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7화
플로드 백작령에는 진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이미 그들이 피네 자작가를 도와 아니, 도와준다는 핑계로 스틸월 백작가와 일전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은 백작령 전체에 퍼져 있었다.
플로드 백작가도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스틸월 백작가가 주변의 협력을 얻지 못하게 하려면, 피네 자작가를 도와 밸리드의 주구인 스틸월 백작가를 친다는 명분을 더더욱 널리 퍼뜨려야 했다.
스틸월 백작가와 대대로 갈등을 빚고 무력 충돌도 심심치 않게 해 온 플로드 백작가지만, 이익을 본 적은 별로 없다. 오히려 스틸월 백작가의 무력에 짓눌려 패퇴하기 일쑤였다. 괜히 현 플로드 백작이 자신의 딸마저 이용해 스틸월 백작가를 공격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스틸월 백작가와 무력 충돌이 있을 때마다 플로드 백작가 병사들의 사기는 썩 좋지 않았다. 붙었다 하면 깨지는 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밸리드의 주구라는 의혹에 스틸월 백작가가 흔들렸다. 그들의 아군은 많은 데 비해 스틸월 백작가에게 힘을 빌려주려는 곳은 없다.
심지어 스틸월 백작을 카르위먼이 파문할 수도 있다는 소문까지 도는 상황. 이번에야말로 스틸월 백작가를 이길 수 있다. 병사들의 마음속에 용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플로드 백작가로서는 무척이나 흡족한 상황이었다. 전쟁을 앞두고 병사들이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다면 그만큼 위험한 상황도 없다. 그 우려가 사라진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정말로 플로드 백작가 최대의 비원이라 할 수 있는 스틸월 백작가의 굴복이 실현될 것 같았다.
스틸월 백작가를 삼켜서 최소 후작, 어쩌면 그 이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플로드 백작가는 장밋빛 상상에 부풀었다.
그러나 지금껏 너무도 수월하게 달려온 계획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지금껏 어긋남 없이 진행된 계획에 감탄해야 하는지, 아니면 결국은 어긋나기 시작한 계획에 한탄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플로드 백작가에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결국 카르위먼을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했다는 소리군요.”
플로드 백작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커다란 죄라도 지은 것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할튼과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렌. 전혀 상반된 태도였지만 하나만큼은 같았다.
지금만큼은 둘 다 꼴 보기 싫은 놈들이라는 것.
인성이 그리 좋지 못한 아니, 탁 까놓고 말해 더러운 플로드 백작이니만큼 욕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어내지는 못했다.
“그렇습니다.”
그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 자신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태도가 플로드 백작가의 성질을 또 한 번 건드렸지만, 이번에도 그는 참았다. 그러나 못마땅한 낌새가 흘러나온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르위먼의 참전까지는 몰라도 파문은 분명 가능할 거라 하지 않았소.”
“그랬었죠.”
뭔가 변명이라도 한 마디 나올 줄 알았더니 딸랑 저 한 마디가 끝이다. 다시 한번 성질이 인내의 한계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동시에 플로드 백작은 이상한 낌새도 느꼈다.
‘저놈, 성격이 원래 저랬었나?’
누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아니랄까 봐 무슨 동화책 속의 정의로운 성기사가 그대로 튀어나온 것 같은 행동을 보이던 게 그렌 제너드란 남자다. 때문에 백작은 그가 이번 실패에 면목이 없다는 태도를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백작이 본 것은 저 뻔뻔한 태도다.
오래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백작이 아는 그렌은 저럴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저건 뻔뻔한 게 아닌가?’
가만 보니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계획에 관한 관심이 사라진 것 같다.
‘유라스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그러나 그건 그렌 개인의 사정이다. 저런 식으로 다른 곳에 관심이 쏠려 있으면 전쟁에서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하다.
‘계획의 막바지에 와서 이렇게 골치를 썩이나.’
그렇다고 성격대로 할 수도 없다. 그렌은 이번 음모에서 무척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껏 플로드 백작가가 스틸월 백작가를 효율 좋게 압박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그렌이 플로드 백작가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망할 손자 놈만 아니었다면 더 쓸모 있었을 것을…!’
지크에게 생각이 닿은 백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스틸월 백작가의 후계자 자리마저 지키지 못하고 집안을 박차고 나가, 손자를 이용해 스틸월 백작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플로드 백작의 구상을 박살내 버린 못난 손자.
지크가 스틸월 백작가에서 겉돌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의 배신 때문이지만, 그는 지크를 탓할 뿐 자신의 책임을 직시하지 않았다.
그런 지크가 갑자기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직위를 가지고 나타나 스틸월 백작가의 편을 들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내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한 순간은 그놈이 돌아온 그때부터야.’
밸리드의 주구라고 스틸월 백작가를 몰아치는 상황에서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지크가 스틸월의 편을 드니 사람들의 의심이 상당히 꺾여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지크를 원망해 봤자다.
‘일단 이놈을 계속 써먹을 수 있을까가 문제인데.’
아무리 지크가 끼어들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지위가 생각만큼 힘을 쓰지 못했다지만, 그래도 그 중요성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다. 명분으로써 충분히 쓸모가 있다.
