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03화 (503/628)

제503화

새롭게 등장한 플로드 백작가의 병력은, 고지대에 위치해 연합군의 진영을 훤히 볼 수 있는 스틸월 백작가의 병사들에게도 아주 잘 보였다.

누가 봐도 지금껏 상대한 이들과는 다른 병사들의 모습에 전투의 긴장감은 배가 됐다.

“지금부터 진짜 전투군요.”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꽉 쥐었다. 그 옆에서 스녹이 노웸을 어깨에 태우고 전장을 보고 있었다. 엘레나는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할아버지와 더불어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 라라가 전진해오는 병사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괜찮아? 그렌 제너드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데.”

라라가 지크를 쳐다봤다. 의외로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미 마음 정리는 끝냈어요. 보통 각오로 그 일행을 나온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됐다. 하지만 만약 놈과 마주친다면 각오 단단히 해. 놈은 예전에 네가 알던 그놈이 아닐 테니까.”

“적으로 만났으니 단호할 거란 소린가요?”

“아니. 일단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을 거다. 게다가 아마 너를 만나면 단호하단 정도로 끝내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제가 붙어 있겠습니다.”

한스가 말했다.

“좋아. 하지만 녀석이 온다면 바로 신호를 보내라. 지금 적진에서 가장 무서운 놈은 그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그것만 알아두면 나머지는 너희 마음대로 해도 돼.”

지크는 입술을 살짝 핥으며 전면을 바라봤다.

“나도 마음대로 할 생각이니까.”

* * *

정예병을 전면 배치한 연합군이지만, 처음부터 그들을 투입시키진 않았다. 오늘도 가장 앞에 서서 달려드는 자들은 장비도 훈련도도 떨어지는 용병들과 주변 영지의 병사들이었다.

우와아아아아!

고래고래 함성을 지르며 병사들이 돌격한다. 물론 훈련도도 떨어지는 병사들이 사기가 좋을 리는 만무할 노릇. 그들의 전의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서슬 퍼런 창날을 겨누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독전관이 있었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면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뒤로 도망가거나 멈춰 있으면 확실히 죽는다.

어쩔 수 없이 연합군의 병사들은 죽음을 향한 돌진을 계속했다.

슈슈슈슉!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화살비가 쏘아졌다. 하늘을 향했던 화살촉이 곧 지면으로 방향을 틀더니 지면을 새까맣게 메운 병력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크아아악!”

“아아악!”

방어구랄 것도 없는 연합군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화살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얻었는지, 아니면 직접 만들었는지 조잡한 방패를 들어 올리는 자들도 몇몇 있었지만 그들은 극소수였다.

그마저도 미숙하기 그지없는 숙련도 때문에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병사들은 오로지 저 눈먼 화살이 자기를 피해 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도 연합군은 꾸역꾸역 앞으로 전진했다.

얼기설기 엮은 사다리를 벽에 갖다 대 벽을 오르려 노력한다. 어떤 이는 밧줄을 던지기도 했고 어떤 이는 도끼로 나무 벽을 무식하게 찍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행위든 스틸월 병사들의 격렬한 저항에 가로막혔다.

서로 간에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당연히 그 비율은 연합군 쪽이 월등히 높았다.

플로드 백작가의 정예 병력이 움직인 건 그때였다.

척! 척! 척!

마치 똑같은 의식을 공유하듯 대열을 맞춰 전진하는 플로드 백작가의 병력은 그 움직임만으로도 상대에게 압박감을 줬다.

‘오는군.’

끊임없이 진채의 벽을 넘으려 발악하는 적군의 목을 날려버리던 지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플로드 백작가의 정예 병력이 움직인다는 건 상대도 진심으로 덤벼온다는 뜻이다.

‘그렌 제너드도 움직이겠지.’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였다.

* * *

플로드 백작가의 정예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먼저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마법사들이었다.

플로드 백작가에서도 가려 뽑은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전장에 나선 그들은 마법이 닿는, 하지만 화살의 사거리에서는 벗어난 곳에 멈춰서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스으으윽!

콘로드 학파의 특성인 냉기가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을 보호하는 기사들조차 느껴지는 냉기에 살짝 몸을 떨 정도였다.

쩌저저저적!

허공에 작은 얼음 알갱이가 생겼다. 그것들은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뭉치며 덩치를 키워갔다. 계속해서 주입되는 냉기가 그것들의 성장을 도왔다.

쩌적!

순식간에 커다란 얼음 송곳들이 허공에 만들어졌다. 콘로드 학파의 마법사들이 지팡이로 전면을 가리켰다.

슈욱! 슈욱! 슈우우욱!

송곳들이 일제히 진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막대한 질량이 빠른 속도로 쏘아진 것이다. 그 파괴력이 얼마만 할지는 직접 맞아보지 않아도 얼추 짐작이 갔다.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었다지만 임시로 만든 진채의 나무 벽은 순식간에 박살 날 것이 분명했다. 스틸월 백작가의 병사들에 동요가 일었다.

하지만 그들의 동요는 얼마 가지 않았다.

화륵! 화르르르륵!

스틸월의 진채에서 커다란 불덩이들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모습에 가까이 있는 병사들이 움찔거렸다.

다행히도 그 불덩이의 목표는 진채 안에 있는 그들이 아니었다.

후웅! 후웅! 후웅!

불덩이들이 허공으로 쏘아졌다. 그것들은 진채의 벽을 향해 날아오던 얼음 송곳과 맞부딪쳤다.

콰아아앙!

허공에서 거센 불길이 춤을 추며 거대한 수증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아악!”

“끄아아악!”

