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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98화 (498/628)

제498화

“그렇구나.”

하지만 라일라는 지크처럼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이제야 그렌 제너드 그놈을 족칠 수 있게 됐는데.”

“하지만 전쟁이잖아. 거기서 흐를 피를 생각하면 좋아할 순 없지.”

“그러고 보니 그게 일반적인 감성이던가.”

하지만 서로의 반응은 거기서 끝이었다. 지크가 라일라를 연약하다고 무시하지도, 라일라가 지크를 잔인하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이미 둘 사이에서 상대의 성향은 그저 받아들이고 넘어갈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이해할 필요도 납득할 필요도 없다.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출진은 언제야?”

“이틀 뒤.”

“준비는 모두 끝난 모양이네.”

“끝난 지는 오래됐지. 이번 전쟁이 우기가 끝나자마자 터질 거라는 사실은 빈민가에 어슬렁거리는 개새끼까지도 알고 있었을걸. 이번 이틀도 미리 짜놓은 병력 편성을 구체화하기 위한 시간에 불과해.”

“전장은 어디야?”

“피네 자작가와의 영지 경계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초원 지대가 있다. 거기서 적을 맞을 모양이야.”

“요격에 나선다는 뜻이네? 난 성에 틀어박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수성이 방어에 극히 좋긴 하지만, 영지 내에 적군을 허용한다는 뜻도 되니 영지가 황폐해질 수밖에 없잖냐. 요격할 수 있으면 요격하는 게 좋지. 뭐, 전쟁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기본적으로 수성을 위주로 전략을 짜긴 한 모양이더군.”

그렌의 수작질로 인해 스틸월 백작가와 적의 예상 전력 차이가 극명히 날 때였으니 스틸월 백작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네 덕에 요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나 다름없네.”

“그렇지.”

스틸월 백작가를 돕겠다고 나선 세력이 전부 지크와 관련된 사람들이니 반론할 것도 없었다.

“승산은 어때?”

라일라의 질문에 지크가 우습다는 듯 대답했다.

“이번 전쟁은 승산 운운할 만한 게 아냐. 어떻게 해야 그렌 제너드를 훌륭히 괴롭힐 수 있느냐의 문제지.”

“질 생각이 아예 없구나?”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이지만 상대는 그 지크다. 오히려 라일라는 저 태도에 알 수 없는 안심감마저 들 정도였다.

“넌 어떻게 할 거지? 참가할 거냐?”

지크가 전쟁을 앞두고 라일라를 찾아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윌위스 드웨인이라는 최고 수준의 마법사를 비롯해 많은 마법사들이 합류한 상태지만, 전쟁에서 마법사란 존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게다가 라일라의 실력은 보통 마법사라고 할 수준을 월등히 넘어선 상태. 당연히 그녀가 전쟁에 참여한다면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빠질게.”

“그래? 알았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빠르네. 이유는 안 물어 봐?”

“말할 수 있는 거면 네가 말해주겠지.”

지크의 신뢰가 기분이 좋은 것일까. 라일라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르피나 때문이야.”

지크는 진지하게 라일라의 말을 경청했다.

“그 녀석이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잖아.”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어. 그러지 않으면 그렇게 얌전하게 가르침만 줄 녀석이 아니야.”

“그렇다면 이미 녀석이 뭔가 수작을 부려놨을 수도 있어. 나도 최대한 감시를 했지만, 아무래도 유적의 시스템에 대해선 녀석에게 밀리는 게 사실이니까.”

“녀석의 꿍꿍이를 알아냈을 때 바로 대응을 하기 위해서라는 거군.”

“네가 말해줬잖아. 세르피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날 믿겠다고. 네 믿음을 배신할 수는 없지.”

“그래.”

지크는 라일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녀석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너한테 맡기마.”

“걱정 마. 오히려 나보다는 네가 더 걱정이지. 네 능력이야 익히 알고 있고 네가 질 거라고도 생각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상대는 그 그렌 제너드야. 녀석의 실력이 굉장히 상승한 것 같다고 하기도 했잖아.”

“그거야말로 걱정 마라.”

지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놈이 정말로 내가 생각한 그대로의 놈이라면, 녀석은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으니까.”

“생각한 그대로의 놈이라는 게 어떤 의미야?”

“찌질한 놈이라는 의미.”

“아, 그렇구나.”

라일라가 웃음 지었다.

“그렇다면 역시 네가 질 일은 없겠네. 그 녀석만큼 찌질한 놈도 없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그 찌질이 놈을 생각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 * *

지크가 라일라와 만나고 유적에서 나왔을 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또 뵙네요, 지크님.”

여느 때와 같이 정갈한 성녀의 복장을 한 채 루벨라가 인사를 해왔다. 그녀의 옆에는 여전히 와이그가 호위로서 붙어 있었다.

“두 분께서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어머, 저희가 못 올 곳을 왔나요? 불과 얼마 전에도 찾아왔었잖아요?”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카르위먼이 이번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한 이상, 두 사람이 스틸월 백작가에 머무는 것은 카르위먼에 중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루벨라와 와이그 개인에게도 결코 좋은 사안이 아니다.

루벨라가 슬쩍 와이그를 쳐다봤다.

“주변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요.”

확인을 받은 루벨라가 지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르원 루스 신관을 기억하시죠?”

“제가 대놓고 배신자라고 집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요.”

“그 사람이 신관 자리에서 내려왔어요.”

흥미로운 이야기에 지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아예 카르위먼에서 나가겠다고 선언을 했어요.”

“이유는 뭐랍니까?”

