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1화
바이너가 나간 후, 지휘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지크에게 쏠렸다. 지크가 바이너를 다루는 모습에 어떤 이는 감탄을, 어떤 이는 경악을 하고 있는 가운데, 백작이 입을 열었다.
“전령을 마음대로 내보냈구나.”
“어차피 항복 권유를 하러 온 놈인데 받아들일 생각이었습니까? 항복 권유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더라도 열 받아 거절하게 만들게끔 일부러 전령으로 배신자를 보낸 개같은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런 짓거리를 태연히 하는 게 네 할아버지지. 뭐, 네 말이 맞다. 항복할 의사 따윈 없으니 그 배신자 놈을 내보내든 말든 상관없지.”
실제로는 총지휘관인 백작의 의도도 묻지 않은 채 전령을 마음대로 돌려보내는 행위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백작은 지크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백작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이들도 뭐라 말을 하지 않았다. 상당한 불쾌감을 느낀 듯 얼굴을 찌푸린 사람도 있었지만 항의를 하는 자는 없었다.
“그래, 무슨 일로 온 게냐.”
아무래도 백작은 지크가 자신에게 뭔가 용건이 있어서 지휘부에 들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지크는 특별한 볼일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바이너 저 자식이 전령으로 오는 게 보이기에 골리려고 왔습니다만?”
“…그것뿐이냐?”
“네.”
“정말로 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렇다니까요.”
백작은 이마를 짚었다. 막 나가는 놈이 됐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대책 없는 놈이 되었을 줄이야. 지크가 바이너를 탈탈 털어대는 것에는 솔직히 굉장히 통쾌한 기분을 느꼈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지휘부 안으로 들어온 줄은 몰랐다.
백작은 슬쩍 한스를 봤다. 그도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놀란 낌새는 없었다.
‘즉, 지크의 저런 모습에 익숙하다는 뜻이겠지.’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크와 완전히 갈라서고 난 뒤 처음으로, 그를 방치만 하지 말고 어느 정도 가정 교육을 시켰어야 하는 게 아닌가 후회가 될 정도였다.
“됐다. 어차피 알릴 것도 있었으니, 이왕 온 김에 그거나 듣고 가거라.”
“뭔가 따로 정해진 게 있습니까? 현재의 위치에서 방어를 위주로 전략을 짠다고 들었습니다만.”
“물론 방어 위주로 움직일 거다. 하지만 방어적인 전략을 취한다고 해서 한곳에 처박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 방어가 유리하긴 해도 전장의 주도권을 적에게 빼앗긴다는 약점이 생기는 것이니까. 약점은 최대한 지워야지.”
“그럼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아무리 백작을 총지휘관으로서 인정을 한다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명령이라면 거절할 의욕이 만만한 지크였다.
“저들을 철저하게 괴롭혀야지.”
“방법을 알려주시죠.”
물론 마음에 드는 방법이라면 얌전히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 *
침공군의 진영. 연합군의 형태를 띤 군세였지만 그 주력이 플로드 백작가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플로드 백작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지어진 자신의 지휘부 안에서 바이너와 마주하고 있었다.
“항복 권유는 거절했다고?”
“스틸월 백작이 직접적으로 거절하진 않았지만 절 쫓아내는 지크를 막지 않은 걸로 봐서는 항복 의사가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플로드 백작은 바이너를 쳐다봤다.
배신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백작의 명령에도 군말 없이 항복의 사절로서 스틸월 백작가의 진영으로 향한 그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바이너의 태도는 뭔가 이상했다. 그를 향한 공손한 태도는 여전했지만 어딘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다.
‘그렌 제너드와 비슷하군.’
유라스에서 카르위먼을 끌어들이는 계획을 말아먹은 놈들끼리 이제는 행동마저 비슷하다.
하지만 그렌 때와는 다르게 백작은 바이너에게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바이너는 그다지 중요한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중요한 임무를 맡길 생각도 없으니,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전장에서 알아서 죽어 나가겠지.’
“수고했네. 이만 나가보게.”
“네!”
바이너가 나간 후 백작은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 두고 앞으로의 전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그의 생각은 방해받았다.
“백작님! 피네 자작께서 오셨습니다!”
“모셔라!”
플로드 백작은 바로 병사에게 외쳤다.
입구에서 머리가 반쯤 벗겨진 땅딸막한 남성 한 명이 들어 왔다.
피네 자작이었다.
그는 볼품없는 외모에 성격도 그리 좋지 못했다. 게다가 피네 자작가는 플로드 백작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세력이 약했다. 나라마저 달라 원래라면 플로드 백작의 기억 한편에조차 머무를 수 없는 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플로드 백작가가 스틸월 백작가를 공격할 때, 옆 나라의 침공군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중요한 협력자였다.
“어쩐 일이오, 피네 자작.”
솔직히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은 부류는 아니었지만 플로드 백작은 미소 띤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전쟁에 대해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상의라. 웬만한 것은 이야기가 모두 끝난 것으로 알고 있소만.”
