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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99화 (499/628)

제499화

지크가 자신을 바라보자 루벨라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저는 물론이고 교황님도 경악해서 바로 루벨라 님을 뜯어말렸습니다. 한데, 평소에 그다지 고집을 부리지 않던 분이 이 건에 한해서는 무척이나 단호하시더군요. 겨우겨우 스틸월 백작가에 파견하는 신관들을 루벨라 님과 저로 교체하는 걸로 합의를 보게 된 겁니다.”

“루스의 말이 걸렸을 뿐이에요.”

마치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루벨라가 말했다.

“신관을 그만두기 전, 그자가 한 말이 있거든요.”

“분명 ‘아무리 교황께서 명령하신 일이라도 나의 종교적 신념은 밸리드가 관련된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설령 나의 지위와 미래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위대한 카르위먼과 세상을 위해서 행동하려 한다’였던가요. 세세한 건 다를지 몰라도 대충 그런 말이었을 겁니다.”

와이그의 설명에 지크는 혀를 차며 야유했다.

“배신자 놈 주제에 눈물겹군요.”

“하지만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자가 배신자라는 지크 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저도 그 작자의 말에 감동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인지 루벨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자의 말을 듣고 저도 생각했어요. 밸리드가 카르위먼 내부에 심어둔 배신자들과 귀족들까지 끌어들여 진행하는 거대한 계획이 존재함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이 정말 카르나 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일인가. 오히려 말만은 루스가 옳은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원래 그런 배신자들이 하는 말은 의외로 그럴듯한 걸 넘어 올바르기까지 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쉽게 선동할 수 있으니까요. 거기서 의도를 곡해하거나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일 뿐이죠.”

그렇게 말한 지크는 장난스럽게 루벨라를 타박했다.

“한데 루벨라 님의 말씀은 저를 믿지 못한다는 것 아닙니까? 제가 이번 전쟁에 패배해 놈들을 막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요.”

“네, 네? 절대 그렇지 않아요!”

루벨라가 화들짝 놀라 외치듯 말했다. 하지만 지크는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렇지 않다고 본인은 생각할지 몰라도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수도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와이그 님?”

“루벨라 님을 오랜 시간 모신 자로서, 지크 님의 말씀이 무척이나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프군요.”

“와이그 님!”

한층 더 높아진 루벨라의 목소리에 와이그는 껄껄 웃었다. 지크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루벨라의 얼굴에 감도는 붉은 기는 더욱 짙어졌다.

“어쨌든, 두 분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백작가에는 제가 말해 놓죠. 그치들도 두 분의 합류를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거부하진 못할 겁니다. 두 분은 느긋하게 스틸월 병력과 함께 움직여 전쟁을 살펴보세요.”

지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두 분의 걱정이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걸 확실히 보여드리죠.”

* * *

스틸월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플로드 백작가를 위시한 적군이 크로뇽 왕국의 국경 너머 피네 자작령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은 아직 스틸월 백작령의 경계는 넘지 않았다.

첩보원을 사용해 그 소식을 접한 스틸월 백작은 병력 이동을 그리 서두르지 않았다. 전투 장소에 먼저 도착해 진영을 세울 시간은 넉넉한 것이다. 오히려 괜히 서두르다 그게 병력이든 물자든 비전투손실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백작은 방심하진 않았다. 끊임없이 영지 경계에 사람을 보내 적의 출현을 확인하며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스틸월의 병력이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진영을 완전히 구축할 때까지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군이 진영을 완전히 세운 후 이틀이 지난 후였다.

“많군요.”

우글우글 모인 적들을 보며 한스가 중얼거렸다.

“단순 숫자만 따지면 우리의 세 배는 된다더군.”

“그 정도면 거의 승부가 결정됐다고 봐도 되지 않습니까?”

“상대가 극히 유리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

지크는 흘끗 한스를 쳐다봤다.

“왜, 겁나냐?”

“상대의 숫자를 보고 긴장이 됐던 건 인정합니다만, 생각을 바꾸니 괜찮더군요.”

“뭘 어떤 식으로 바꿨기에?”

“그냥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습니다. 스틸월 백작가의 편으로서 세 배의 숫자를 상대하는 게 더 나을까, 아니면 적으로서 지크 님을 상대하는 게 더 나을까.”

“결과는?”

“당연히 전자가 압도적이지 않겠습니까.”

한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전자가 나은 걸 떠나서 만약 후자의 입장에 내가 서 있으면 어떨까 생각을 했더니 바로 등이 땀으로 젖더군요. 그래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입장은 전자라고 되뇌었더니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재미있는 긴장 해소법이로군.”

“참고로 스녹에게도 같은 방법을 가르쳐 줬습니다. 꽤 긴장하는 눈치더니, 제가 방법을 가르쳐 주자마자 바로 긴장을 풀더군요. 아쉽게도 엘레나는 저나 스녹처럼 극단적으로 효과가 있진 않았고 라라 씨는 효과가 거의 없었지만 말이죠.”

“그 둘은 너희만큼 오래된 사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커다란 전력인 그들의 긴장감이 풀렸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첫 전투는 언제일까요. 적들이 진영을 세우기 전에 들이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것도 나름 방법이지. 하지만 자칫하다간 역으로 상대의 병력에 포위당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어쨌거나 병력은 저쪽이 세 배는 더 많으니까.”

