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00화 (500/628)

제500화

“들여보내!”

백작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지크가 입구의 천을 들치며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천막 안을 울린다. 바이너 때문에 무겁기 짝이 없는 천막 안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물론 지크가 천막 안의 분위기를 모르는 건 아니다. 알아도 무시하고 있을 뿐.

“아, 안녕하십니까.”

그에 비해 한스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눈치를 보는 인간이었다. 지크의 뒤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 온 한스가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쭈뼛쭈뼛 주변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백작과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적의 전령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스치듯 그를 확인하던 한스의 눈이 커졌다.

처음엔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에 한스는 그 사람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 정체를 알아챘다.

“어? 바이너 기사님?”

한스와 인연이 있는 자다. 자그마치 지크가 회귀한 직후였던 때 힘을 합쳐 지크와 맞섰던 사이가 아닌가.

물론 바이너가 결투에서 지크에 박살 나는 바람에 한스가 지크에게 끌려가는 원인이 됐지만.

하지만 한스는 바이너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는 설명이 맞을 것이다. 지크를 따라 여행을 하며 온갖 훈련에 여러 사건들을 겪던 한스가 바이너를 계속 의식하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바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바이너도 한스를 알아봤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스와 다르게 바이너는 한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몰락의 시초가 된 사건이 그로부터 촉발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크를 무시하며 폭력을 휘두르려 했던 것은 바이너 그 자신이었지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자였으면 애초에 백작가를 배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이너는 한스의 반가운 눈초리를 외면했다. 자신을 반기는 것 같지 않자 한스도 머쓱하게 물러섰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백작이 지크를 향해 물었다.

현재 백작은 지크를 무시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그레이그의 치료 때문에 그랬다면, 지금은 백작가를 지원해주는 지원군 때문이었다.

지원군 대부분이 지크를 보고 가담한 상태에서 감히 지크에게 함부로 대할 정도로 백작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전령을 맞이하는 와중에도 지크의 입장을 흔쾌히 허락한 건 그 때문이었다.

“전령으로 오는 인간이 기억에 남은 자라서 말입니다.”

지크는 바이너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은 저 녀석과 인연이 있으셨죠.”

미헨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령?”

지크의 뒤에서 조용히 얘기를 듣던 한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전령이라면 분명 적이 보내온 사람일 터. 그런데 어째서 스틸월의 기사인 바이너가 전령이란 말인가.

지크는 한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이 녀석, 배신했거든. 지금은 플로드 백작가의 충실한 개다.”

한스가 놀란 눈으로 바이너를 쳐다봤다.

“…말하는 투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같다만.”

백작이 지크를 향해 미심쩍은 듯 말했다. 지크는 당당하게 말했다.

“알았죠. 이번에 유라스에서 만났었으니까요. 스틸월 백작가가 밸리드의 주구라고 내부 고발을 한 인간이 이 작자였습니다.”

“뭐!”

지금껏 서늘한 눈으로 바이너를 노려보던 백작의 눈이 처음으로 커졌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분노가 바이너를 향해 쏟아졌다.

“이, 이 새끼가…!”

백작의 눈초리를 받고 검을 집어넣었던 강철창 기사단 단장이 다시 한번 검을 뽑아 들었다. 백작도 이번에는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지금 지크가 말한 행위는 단순한 배신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놀란 건 백작과 그 일행들만이 아니었다. 바이너도 놀란 눈초리로 지크를 쳐다봤다.

“말을 하지 않았었나?”

“내가 왜 너 같은 놈에 대한 일을 하나하나 보고를 해야 하냐?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너는 그 정도로 가치 있는 놈이 아냐. 내부 고발이 실패했을 때 이미 효용성이 끝장난 놈일 뿐이지. 물론 네가 실력 있는 기사라면야 당연히 위협으로 판단하고 대책을 마련했겠지만.”

지크는 대놓고 바이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마치 더러운 물건을 평가하는 듯한 그 행동은 한스마저 일순 불쾌감이 치솟아오를 정도로 얄미운 것이었다. 하물며 그 시선이 꽂히는 바이너는 어떻겠는가.

울컥거리는 불쾌감을 바이너가 필사적으로 내리누를 때, 지크는 툭 하니 말했다.

“네깟 실력으로 뭔 놈의 위협이 되겠냐. 네놈의 존재에 대해 입을 터느니 차라리 빵 한 덩이를 더 먹고 말지.”

철저하게 무시하는 말투. 바이너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당장 달려들지 않은 이유는 지크와의 실력 차도 실력 차지만 여기가 스틸월 백작가의 진영 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설마 네가 전령으로 올지는 몰랐다. 나도 낯짝이 두껍다는 말은 무척 많이 들었지만 배신을 한 옛 주군을 상대로 그런 뻔뻔한 짓은 못할 것 같은데. 축하해. 네가 드디어 나한테 이기는구나.”

한쪽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는 지크지만, 그걸 정말로 칭찬으로 여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설마 스틸월 백작가를 밸리드의 주구로 몰아 카르위먼을 끌어들이려 한 계획이 실패해서 이런 일을 손수 맡은 거야? 아하하, 배신자로서 살아가는 게 힘들긴 하지. 열심히 새 주인의 엉덩이를 핥아야 그나마 한자리 차지해 먹을 수 있으니까. 이해해. 나는 온갖 삶의 방식을 긍정하니까. 물론 나는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뒤지겠지만.”

