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6화
지크는 힐끔 위를 올려다봤다. 백작가 저택 창가에 서 있는 플로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더니 창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뗐다. 둘 사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지크는 그 이상으로 불쾌감을 표하지도 않았다.
“이제 해산들 해라.”
지크가 제자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끝났나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금은 무료한 시선으로 일행을 쳐다보고 있던 라라가 일행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 너도 잘 있었냐?”
“네. 백작가에서 무척이나 잘 대접해줘서 불편한 점은 없어요.”
라라가 한스와 스녹, 엘레나를 보더니 지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한데 굳이 제가 빠져 있어야 했을까요?”
“너는 내 제자가 아니잖냐. 이 녀석들을 상대로는 언제 험한 말이 나올지 모르니까.”
지크가 한스와 스녹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는 상관없는데요.”
“내 섬세한 마음이 괜찮지 않아.”
한스와 스녹이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라라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계신 모양이에요.”
“그렇겠지. 어떻게 사람들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살겠냐. 하지만 이 녀석들만큼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다.”
그러며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쳐다봤다.
“그렇지?”
“무, 물론입니다.”
“그, 그렇죠.”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어색한 미소가 우스꽝스러워, 라라는 물론 엘레나마저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 어떠냐.”
지크의 물음에 라라는 메고 있던 검을 유려하게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허공에 휘둘렀다. 깔끔한 은빛 섬광이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공간을 갈랐다. 라라는 그대로 검을 검집에 넣었다.
무척이나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지크는 그 동작에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많이 늘었군.”
“덕분에요.”
라라가 활짝 웃었다. 이 일행에 들어온 이후, 라라는 눈에 보일 정도로 늘어나는 자신의 실력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이 정도면 저도 지크 씨의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지금까지는 살짝살짝 도와준 것에 불과해. 제자까지는 아니지.”
지크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왜,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냐?”
“으음, 요새는 슬슬 그런 생각이 강해지고 있어요. 아까같이 따돌림당하기도 싫고.”
자신만 쏙 빼놓은 걸 상당히 마음에 둔 모양이다.
“원한다면 말해라. 어차피 이 녀석들 굴리… 아니, 훈련시키는 데 한 명 더 추가한다고 해서 힘들 건 없으니까.”
“…방금 굴린다고 하지 않았나요?”
“잘못 들었겠지.”
“…갑자기 의욕이 팍 사라지네요.”
“크큭! 그래, 천천히 생각해 봐라.”
라라는 복잡한 얼굴을 한 채 한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크는 제자들과 라라를 한 번씩 쳐다봤다.
‘이걸로 귀환한 후에 대충 얼굴들 한 번씩은 봤나.’
백작이나 그레이그는 보지 않았지만 어디 그 인간들이 돌아왔다고 얼굴 비춰야 할 인간들인가.
‘남은 건 한 명뿐이로군.’
하지만 그 사람은 지금 지크 마음대로 찾아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라일라는 언제쯤 나오려나.’
당분간 유적의 입구에서 지내야 할 듯싶었다.
* * *
다행히 지크가 라일라와 만난 건 이틀 뒤였다. 유적의 문을 열고 나온 라일라는 약간 피로감에 휘감겨 있긴 했어도 건강해 보였다.
“네 얼굴 보니까 좋네.”
라일라가 지크를 보고 처음 한 말이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고생했나 보군.”
“지하에 처박혀서 이상한 기계장치만 매만지고 있으니까. 같이 있는 사람이 친한 사이면 그나마 낫겠지만, 친하기는커녕 껄끄럽기 그지없는 작자잖아.”
“그 공주님이 좋은 동거인은 못 되지.”
지크는 유적 바깥을 가리켰다.
“바깥에서 조금 쉴까?”
“아니, 괜찮아. 햇볕이야 이번 일이 끝나면 원 없이 쬘 수 있으니까. 지금은 중요한 일을 해야지.”