“그래도 지크 님이나 저희가 힘을 보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아버지는 철저하게 방어에 주력할 모양이야. 나쁜 전략은 아니지. 어쨌든 침략자들은 저들이니까. 우리는 이 장소에서 저들을 막아내면 바로 승리지만 저들은 이곳에 있는 군세를 격파하고 더 진군을 해야 해. 공격보다 방어가 더 유리한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시일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리해지는 건 이쪽이다. 굳이 무리하게 공격을 가해야 할 필요는 없어. 실패할 확률도 높고, 성공해도 희생이 커지니 말이다.”

“지크 님이 희생에 부정적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크를 존경하는 한스지만 그렇다고 지크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나야 당연히 남의 희생 따위에는 관심이 없지. 하지만 쓸데없는 희생을 싫어하는 놈이 있어서 말이야.”

“라일라 님 말이군요.”

“지금도 지하에서 마음에 안 드는 동거인과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는 녀석이다. 그 정도 소망쯤은 들어 줘야지.”

아마 옆에 라일라가 있었다면 무척이나 기뻐했을 거라고 한스는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딱히 이 군대를 지휘하겠다는 욕심도 없으니. 일단 명령은 따라 줄 생각이다.”

스틸월 백작이 무능하다면 당연히 생각을 달리 했겠지만 그는 왕국 내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지휘관이다. 적어도 지크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지휘권을 강탈할 필요는 없었다.

‘이 이상 볼 건 없나.’

서로 간에 경계를 하고는 있지만 두 집단이 맞붙을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지크는 몸을 돌렸다.

“넌 계속 볼 생각이냐?”

“네. 이거 제법 재미가 있네요.”

한스는 적이 진영을 짓는 모습에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그래. 그러면 나는 먼저 돌아가마.”

“알겠습니다.”

지크가 발길을 떼려던 때였다.

‘응?’

적 진영에서 말을 탄 사람 몇 명이 튀어나왔다.

‘전령이로군. 항복을 권유하려는 건가?’

하지만 아마 전령을 보내는 플로드 백작도 스틸월 백작이 항복을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행위.

흥미를 잃고 눈을 돌리려던 지크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저 녀석은?’

맨 앞에서 아군 진영으로 오고 있는 전령이 무척 눈에 익었다.

“어이, 한스.”

“네, 지크 님.”

“잠시 따라와라.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으니까.”

지크는 한스를 끌고 지휘부가 있는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스틸월 백작의 천막은 다른 곳보다 한층 더 컸다. 천막 위로는 그곳이 지휘부임을 알리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주변은 다른 곳보다 더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지휘부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스틸월 백작은 당연하고 강철검 기사단의 단장 미헨 타이너를 필두로, 백작가 휘하 기사단의 단장들과 부단장들도 있었다.

그들은 적의 동태를 수시로 보고받으면서 전략을 짜고 있었다. 적이 전령을 보내왔다는 보고를 받은 건 그때였다.

대충 적이 어떤 제안을 할지 예상은 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답도 정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전령을 보지도 않고 돌려보낼 순 없었다. 따라서 백작은 전령을 들였다.

하지만 전령의 정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그다지 안녕하진 못하지. 어쭙잖은 명분으로 침략을 해 온 어떤 놈들 때문에 말이야. 게다가 지금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어.”

백작의 험상궂은 얼굴이 뱀처럼 꿈틀댔다.

“자네는 분명 할튼 바이너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바이너는 백작의 분노 섞인 눈초리에도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분명 자네는 우리 강철창 기사단의 단원인 걸로 알고 있다만.”

백작은 힐끗 옆에 앉아 있는 강철창 기사단의 단장을 쳐다봤다. 그는 죽일 듯한 눈초리로 바이너를 쏘아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의 부하가 배신을 한 상황이다.

그가 분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는 지금 플로드 백작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 배신을 했다는 소리군.”

“옳은 길을 찾아갔다고 말씀해주시죠.”

쾅!

“개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강철창 기사단의 단장은 결국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바이너는 여전히 담담했다.

자신이 전령으로 왔을 때 이런 상황이 될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메마른 입술을 살짝 핥은 뒤, 오로지 백작에게만 시선을 뒀다.

“플로드 백작께서 항복을 권하셨습니다. 밸리드를 추종하는 그릇된 길을 버리고 모든 죄를 뉘우친다면 나쁘게 다루지는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강철창 기사단 단장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 같았다. 바이너는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게 스틸월 백작가가 전령을 대하는 예의입니까?”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바이너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도 필사적이었다. 이미 그는 플로드 백작가로 돌아선 몸. 스틸월 백작가를 카르위먼에 팔아먹는다는 계획이 실패한 이상, 어떤 식으로든 공을 세워야 했다.

챙!

결국 강철창 기사단 단장이 검을 빼 들었다. 당장이라도 바이너를 벨 것 같았다.

하지만 백작이 그를 막아섰다.

“그만!”

백작의 노호성에 강철창 기사단 단장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건가.”

누구에게 무엇을 질문한 건지 모를 백작의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한 질문이란 걸 바로 이해한 강철창 기사단 단장이 대답했다.

“얼마 전 갑자기 소식이 끊긴 녀석입니다. 전쟁이 무서워 도망친 줄 알고 기사단에서 제적을 시켰습니다. 예전에 있던 결투 이후에 문제가 많은 녀석이었던 터라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은 점은 죄송합니다. 이번 전쟁이 끝난 후 분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렇군.”

백작이 싸늘한 눈으로 바이너를 뜯어 볼 때였다.

“백작님!”

바깥에서 병사가 백작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미헨이 대신 대답을 했다.

“지크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백작을 포함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천막 입구로 쏠렸다. 바이너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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