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5화
그렌의 얼굴은 전장에서 적으로 마주친 사람을 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했다. 하지만 왜일까. 라라는 그 모습이 마치 폭발하기 전 활화산 같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어.”
“그래?”
태연하게 대답하면서도 라라는 그렌의 모습을 견제하기에 바빴다. 당장이라도 토르니움이 그 검은 이빨을 드러낼 것 같았다.
“스틸월 백작가에 고용된 거야?”
“따지자면 그렇지. 저번 스티프 요새 공략전에도 참가했는데, 눈치 못 챘어?”
그렌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오로지 지크에 앞서 공을 세우겠다는 생각 때문에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솔직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그가 라라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어쩔까.’
그렌은 편안한 얼굴 뒤로 라라의 처우를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은 동료였지 않던가.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민할 게 뭐 있어. 어차피 적이잖아.’
그것도 그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전쟁에서 말이다. 만약 그녀가 ‘올바른 길’로 돌아올 낌새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그러진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망가진 녀석’이야. 이참에 치워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안 그래도 변수 때문에 돌아버릴 상황. 더 이상의 변수를 예방한다는 차원에서도 나쁠 것 없었다.
“어쨌든 전장에 섰다는 건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지?”
그렌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걸 깨달은 라라가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힘찼다.
“그래.”
“알았어.”
그렌이 토르니움을 들어 올렸다.
“그럼 죽어.”
그렌이 몸을 던져 검을 휘둘렀다. 속도는 빨랐고 검에 담긴 힘은 거대했다. 검은 검신에 담긴 마력이 주변을 마치 토막 내 버리겠다는 듯 줄기줄기 뿜어졌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만한 강맹한 공격.
하지만 라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공격을 마주했다.
콰아앙!
둘의 검이 부딪쳤다.
“크으윽!”
라라가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렌의 검의 위력은 정말로 엄청났다. 몸이 휘청거리고 다리가 일순 풀렸다. 당장 검을 놓칠 것처럼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프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라는 버티고 섰다. 그렌의 일격은 라라의 검을 뚫지 못했다.
“응?”
그렌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마치 일어날 리 없는 일을 본 것처럼 의구심이 샘솟았다.
그렌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다시 한번 그의 검이 막혔다.
콰아앙!
또 막혔다.
콰아아아앙!
조금 더 힘을 줘서 때렸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태풍에 휘날린 가랑잎처럼 라라의 몸은 이리저리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끝끝내 그렌의 공격을 막아냈다. 오히려 그렌에게 반격을 날려오기도 했다. 물론 막기에도 급급한 상태에서 한 반격이 치명적일 리 없다. 그렌에게는 별 위협도 되지 않는 공격이다.
하지만 반격을 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라라가 온연히 검에 집중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건 그렌도 안다. 게다가 지금 그렌의 실력은 라라와 헤어지기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진 상태.
하지만 지금, 아무리 그렌이 전력으로 한 공격이 아니라지만 라라는 그렌의 공격을 힘겹게나마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짧은 기간 동안 라라의 실력이 급상승했다는 뜻이다.
그렌은 분노가 치솟았다. 자신은 갖고 있지 못한, 빛나는 재능이 눈앞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감히 자신이 마련해 준 올바른 길을 거부한 망가진 인형이 재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헉! 헉!”
라라는 숨을 헐떡였다. 발끝까지 따라온 죽음의 공포에 그녀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하지만 그럼에 라라의 낯빛은 나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지크의 경고대로 그렌은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라라는 그 그렌의 공격을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었다. 그건 지금껏 계속 부정당해왔던 검의 실력이 늘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였다. 게다가 상대가 라라의 재능을 부정했던 그렌이 아니던가.
불리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도 라라는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이 어떻든, 지금 상황이 위기라는 건 분명했다. 라라도 자신을 보는 그렌의 눈빛이 완전히 변했다는 걸 알아챘다. 그가 본격적으로 덤벼들 것이라는 것도. 아무리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전투가 즐겁다 하더라도 목숨을 내던져버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위에 도움을 청하는 것도 어려웠다. 다른 이들도 적과 맞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을 게 뻔했다. 어쨌든 수적 우세는 적이 갖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렌에게서 시선을 뗀 순간 바로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것임을, 라라는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렌을 만나면 신호를 보내라고 했었지.’
지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할 수 있을까.’
지금 그렌의 기세로 보건대 간단한 신호를 보내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라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야, 할 수밖에 없어. 팔 하나쯤 내준다면 가능할 거야.’
다행히 지금 스틸월 쪽에는 카르위먼의 성녀라는 어마어마한 신관이 붙어 있지 않던가.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료들이 나누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지크와 성녀는 보통 친분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부탁하면 팔 한 짝 정도는 어떻게 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 이상의 해결책은 생각나지 않았다.
쿵!
그렌이 발을 굴렀다. 라라는 검을 곧추세우고 그렌의 공격에 대비했다.
‘어?’
하지만 그녀의 대비는 소용없었다. 정신이 든 순간, 그렌은 바로 그녀의 앞에 와 있었다.
그렌이 토르니움을 휘두른다. 검은빛 마검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라라의 목으로 향했다. 어떻게 검을 휘둘러 발악이라도 하기 위해 팔을 움직였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너무도 느렸다.