바깥에 내리쬐는 햇볕을 아쉬운 눈빛으로 한 번 흘기긴 했지만, 라일라는 곧 바깥 풍경에 등을 돌렸다. 지크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라일라의 결의를 존중한 것이다.
지크와 라일라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곧 유적의 문이 자동적으로 닫혀 바깥과의 연결을 차단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라일라가 물었다.
“카르위먼은 중립을 표하기로 했다.”
“잘됐네. 그렌 제너드가 어떻게든 카르위먼을 끌어들이려고 수작을 부렸을 텐데.”
“그랬지. 할튼 바이너를 끌어들였더군.”
“할튼 바이너?”
“내가 예전에 말한 적 있을걸? 회귀를 했을 때, 한스와 같이 내게 시비를 건 기사 한 놈이 있었다고.”
“아, 네가 결투를 신청해서 짓밟았다는 그 기사 말이구나.”
하필이면 가장 마왕에 가깝던 시절의 지크에게 시비를 건 불운의 기사에게 혀를 찼던 기억이 있다.
“그놈이 이번에 그렌 녀석에게 붙었다.”
“세르피나가 한 설명 중에 그런 말은 없었지 않아?”
마치 전 재산을 사기당한 것 같은 표정으로 지크에게 이번 전쟁에 대한 정보를 설명해주던 세르피나를 떠올렸다.
분명 그때 할튼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정보를 말해주지 않은 건가?”
애초에 지크의 수작에 놀아나 정보를 강탈당하다시피 한 것이라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부정적이었다.
“그것보다는 내 행동이 원인이 돼 변수가 발생한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시간선 중 내가 백작가 안에서부터 깽판을 친 적은 없어 보이니까.”
“그걸 그렌 제너드가 이용한 거구나.”
“효과는 없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분에 차올랐을 둘을 생각하며 지크는 히죽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전쟁에 대비해 응원군을 요청하겠다고 했었지?”
“응, 그랬지.”
“요청을 보낸 사람들이 모두 왔다.”
라일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레오나나 윌위스 같은 사람들이 모두 왔다고?”
“그래.”
지크는 요청을 받은 자들이 직접 일행을 이끌고 백작가에 모여든 이야기를 모두 해줬다. 요하임과 이블린의 가문도 여러 물자를 보내줬다는 얘기도 첨가했다. 라일라는 주의 깊게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대단하네.”
“그렇지. 거절당해봤자 손해 볼 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보낸 것뿐인데 전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일반적인 도움도 아니고 전쟁 지원에 대한 요청이지 않던가.
“뿌듯하겠어?”
“뭐, 없다고는 말 못 하지.”
살짝 부끄러운 듯 지크가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 모습을 라일라는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바라봤다.
“네가 한 착한 일에 대한 보답이 돌아온 거야. 네가 어떤 생각으로 착한 일을 했건, 사람들은 분명 네가 내민 손에 많은 도움을 받은 거니까. 이젠 네가 용사 행세를 하겠다고 해도 함부로 놀라거나 놀리지도 못하겠네. 누가 뭐라든 분명 너는 사람들을 돕는 용사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
그러더니 그녀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젠 지크 브레이브와 경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제발 그 이름은 꺼내지 말아주라.”
고개를 젓는 지크의 모습에 라일라는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브레이브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윌위스와 레오나, 틸의 모습이 소름이 끼쳐.”
라일라가 웃음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마탑에서 무게 잡던 윌위스는 마탑주 자리를 벗어버린 탓인지 완전히 능글맞고 털털한 노인네가 돼 버렸더군. 그것만으로도 소화가 안 될 판인데 레오나랑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늘어나고 있어. 틸은 또 어떻고. 예전에 봤을 땐 말을 곧잘 해서 그래도 대화를 나누는 것에 어려움 없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웬걸, 사적인 자리에서는 과묵하기 짝이 없더군.”
“음, 예전에 꿈속에서 봤다는 지크 브레이브의 동료들의 모습이 현실로 나타난 게 불만이란 걸로 받아들이면 되나?”
