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2화
병사들이 이리저리로 급하게 이동해 다니던 때도 지나가, 진채 안에 일던 소란은 적잖이 가라앉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조용해진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 그것도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 머무르는 곳인 이상 일정 이상의 소음은 어쩔 수 없었다.
단, 첼시가 배정된 천막은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천막의 규모도 크고 같이 사용하는 인원수도 적었으며 배치된 물건도 다른 곳보다 좋았다. 실질적으로 웬만한 지휘관들의 것보다 좋은 것이 그녀에게 배정된 천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카르위먼의 수많은 신관 중에서도 성녀 후보에까지 올라 간 그녀는 뛰어난 성법사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가장 흐린 전장이라는 특성상 그녀의 능력은 극도로 환영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좋은 대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그리 좋지 않았다.
‘괜찮겠지?’
아무리 다른 이들이 사용한 것보다 좋은 것이라 해도, 성녀 후보 시절에 사용한 푹신한 침대와는 차원이 다르게 열악한 침대는 엉덩이에 은은한 통증을 불러 왔다.
무척이나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에 들어차는 불안감이 짜증보다 훨씬 컸다.
‘이번에 실패하면 안 돼.’
대신관에 가장 가까운 신관이라는 우르원 루스가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이라는 명분으로 카르위먼을 그만 둔 것은 교단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 줬다.
밸리드의 준동이라는 커다란 사건과 맞물려 카르위먼은 중립을 선언한 이후로도 이번 전쟁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건 즉, 이번 전쟁은 기회라는 소리였다.
루스가 신관 자리를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첼시도 교단을 나왔다.
명분은 루스와 같았다. 그리고 속마음 또한 루스와 같았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내 지위는 한층 올라갈 거야.’
스틸월을 꺾고 그 안에서 밸리드의 흔적을 찾기만 한다면 아무리 교황의 명령에 중립을 지키던 카르위먼이라 하더라도 그녀를 도로 불러야만 할 것이다.
당연히 그녀를 보는 시선도 달라질 터.
‘루스 신관이라는 끈을 잡을 수도 있었어.’
둘 사이에 어떤 접점 같은 건 있지 않지만 루스 신관은 그녀의 일행인 그렌을 명예 성기사로서 추천해준 사람이다. 당연히 그렌의 동료인 그녀를 나쁘게 보지는 않을 터.
게다가 첼시는 루스의 뒤를 따라 교단에서 탈퇴한 후 플루드 백작가 소속으로 전장에 참여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미 전장에서 간단한 인사까지 한 상태였다.
만약 이번 일이 잘되어 루스 신관이 성공적으로 카르위먼에 복귀한다면 그는 대신관이 되기도 전에 엄청난 공적을 세우는 것이 된다.
대신관 자리는 이미 확정적이라고 교단을 나오기 전까지 평가를 받던 루스다. 그가 교황과 대립각을 세우면서까지 참가한 이 전쟁에 성공한다면, 그는 바로 차대 교황으로서의 입지를 쌓는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교단 내에서 내 입지도 커질 거야.’
차대 교황과 같이 카르위먼의 정의를 위해 지위까지 내버리고 카르나의 신실한 신도로서 밸리드의 준동을 막았다는, 생각만으로도 짜릿한 칭송이 주변에 내걸릴 것이다.
‘루벨라 그년도 성녀 자리를 내놓으려고 했다지?’
루스와는 다르게 첼시가 카르위먼을 그만둔 사실이 주변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물론 아무래도 루스와 첼시는 카르위먼의 직위나 지명도 등, 기본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루벨라의 성녀 사퇴 의사가 첼시의 탈단 사실을 묻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카르위먼을 그만둔다는 일생일대의 도박마저 루벨라에게 묻혀 화제가 되지 않다니. 정말로 루벨라라는 존재는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첼시의 퇴단은 별다른 잡음 없이 진행됐지만 루벨라는 교황마저 나서 끝끝내 붙잡았다는 사실이, 지금 그녀와 루벨라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해 더더욱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었다.
‘성녀를 그만두고 가담하려 한 곳이 스틸월 백작가라고 했어.’
그렇다면 이번에 플로드 백작가 연합이 승리해 스틸월에서 밸리드의 증거를 찾는다면 루벨라에게 타격을 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녀를 성녀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성녀에 오른다는 첼시의 소원도 더욱 가까워 질 터.
생각만으로도 기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기쁜 생각이 현실로 이뤄지려면 한 가지의 절대적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플로드 백작가 연합이 승리한다는 것.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첼시는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플로드 백작가와 그 연합 세력의 승리 가능성은 무척이나 높았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물론 아직까지 단순 병력 차이만으로는 플로드 백작가 연합 쪽이 월등히 우세하다. 그러나 돌아가는 분위기가 예전과 완전히 다른 것도 사실이었다.
첼시는 슬쩍 옆을 쳐다봤다. 빈 침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녀와 같은 천막을 사용하는 피나의 것이었다.
그녀는 이번에 상대편으로 전대 마탑주와 플루 학파의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소리를 듣고 눈빛이 변했다. 지금은 자신의 학파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승리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는 모양이었다.
‘눈이 반쯤 맛이 갔었지.’
하지만 첼시가 가장 우려하는 바에 의하면 피나의 몰두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윈드네 님.”
천막 밖에서 누군가 첼시를 불렀다. 아는 목소리다.
“들어오세요.”
천을 들추고 들어온 이는 윈스틴 다이너였다. 첼시가 성녀 후보였던 시절부터 그녀의 호위 기사로서 인연을 맺은 그는 이번에 루스, 첼시와 같은 길을 선택해 교단을 나왔다. 지금은 연합군의 기사 중 한 명으로서 복무 중이었다.