“이번에 카르위먼이 중립을 선언한 걸 납득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것참, 교황님의 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다니, 과연 배신자는 다르군요.”

지크는 시니컬하게 루스를 씹었다.

“그렇다면 그 작자는 플로드 백작가 쪽에 붙었겠군요.”

“맞아요.”

“의도가 빤히 보이는군요.”

“그런가요?”

루벨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플로드 백작가가 성공적으로 스틸월 백작가를 점령하고 밸리드의 주구라는 증거를 찾아내면 그는 카르위먼에 성공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카르위먼의 밸리드에 대한 증오는 두 분이 더 잘 알 테니, 그가 귀환한 후 어떤 대접을 받을지도 예상이 되시겠죠.”

“많은 사람에게 영웅이자 진정한 신도 취급을 받겠죠.”

배신자인 루스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을 상상한 듯 루벨라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아마 카르위먼 내부에서도 카르위먼이 중립을 지키는 것에 불만인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들은 당연히 우르원 루스의 행동을 칭송하고 있을 테고요.”

“있습니다.”

와이그가 대답했다.

“그런 상황에 만약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교황님의 권위가 꽤 많이 타격을 받을 겁니다. 그리고 우르원 루스는 교황에 한 발 더 가까워지겠죠.”

“밸리드의 스파이라면 좋아 죽을 일이네요.”

“아마 그게 그 작자가 고생해서 올라간 신관 자리를 내려놓은 의도겠죠.”

지크가 히죽 웃었다.

“뭐, 그 의도가 들어맞으려면 이번 전쟁에서 이겨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지크는 이번 전쟁에서 져 줄 생각이 단 1도 없었다.

“그러네요. 그 사람의 의도가 이뤄질 일은 없겠네요.”

루벨라도 지크가 질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폈다.

“놈도 그다지 좋은 심경은 아닐 겁니다. 원래는 신관 직을 유지한 채, 플로드 백작가를 지원하는 카르위먼 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을 테니까요. 스파이로서 온갖 노력을 다해 올라간 카르위먼 고위직인 만큼 놓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르게 생각하자면, 그런 놈이 카르위먼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할 만큼 이번 전쟁이 중요하다는 거겠죠.”

“정말로 이길 수 있으시죠?”

“말 그대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지크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와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번에 오면서 백작가에 지원군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 말이죠.”

“그러고 보니 저도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루벨라가 호기심을 보여 왔다. 유명 용병단에 마법사, 엘프까지 스틸월 백작가를 돕겠다고 나섰다 하니 궁금증이 나지 않을 리가 없던 것이다.

“나중에 만나게 해드리죠. 루벨라 님과 와이그 님이라면 그 분들도 거부하진 않을 겁니다.”

“감사해요!”

그들과의 만남이 정말로 기대되는지 루벨라의 표정이 환해졌다.

“한데 두 분은 우르원 루스의 행적을 알려주기 위해서만 오신 겁니까?”

고작 그런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행차하기엔 두 사람의 신분이 너무 높지만, 우르원 루스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주변에 대놓고 말하고 다니긴 힘들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역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온 것만은 아닌지 와이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있지만, 균형을 맞추기 위함도 있습니다. 루스는 분명 스스로의 의지로 신관이란 직책을 내던지고 나갔지만, 외부에서 보면 다르게 보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중립은 그저 카르위먼이 귀족 간의 다툼에 끼어들지 않는다고 주장할 면피성 발언일 뿐, 실제로는 플로드 백작가에 힘을 실어주려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잖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저희가 오게 된 겁니다. 물론 루스처럼 스틸월 백작가의 편을 들진 못합니다. 그저 전쟁에 정말로 밸리드의 주구가 관련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낸다는 명분으로 온 겁니다.”

“두 분이라면 아무리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모실 만하죠.”

“물론 그저 구경만 할 생각은 없어요.”

루벨라가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크 님의 말씀이 맞는다면 저들은 이번 전쟁에서 밸리드의 힘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죠. 그렇다면 저와 와이그 님은 바로 지크 님의 동료로서 참전할 거예요.”

“하하하, 그거 든든하군요!”

빈말이 아니다. 두 사람이 전장에 있는 것 하나만으로 플로드 백작가는 꼼수로써 밸리드의 힘을 사용할 생각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 만약 두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밸리드의 힘을 사용한다면….

‘나야 좋은 일이지.’

녀석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카르위먼을 스틸월 백작가 쪽으로 완벽하게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원래 전쟁을 참관하는 데 저희가 올 생각은 없었습니다. 원래는 루스와 비슷한 직위를 가진 몇 명을 파견하는 선에서 그치려 했는데….”

“와이그 님!”

능글맞은 어투로 와이그가 하던 말을 루벨라가 급하게 끊었다.

“그거 꽤 재미있는 일화일 것 같군요.”

지크의 흥미로운 눈초리에 와이그는 다급한 루벨라의 눈빛을 무시하고 계속 입을 열었다.

“재미있다 못해 경악할 일화죠. 성녀님께서 루스처럼 성녀라는 신분을 던지고 스틸월 백작가 쪽으로 참전을 하려 하셨으니까요.”

이 건에 관해서는 웬만한 일에는 냉정, 침착을 유지하던 지크도 적잖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루스가 내던진 신관 직은 분명 얻기 힘든 직위다. 앞으로 대신관이 되는 것이 확실시 되던 루스였던 만큼 더더욱.

그러나 성녀라는 자리에 비하면 신관이라는 자리는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성녀란 직위는 말 그대로 카르위먼의 얼굴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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