라일라는 대번에 지크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지크가 저렇게 질색하는 태도를 나타낼 때는 대부분 지크 브레이브와 관련이 있을 때였으니까.
“그래.”
그러며 지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슬슬 그만 싫어할 때도 되지 않았나?’
예전에야 힘의 마왕으로서의 물이 덜 빠져서 자신과 완전히 상극인 지크 브레이브를 싫어한다는 게 이해가 갔지만, 지금의 지크는 이유야 어떻든 간에 착실히 용사의 길을 밟아가고 있지 않던가.
성격이야 다를지 몰라도 지금 지크의 발걸음은 지크 브레이브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한데도 아직 저렇게 싫어하다니.
‘뭐, 사람의 취향이야 다 다르니까.’
라일라는 아마도 지크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의 개인적 호오에 상관하지 않는 태도로 지크의 투덜거림을 납득했다.
“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어?”
“윌위스가 스녹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더군.”
“엘레나 때문인가?”
“그것밖에 없겠지. 아무래도 엘레나와 가장 친한 인물을 따지자면 그 녀석이니까.”
라일라도 엘레나와 무척 친한 사람이었지만, 아무래도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서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당장이라도 손녀를 훔쳐 가려는 도둑놈을 보는 눈이었어.”
“스녹도 고생하겠네.”
“촌구석 광산에서 일하던 촌놈이 마탑의 유서 깊은 가문의 영애를 얻으려면 그 정도 시련은 견뎌야지.”
물론 스누위크 최고의 마법사인 윌위스는 어쭙잖은 시련이 아니겠지만.
그렇게 지크의 근황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이번엔 지크가 물었다.
“너는 어때. 조작은 잘 배우고 있어?”
“그다지 어렵진 않았어. 조금만 있으면 경유지에 대한 조작은 완전히 터득할 거야.”
물론 그녀가 어렵지 않다고 해서 정말로 어렵지 않은 건 아니다. 엄청난 천재인 그녀니까 할 수 있는 말일 뿐이다.
“다만 세르피나가 지나치게 얌전해. 예전에 네가 한 말대로라면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래?”
라일라가 꽤 심각하게 말한 것에 비해 지크의 대답은 꽤 시큰둥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그에 대한 대비는 전적으로 너한테 맡긴다. 네가 아니면 알아내지도 못할 거고. 무엇보다 난 널 믿는다.”
그건 라일라에게 무엇보다도 기쁜 말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걱정 마!”
그렇게 두 사람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유적 안으로 나아갔다.
* * *
“너로군.”
지크를 발견한 세르피나가 대번에 인상을 썼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인상을 쓰면 되나.”
“네가 예전에 한 일을 생각해봐라.”
“예전에 한 일? 서로가 원하던 바를 이룬, 모두에게 이득이 될 정당한 거래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클로원이 존재하던 시절에 네가 있었다면 나는 널 둘 중 하나로 다뤘을 거다. 그 잘난 혓바닥을 뽑아버리거나 제국을 위해 사용하도록 강제하거나.”
그건 세르피나의 악담이자 그녀가 얼마나 지크를 고평가하는지 알려주는 말이었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혀를 뽑힐 생각도 없고 어느 한 곳에 매일 생각도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클로원은 망해 사라졌지. 옛날 옛적에 말이야.”
세르피나는 크게 코웃음을 치고 몸을 돌렸다.
“뭐 하고 있나, 라일라! 당장 장치 앞에 서라!”
지크와 말을 하는 건 손해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아는 모양이다. 그녀는 라일라를 붙들었다.
“좋은 스승님이로군.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의지가 대단해.”
지크의 놀림을 한 귀로 흘리며 세르피나는 장치로 걸어갔다.
라일라가 장치에 손을 대고 마력을 흘린다. 세르피나는 그 옆에서 라일라가 하는 양을 쳐다봤다.
지크도 더 이상 세르피나의 성질을 긁진 않았다. 그는 조용히 라일라가 경유지의 조작을 하는 것을 바라봤다.
우기가 멈춰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남은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