그제야 라라는 자신이 그렌의 실력을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렌의 검이 라라의 목을 벨 것만 같았다.
그때, 토르니움의 검은 검신 앞으로 끼어드는 새하얀 검이 있었다.
콰아앙!
“꺄악!”
라라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굉음과 함께 일어난 거센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흩날렸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라라는 눈앞의 일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새하얀 검을 가진 사내 한 명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괜찮아요?”
한스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근처에 위험에 빠진 기사 분들이 있어서 자리를 비워 버렸어요.”
그리고 한스는 시선을 전면에 뒀다. 계속해서 라라를 보고 이야기를 하기엔 상대가 너무 위험했다.
“너는….”
“오랜만에 뵙는군요.”
한스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한스는 그렌에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 증오스러운 지크가 데리고 다니던 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그렌에게 중요한 건 한스의 등장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앞을 막는 한스와 한스 뒤의 라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래도 지크 일행과 그렌의 일행이 종종 마주쳤으니만큼 한스와 라라도 안면 정도는 있었다. 지금은 둘이 같은 진영에 속해 있으니 그사이 조금 더 인연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렌의 눈에 둘의 사이는 그보다 훨씬 더 깊어 보였다.
“…둘이 친해 보이는군.”
한스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 같은 때에 물을 말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답하는 게 그다지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기에 한스는 순순히 대답해줬다.
“지금 라라 씨는 우리 일행이니까요.”
“…우리? 지크 놈의 일행?”
“당신이 지크 님에게 놈이라는 호칭을 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한스가 기분 나빠 항의했지만 그렌은 대꾸할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이 버린 망가진 인형이 지크의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는 사실만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배신이었다.
라라를 멋대로 다루려 한 것도 그였고 그게 안 된다고 라라를 쫓아낸 것도 그였지만, 그래도 배신이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그렌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렌의 마음속을 짐작할 수 없는 한스였지만 그렌이 화가 났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라라 씨!”
“네!”
“당장 지크 님에게 신호를 보내요!”
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렌이 검을 휘둘러왔다. 토르니움이 주인의 마력을 게걸스럽게 빨아먹으며 엄청난 힘을 뿜어냈다. 그에 에스텔레이드 또한 환한 빛을 내뿜으며 마주 휘둘러졌다.
콰아아아앙!
라라와 그렌의 싸움에서 들린 굉음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강렬한 소리가 전장을 메웠다.
콰앙! 콰앙! 콰앙!
굉음은 계속해서 울렸다. 하얀빛의 에스텔레이드와 검은빛의 토르니움이 연신 부딪치는 광경은 마치 신화 속의 싸움을 연상시켰다.
“크윽!”
한스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에스텔레이드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조금 약해진 듯했다.
‘강해!’
무척이나 심플한 평가였지만, 지금 그렌의 실력을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저것이었다.
‘이게 정말 예전의 그 인간인가?’
한스도 지크와 붙어 다니며 그렌이 싸우는 모습을 꽤 봐 왔다. 그리고 가장 최근 그렌의 전투 장면을 봤을 때, 한스는 생각했다.
자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실력이라고.
고작 그런 실력으로 지크와 항상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보며 감탄 반 어이없음 반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렌의 실력은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고 있었다.
‘지크 님과 동등, 어쩌면 지크 님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이제야 왜 지크가 그렌에 대해 계속 주의를 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어떤 짓을 하더라도 자신이 그렌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후웅!
다시 한번 토르니움이 휘둘러졌다. 한스는 허겁지겁 그 공격들을 막아섰다. 검에 실린 힘과 속도 그 모든 것이 한스를 앞선다. 아무리 에스텔레이드가 빛을 내뿜어도 토르니움의 검은 검신은 압도적으로 빛을 부수고 들어 왔다.
한스의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치명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상처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스의 움직임은 여전히 경쾌했다.
‘이 정도야 훈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지크와의 대련 때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던 게 바로 한스다. 이런 상처 따위로 움직임이 어색해지진 않는다.
‘의외로 할 만한데?’
그렌의 상식 외의 실력에 경악한 것도 잠시. 한스는 내심 그런 생각을 품었다.
분명 상대의 실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커녕 지크보다도 위다. 그건 지크에게 얻어터지면서 배운 한스이니만큼 확실했다.
하지만 지크의 공격보다 버티기 수월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 사람, 움직임이 조금 어색한 면이 있어.’
예전에 봤던 그렌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깔끔했던 걸로 기억한다. 싸우면 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검술 실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조금 더 노력을 해야 따라잡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렌의 움직임은 예전에 봤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미세하긴 하지만 움직임에 균열이 생기고 있어.’
한스가 그나마 버티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그게 한스의 승리를 약속해주진 못한다. 버티는 것도 얼마 못 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스도 그렌과 여기서 결판을 낸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이 사람은 지크 님의 먹잇감이랬으니까.’
콰아앙!
한스와 그렌의 사이로 검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부딪친 마력이 서로 간에 반발해 싸우던 사람들을 뒤로 튕겨냈다.
몸의 균형을 잡은 그렌의 눈이 끼어든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의 살기가 짙어졌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나도 좀 끼워주는 게 어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