“그건 상황이 변하기 전의 이야기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 플로드 백작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틸월 백작가에 모여들고 있는 지원군을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보무도 당당하게 스틸월 백작가에 선전포고를 한 것과는 다르게, 지금 연합군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태였다. 스틸월에 대한 지원군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연합군이 그렇게 당황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여론이 스틸월 백작가에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껏 쌓아온 역사가 있는 이상, 스틸월 백작가에 대한 지원군이 어느 정도는 있을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지원군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루즈 후작가나 윈플 후작가의 지원은 뭐, 그렇다고 칩시다. 스틸월과 그리 친하지도 않은 데다가 왕국의 고위 귀족인 두 가문이 바로 스틸월 백작가를 돕겠다고 나선 게 속이 쓰리긴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니까요.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용병단이긴 하지만 그래도 용병. 스틸월 백작가가 많은 돈으로 고용했을 수도 있죠.”
거기까지는 그래도 상식선으로 이해가 가는 지원군이었다. 물론 그 정도도 예상보다 많은 지원군이긴 했지만.
그러나 다음 지원군들은 얘기가 달랐다.
“한데 마탑의 마법사들과 엘프들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플로드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온 이야기는 플로드 백작도 듣고서는 어처구니없어했던 이야기였다.
“스누위크의 전대 마탑주와 그 제자들이 스틸월 백작가에 합류를 했답니다! 스누위크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마법사들입니다! 전쟁에서 마법사들이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백작님도 아실 겁니다.”
“마법사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스누위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겨우 살아남은 학파의 찌그레기들이지만 말이죠.”
플로드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두 세력이 보유하고 있는 마법사의 전력은 극명하게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하물며 엘프라니요! 아니, 엘프가 인간의 전쟁엔 왜 끼어든단 말입니까!”
엘프. 그들이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직접 본 사람 또한 극히 드물다. 그 정도로 인간 사회와 거리를 두는 엘프들이 갑자기 적으로서 등장을 하다니. 연합군이 혼란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프란 존재가 그냥 신기하기만 한 존재라면 상관없습니다만, 그들은 절대 신기하기만 한 종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보다 더 높은 육체 능력과 수명으로 인해 그들은 순수 무술만으로도 인간을 곧잘 압도한다. 특히 엘프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무기인 활은 거의 신기에 가까운 수준. 게다가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강력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런 종족이 무더기로 적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크로뇽 왕국의 다른 귀족들이 스틸월 백작을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도 들었소.”
돌아가는 분위기 때문에 스틸월 백작가를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던 크로뇽 왕국의 귀족들이지만, 스틸월 백작가에 지원군이 모이는 것을 보고 조금씩 지원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전대 마탑주와 엘프가 스틸월 백작가의 편을 든다는 소식이 결정적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끈다면 아마 크로뇽 왕국의 다른 귀족들이 스틸월 백작가에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병력의 우세도 사라지겠죠.”
그렇다면 연합군은 철저하게 불리해진다. 지금 있는 곳은 적의 영토인 데다가 병력의 질도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상대는 강병으로 이름 높은 스틸월 백작가인 것이다.
거기에 유일하게 압도하고 있는 병력의 양조차 곧 동등해진다니.
당연히 피네 자작가는 초조해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상황으로 패한다고 해도 플로드 백작가를 위시한 연합군의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피네 자작은 크로뇽 왕국에 소속된 귀족인 것이다. 스틸월 백작이 그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다른 귀족들이 스틸월 백작가에 보낼 지원군을 본격적으로 꾸리기 전에 적을 박살 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대대로 스틸월 백작가와 싸워온 백작님이 더욱 잘 아시겠지요.”
시간도 연합군의 편이 아니다. 피네 자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출진을 할 때만 해도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는데 어찌 이리됐는지….”
그 점에서는 플로드 백작도 동의하는 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스틸월 백작가를 꺾을 수 있을 거라는 단꿈에 젖어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이 불리한 위치에 서 있게 된 것이다.
피네 자작이 흘끔 플로드 백작을 쳐다봤다.
“소문에 따르면 스틸월 백작가에 지원을 온 세력은 대부분 스틸월 백작의 첫째 아들인 지크 공자의 수완이라고 합니다. 분명 백작님의 손자였지요.”
지크. 또다시 그 이름이 나왔다. 무능하기 짝이 없다 생각한 손자 놈. 한데 그 손자가 차근차근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저 피가 이어졌을 뿐이오. 손자와 할애비의 관계 같은 사적인 감정은 없소이다.”
자작도 딱히 그 점을 필요 이상으로 언급할 생각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쨌든 지금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건 저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십시오. 조금 있다가 열릴 전체 회의에서 다른 이들도 저와 똑같은 말을 할 겁니다.”
“잘 알아들었소.”
귀찮기 그지없었지만 백작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작의 의견을 무척 중요하게 받아들였다는 듯 표정을 진중한 표정을 했다.
“자작의 걱정은 분명 일리가 있소. 하지만 우리 군대도 좋은 인재가 많소. 자작이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거요.”
“…믿겠습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자작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지휘부를 나갔다.
플로드 백작은 도로 의자에 앉아 지도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아까완 달리 그다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백작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천막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