하는 놈이!”
“아, 그건 인정해. 지금 네 실력은 나를 확실히 능가한다. 겸손하게 인정하지. 맞지 않는 옷이라지만 그 옷이 화려하기 짝이 없다는 건 확실하니까.”
그러나 지크의 목소리에 위기감은 없었다.
“하지만 예전에 배운 게 있거든. 강한 놈 상대하는데 굳이 혼자서 덤빌 필요 없잖아?”
“무슨 헛소…!”
콰아앙!
그렌은 급히 옆으로 검을 들었다. 거대한 충격이 몰아쳤다.
“크으윽!”
그렌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움직이는 것만으로 끝끝내 공격을 버텨냈다.
“흠, 대단하군.”
자신을 공격한 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렌은 살벌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가 크게 놀라야 했다.
그렌 자신도 아주 잘 아는 자였다.
‘틸?’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의 단장.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의하면 재난의 마왕이 되어 영원히 세상을 방랑해야 하는 자가 거기 있었다.
그는 지크의 옆에서 자신의 검을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지크와 친근한 동료라도 되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만만치 않을 거라고요.”
“저번 피알루에서 살짝 봤을 때 꽤 대단한 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런 기습 공격에까지 대항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싸우지 않으시겠습니까?”
“흠.”
틸은 자신의 거대한 검을 그렌을 향해 겨눴다.
“신뢰와 실적은 우리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요.”
“그럼 할 일은 하나뿐이군요.”
지크도 새로운 검을 꺼낸 후 그렌을 쳐다봤다.
누가 봐도 두 명이 힘을 합쳐 그렌에게 대항을 하려는 모습이다. 그렌은 그 모습을 증오스럽게 쳐다봤다. 지크를 처리할 기회를 놓쳐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눈앞의 모습은, 그렌에게 무척이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저 두 녀석이 손을 잡다니. 마치 브레이브 시절 같잖아!”
지크가 용사였던 시절의 일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녀석들이 용사라면 난 뭐야.’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진정한 용사는 자신뿐이어야 한다. 그가 브레이브의 흔적을 지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한데, 그 기분 나쁜 잔상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지워야 해!’
그렌이 토르니움을 꽉 잡았다. 주인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토르니움이 불길한 공명음을 뿜어냈다.
“흐아아아앗!”
그렌의 기합성을 시작으로 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이미 지크와 그렌의 전투만으로도 주변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주변에 있는 기사나 병사들도 감히 끼어들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전투는 엄청났다. 거기에 틸이라는 막강한 사내가 끼어드니 전투는 더더욱 거칠어졌다.
지크와 틸의 협공은 무척이나 매끄러웠다. 그 모습에 그렌은 더더욱 성질이 났다. 정말로 예전 브레이브 시절의 그들 같지 않은가.
“죽어어어!”
온몸의 마력을 폭발시키며 그렌이 둘을 공격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마구잡이로 밀어붙일 수 없었다. 둘은 거의 대등하게 그렌과 맞서고 있었다.
‘젠장! 조금 더 익숙해질 시간이 있었다면…!’
강한 힘을 억지로 주입한 탓에 그렌도 아직 모든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화가 났다. 물론 억지로 힘을 끌어올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화를 낼 자격도 없었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렌은 미미하게나마 우세를 잡을 수 있었다. 그만큼 그렌의 힘의 증폭률이 컸다. 그렌은 다시 한번 자신감을 다잡으며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아온 화살 한 대가 그의 자신감에 초를 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