오히려 지금 그렌이 사라진다면, 스틸월 백작가의 편을 드는 지크 때문에 처지가 완전히 뒤집혀 버릴 수도 있다.
‘게다가 무력도 뛰어나지.’
하지만 만약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것이라면 이번 전쟁에서 빼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괜히 전쟁 때 집중을 못 해서 죽기라도 한다면 명예 성기사라는 간판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아무래도 뭔가 신경 쓰이는 것이 있는 것 같소만. 이번 전쟁의 참여는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게 어떻겠….”
플로드 백작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지금껏 그렌을 향하던 못마땅한 시선이 일거에 사라졌다. 그곳에 대신 자리 잡은 건 이해할 수 없는 불쾌감이었다.
그렌의 눈이 플로드 백작을 향한다. 살기나 적의 같은 감정은 없다. 그러나 백작은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텅 빈 그렌의 동공 너머에 드리운 무언가가 계속해서 백작의 불쾌감을 자극했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그렌이 입을 뗐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전쟁은 무척 중요하잖습니까.”
“…그렇지.”
고위 귀족으로서의 경험과 자긍심으로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작은 그렌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꿨다.
‘이 작자, 내가 생각한 인물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정의로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건 겉모습뿐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알리면 사람들이 경악할 일이 분명하지만, 백작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렌이 어떤 사람이건 백작이 알 바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만이 판단의 근거였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아직 그렌은 쓸모가 있었다.
‘반응을 보면 전쟁에 관심이 떨어진 것 같진 않군.’
아니, 오히려 상당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그가 정신이 팔린 일이 전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놈을 써야지.’
그 높은 무력을 이번 전쟁에 아낌없이 휘둘러 줄 가능성이 높다.
“아쉽긴 하지만 안 됐으면 어쩔 수 없지. 계획이란 것이 생각대로만 되는 건 아니니까. 대신 이번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해주는 걸 기대하겠소.”
“걱정 마세요. 아주 제대로 날뛸 생각이니까.”
“그렇다면 됐소. 유라스까지 다녀오느라 고생하셨으니 그만 나가서 쉬시오.”
그렌이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백작은 잠시 그렌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치를 보고 있는 할튼을 쳐다봤다.
“자네도 나가서 준비를 하게. 이번 전쟁에서 우리 플로드 백작가에 대한 충성심을 확실히 보여주리라 믿겠네.”
“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할튼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쯧!”
두 사람이 나가고 백작은 혀를 찼다. 실패한 계획이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아쉬움을 계속 잡고 있어봤자 상황이 좋아지진 않는다.
‘아무리 실패했다고 해도 유리한 건 우리다.’
카르위먼이 합류하지 않는다 해도 백작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말로 질릴 정도로 내리는 비.
하지만 그것도 이제 곧이다. 시기상 슬슬 비가 그칠 때가 되었다.
그 즉시 플로드 백작가는 스틸월 백작가로의 진군을 시작할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그가 이끄는 연합군은 제대로 된 도움도 받지 못하고 내부적으로도 의구심이 만연한 스틸월 백작가를 완벽하고 잔인하게 짓이길 것이다.
백작은 스틸월 백작의 저택에 플로드 가문의 깃발을 꽂는 상상을 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대대로 이어져 온 스틸월 백작가와의 악연. 경쟁자라고는 하지만 세간에서는 스틸월보다 플로드를 한 수 아래로 봤고, 지금껏 나온 결과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열세를 뒤집고 그는 가문의 숙원이던 스틸월 백작가를 거꾸러뜨릴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인 법이다!’
어서 빨리 승리의 영광을 얻고 싶다. 백작은 하루라도 빨리 비가 그치길 기원했다.
스틸월 백작가에 응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했단 소식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 * *
비가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새파란 빛깔을 뽐냈다. 하늘에 떠 있는 건 우중충한 먹구름 대신 새하얀 뭉게구름들. 오랜만에 맛보는 햇빛을 받은 초목들이 싱그러운 생명력을 뽐낸다.
언제까지고 활기찬 생명이 노래할 것 같은 평화로운 광경.
그러나 그 평화가 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말발굽이 이제야 슬슬 말라가는 흙바닥을 사정없이 짓밟는다. 투레질을 해대는 말들의 행렬이 대지를 메웠다.
하늘 높이 세워진 창날들이 내리쬐는 햇빛을 산산이 부쉈고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주변에 위협을 가한다.
대규모 군세였다. 잘 무장된 병력이 길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들은 거침없이 국경을 넘었다.
바야흐로 플로드 백작가의 침공의 시작이었다.
그 맨 앞, 서슬 퍼런 눈초리를 한 그렌이 토르니움을 꽉 움켜쥔 채 움직이고 있었다.
* * *
플로드 백작가의 움직임은 바로 스틸월 백작가에 보고됐다.
당연히 스틸월 백작가는 소란스러워졌다. 이미 예상된 사태였지만 전쟁이란 단어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백작가에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기대하던 자도 있었다.
“드디어 그렌 제너드, 놈을 족칠 시간이야.”
침공 소식을 들은 지크는 환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