“어떻던가요?”
첼시의 목소리에 약간의 기대감이 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건 매정하게 고개를 젓는 윈스틴의 모습이었다.
“여전합니다.”
첼시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이자 뛰어난 실력, 많은 공적을 갖고 있는, 그들 파티의 리더인 그렌 제너드. 다 함께 명예를 얻자며 소리 높여 주장하던 그의 행동이 요즘 이상해졌다.
‘유라스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그랬지.’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건 들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사람이 변한단 말인가.
‘리더란 작자가 저래서야…!’
루벨라에게 성녀 자리를 빼앗기고 차선으로 택한 기회이니만큼, 리더로서 듬직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했다. 그러나 지금, 그렌은 뭔가에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지크란 인간에게 휘둘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루벨라와 인연이 깊은 지크에게 자신이 택한 그렌이 밀린다는 사실은 첼시의 또 다른 짜증을 불러 왔다. 성녀 후보 시절의 호위 기사부터 외부 협력자로 선택한 자까지. 루벨라보다 떨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혹시 이번 전쟁에서 뭔가 악영향을 끼칠 것 같은가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번 전쟁에 훨씬 더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었다.
첼시는 복잡한 감정을 일단 내리 눌렀다. 정세가 굉장히 불안정해지긴 했지만, 일단 병력은 이쪽이 훨씬 더 많다.
질로 따지자면 조금 불안정한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밀릴 정도도 아니다.
‘그래. 이기면 돼. 모든 건 이기면 되는 거야.’
이 승리로 카르위먼 내에서 다시 입지를 다진다면 지금처럼 소규모 파티를 짓고 바깥으로 나돌아다닐 필요도 없어진다.
성공적으로 카르위먼으로 돌아가 권위가 약해진 교황과 루벨라를 흔들어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되찾으면 끝나는 일이다.
첼시는 아집만 남은 마음을 틀어쥐며 승리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 * *
플로드 백작가 연합군이 진채를 만든 지 이틀. 스틸월 백작가는 여전히 방어만을 굳힌 채 진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격자인 연합군 쪽이 똑같이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연합군 진채의 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합군이 대열을 정리하며 어수선할 때도 스틸월 백작가 쪽은 조용했다.
그 모습에 플로드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한번 찔러볼 만도 하건만.’
대열을 이루기 전의 병력은 습격을 가하기 좋은 상대다. 때문에 혹 이번에 공격을 가하지 않을까 기대를 하던 플로드 백작은, 여전히 조용한 스틸월 백작가의 진영에 실망을 했다.
‘어쩔 수 없지. 결국 힘으로 짓누를 수밖에.’
피해가 커질 테지만, 그 정도는 이미 감수했다. 설령 휘하의 세력이 모조리 몰살당한다 하더라도 스틸월만 넘어설 수 있다면 플로드 백작은 기꺼이 하늘을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진격시켜라.”
플로드 백작의 명령이 떨어졌다. 옆에 있던 병사가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는 곧 전체로 퍼졌다.
쿵!
가장 앞서 있던 진열의 병사들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오는군.’
진채 위에 선 채 연합군을 쳐다보고 있던 지크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 태도는 전투를 앞둔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로웠다.
‘가장 앞에 세운 놈들은 역시 버림패들이군.’
이룬다고 이룬 대열도 어설프기 짝이 없고, 하고 있는 무장도 볼품없다. 행동에서도 철저히 미숙한 모습이 나오고 있다.
‘플로드 백작가의 병력은 아닐 테고. 용병이나 주변 영지의 잡병들이겠지.’
아무리 스틸월 백작가에 번번이 깨져나갔다 하더라도 플로드 백작가는 나름 정병을 가진 집단이다. 저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연합군은 천천히 진군해왔다. 아직 사거리가 되지 않아 스틸월 백작가 쪽에서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뿌우우우우우!
연합군 측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들렸다.
우와아아아아!
천천히 전진해오던 연합군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금껏 침묵했던 스틸월 백작가의 진영에서도 새까만 화살이 비처럼 쏘아졌다.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촤아악!
지크의 검이 나무 벽을 기어오르려던 병사 한 명을 베었다. 목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병사가 아래로 떨어졌다.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과 공포에 잠긴 눈초리가 보였지만 지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와 병사 한 명의 목숨에 감정을 갖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서걱!
다시 한번 피가 튀며 또 한 명의 병사가 떨어졌다. 묵묵히 병사들을 베어내며 지크는 주변을 살폈다.
여태까지는 평범한 전투의 모습이었다. 목책을 넘어 나무 벽에 매달린 적들을 활과 창으로 격퇴하는 스틸월의 병사들. 기사들의 거친 돌격도 마법사들의 화려한 마법도 없었다.
연합군은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고급 자원들을 아끼고 있었고 스틸월 백작가도 일반병들만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급 자원이라도 아끼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출격을 할 때가 진정한 전쟁의 시작일 것이다.
연합군은 3일간을 계속해서 스틸월 백작가의 진채를 두들겼다. 약한 곳을 찾기 위해 거의 모든 방향으로 공격을 해왔고 그 와중 많은 피해가 있었다.
하지만 병력의 우세는 여전히 연합군 쪽에 있었다.
그리고 3일이 지났을 때, 지금껏 보이지 않던 병사들이 나왔다.
정확한 진열을 가지고 충실한 무장을 한 병사들.
스틸월 진채에 대한 분석을 대강 끝낸 연합군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