지크는 손날로 자신의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사자처럼 살다 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시궁쥐 같은 인생을 보내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지. 나는 너를 응원하마. 아마 세상 사람들이 전부 네 시궁쥐 같은 인생을 매도하고 조롱하고 경멸하겠지만 그에 굴하지 말고 꿋꿋이 살도록 해! 그럴 때마다 내 얼굴을 떠올리고 힘을 내면서 말이야!”

바이너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주먹을 너무나 꽉 움켜쥐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 것이다.

백작과 단장들은 어느새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강철창 기사단 단장이 더욱 그랬다.

배신자가 두들겨 맞는 꼴이 무척이나 재미있는 것이었다.

“…네놈만 아니었으면….”

“뭐?”

지크가 귀에 손을 대고 보란 듯 바이너 쪽으로 향했다.

“네놈과의 결투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몰락하지 않았다!”

바이너가 외쳤다. 그건 비통한 절규로도 들렸다. 지금껏 그가 느낀 절망과 고통이 목소리에 절절히 배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크에게 통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시비를 건 것도 너,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빠져나가려 한 것도 너, 결투를 흔쾌히 수락한 것도 너, 그리고 쥐어터진 것도 너. 전부 네 탓인 것을 책임을 전가하려 하면 쓰나.”

분노도 증오도 보이지 않는다. 지크의 태도는 딱, 딱한 아이를 보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래놓고 내가 스틸월 백작가에 협력한다는 이유로 자기 주군마저 팔아먹으려 한 쓰레기가 바로 너잖아.”

“그건 저자도 책임이 있다!”

바이너는 스틸월 백작을 손가락질했다. 이미 거기에는 주군에 대한 공경 같은 것은 일말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저 작자가 책임이 없다는 소리를 하진 않아. 하지만 저 작자의 나에 대한 대우는 기본적으로 방임이었지 괴롭히라고 부하들을 다그치진 않았어. 즉, 나에 대한 행동은 전적으로 네 책임이란 거다.”

그러며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더 이상 남 탓은 그만두는 게 어때. 너처럼 나한테 두들겨 맞은 그레이그도 내가 싫다고 가문을 팔아먹진 않았어. 주변에 민폐를 끼친 모양이지만 술 먹고 술주정 부린 게 다지. 그리고 지금은 그때의 공포에서 많이 벗어났고.”

그리고 지크는 옆에 있던 한스의 어깨를 짚었다.

“네가 패배함으로 인해 나한테 끌려간 한스도 지금 어느 지역에서는 용사 취급을 받고 있을 정도야. 그런데 당시 나한테 당한 세 명 중 가장 기대받고 있던 넌 지금 어떻지? 혼자서 뒤처진 기분은 어때? 남들이 달릴 때 땅바닥에 엉덩이 대고 푹 쉬고 있었으니 편했지? 그러니 그딴 쓸데없는 짓을 할 생각이 들었겠지.”

지크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핏발이 곤두선 바이너의 눈이 가까이 보인다.

“항복을 권유하러 왔을 텐데 지금 여기서 항복을 입에 담을 인간은 없어. 그러니 이제 돌아가서 네 새로운 주인한테 꼬리나 흔들어라. 열심히 해야지? 그래야 먹다 남은 뼈다귀라도 몇 개 건질 테니까.”

그리고 지크는 세 걸음 옆으로 물렀다. 손을 입구 쪽으로 쭉 뻗었다.

“보다시피 출구는 저쪽이다. 다음엔 전장에서 보자고.”

“…….”

천막의 출구를 보다가 바이너는 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바짝 마른 대지 사이로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바이너의 입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장에서 만나면 기필코 죽인다!”

“오오, 그것참 멋있는 맹세야. 내가 많이 들어봐서 알지. 물론 나한테 그딴 말을 한 놈들 중 살아 있는 놈들은 없지만.”

싱글벙글 웃는 낯이 얄밉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나는 이미 예약이 된 몸이거든. 이놈의 인기는 정말 식을 줄을 모른다니까. 인기인의 숙명은 정말로 고달프기 그지없어.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하자.”

지크는 손가락을 들어 한스를 가리켰다. 갑자기 지목된 한스가 움찔 놀랐다.

“일단 한스를 쓰러뜨려 봐. 너 정도 급의 놈에게 갑자기 도전권을 주긴 좀 그렇거든. 원래 이런 건 먼저 부하들을 쓰러뜨린 후에 도전해야 제맛인 법이지. 저래 봬도 한스는 내 1제자거든. 띨빵한 면이 있긴 해도 실력은 괜찮아. 한스를 쓰러뜨리면 내가 데이트를 미뤄서라도 너를 상대해주지.”

바이너가 한스를 쳐다봤다. 한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이너는 다시 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증오와 살의가 뒤섞인 눈초리가 지크를 노린다.

펄럭!

바이너는 입구를 덮은 천을 신경질적으로 걷어내고 지휘부를 나갔다.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진 않지?”

“아마도요.”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지크의 저, 듣는 사람이 약이 올라 화병으로 죽어버릴 것 같은 언변은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자칫하다가는 나도 저 꼴이 되었으려나?’

지크를 무시하다 끌려갔던 한스인 만큼 바이너가 남 같지 않았다.

‘마님한테 감사드려야 할지도….’

지크가 자신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린 이유가, 지크의 생모인 사라가 자신을 괴롭혔던 것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란 걸 어느 정도는 아는 한스다.

사라 스틸월이란 존재는 여전히 끔찍하기 짝이 없지만, 그 덕에 바이너 같은 꼴을 당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샘솟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크의 저 공격이 자신을 향할 일은 없다는 것에 한스는 기뻐하기로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