마법이 충돌한 지점 아래에 있던 애꿎은 병사들이 뜨거운 증기를 뒤집어쓰고 비명을 질러댔다. 나름 충실한 장비를 가지고 있던 자라도 이번엔 여지없었다.

아마 전신 갑옷을 입고 있는 자가 있었다 해도 뜨거운 증기는 갑옷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여지없이 대상을 익혀버렸을 것이다.

수증기가 터진 곳은 진채 바깥이었기에 피해를 입은 자들은 전부 연합군의 병사들이었다.

퍼엉! 퍼엉! 퍼엉!

마법들이 몇 번씩 허공에서 부딪친다. 그때마다 뜨거운 증기가 병사들을 덮쳤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상대 마법사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흐음, 역시 어느 정도는 하는군.”

윌위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보이는 콘로드 학파의 마법사들을 살폈다. 옆에 있던 그의 제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마탑의 거대 세력이었던 학파가 아닙니까. 저번 반란 때 딱히 몰살시키려 한 것도 아니고. 실력이야 확실하겠죠. 게다가 숫자도 저쪽이 더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 대결에 자신이 없다고?”

제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웃었다.

“설마요. 그저 상대의 실력을 인정할 뿐입니다.”

“그런 흰소리나 할 거면 얼른 다른 녀석들이랑 같이 마법이나 날려라!”

제자의 엉덩이를 걷어차 앞으로 보낸 윌위스는 다시 콘로드 학파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원망하지 말도록 해라.”

화르르르르륵!

허공에 불덩이가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사람 머리통만 한 그것들은 순식간에 수를 불려 백여 개를 넘겼다.

콘로드 학파의 마법사들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윌위스가 가볍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떠 있던 불꽃들이 순차적으로 콘로드 학파의 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짓쳐들어왔다.

“막아!”

콘로드 학파의 마법사들이라고 놀고 있지는 않았다. 윌위스의 마법이 준비되는 걸 보고 부랴부랴 그들도 마법을 읊었다.

주먹만 한 얼음 공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아까와 같은 얼음 송곳이 준비되기도 했으며 얼음 벽이 높이 세워지기도 했다.

콘로드 학파가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얼음 마법들이 화염탄들과 마주쳤다.

퍼퍼퍼펑!

불덩이와 얼음 송곳이 맞부딪쳤던 때와 같이 막대한 증기가 발생했다. 콘로드 마법사들도 그걸 익히 예상하고 조금 떨어진 거리로부터 요격을 했기 때문에 마법사들의 피해는 없었다.

“끄아아악!”

“아악! 아아악!”

하지만 운이 없는 병사들은 증기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콘로드 마법사들의 요격으로 꽤 많은 수의 화염탄들이 요격당했지만 그래도 아직 적지 않은 수의 화염탄이 남아 있었다. 그것들을 마지막 남은 얼음 벽이 막아섰다.

콰콰콰쾅!

두터운 얼음 벽은 뚫리지 않고 기어이 화염탄을 막아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느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은 막아냈군.’

플로드 백작으로부터 마법사들의 호위를 명령받은 기사는 곧추세웠던 검을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흘끗 옆에 있는 마법사들을 훑어봤다.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이다. 얼굴에 흥건히 땀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고작 한 명의 마법을 막는데 이렇게까지 고생을 한다고.’

물론 그 한 명이 평범한 상대가 아니다. 기사는 방금 전, 마법사들을 이끄는 수장이 외친 말을 똑똑히 들었다.

‘분명 전대 마탑주의 공격이라고 했었지.’

마탑의 전대 마탑주가 적의 세력에 합류한 건 기사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마법 세력의 균형추가 적 쪽으로 확 쏠려버린 것도.

그러나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법이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느꼈다. 그들 편의 마법사들은 적 마법사들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걸.

‘…마법사들은 반드시 살려 돌아오라 그랬지.’

기사는 검을 부여잡고 있는 손에 꾸욱 힘을 줬다.

* * *

‘흠, 막혔군. 녀석들도 제법이야.’

나름 진심으로 쏘아낸 마법이 막히자 윌위스는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실망도 잠깐이었다. 애초에 이번 한 번으로 적들을 모두 쓰러뜨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윌위스의 마법이 모두 막히자 플루 학파의 마법사들이 다시 마법을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콘로드 학파의 마법사들도 다시 대응을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윌위스의 마법을 막느라 잠시 여력이 소진된 탓인지 아까처럼 제대로 된 요격이 나오지 않았다.

마법 몇 개가 요격되지 않고 콘로드 학파의 마법사들을 덮치려 할 때였다.

퍼엉! 퍼엉!

불덩이들이 허공에서 펑펑 터져나갔다. 콘로드 학파 마법사들의 짓은 아니었다.

‘호위 기사들이군.’

윌위스는 콘로드 학파 주변에 있는 이들이 검을 뽑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뽑아낸 검기가 불덩이들을 잘라 폭발시키고 있었다.

‘꽤나 실력이 있는 자들인데. 저런 자들의 호위를 받다니, 상당히 대우받고 있는 모양이야.’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마법을 대신 막아주기 시작하자 콘로드 학파의 마법사들도 여유를 되찾았다.

그들은 날아오는 마법들을 거의 기사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공격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번엔 반대로 플루 학파의 마법사들이 수세에 몰렸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윌위스가 다시 한번 마법을 구사하려 할 때였다.

슈욱!

작은 파공음 같은 것이 들리며 무언가가 윌위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컥!”

마법 하나를 베어낸 기사 한 명이 풀썩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적 진영에 동요가 일었다. 윌위스는 힐끔 자신의 뒤편을 바라봤다.

거기엔 화살통에서 새로운 화살을 꺼내고 있는 엘프 한 명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