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5화
이번 전쟁의 승리를 위해 찻잔을 부딪친 네 사람은 해가 진 후 다시 모였다. 인원수는 그대로, 모인 곳도 지크의 방으로 똑같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잔에 채워진 것이 차가 아닌 술이란 것이었다.
“크으으으!”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술 특유의 짜르르한 맛에 지크가 감탄성을 흘렸다. 유라스로의 여정 때문에 생긴 미약한 피로가 그 한 번에 완전히 씻겨 내려갔다.
역시 하나의 일을 끝마친 후에 마시는 술은 말 그대로 생명의 향락이었다. 죽기 일보직전에 마신 포션도 이런 감흥을 주진 못할 것이다.
“역시 고명한 귀족 가문의 술은 다르군.”
윌위스가 혀로 입술에 묻은 술을 핥으며 말했다.
명성 높은 마탑의 탑주이자 명문가의 가주로서 상당히 좋은 요리와 술을 먹어 왔을 윌위스도 술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으으, 이게 맛있어?”
그에 비해 레오나는 술잔 안에 살짝 혀를 대보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달지도 않고 쓰기만 하고.”
“그러고 보니 엘프들은 주로 과실주를 마셨었지?”
도수도 낮고 달달한 게 특징인 술이다. 엘프 특유의 비법으로 꽃향까지 첨가해 입 안이 즐거운 술. 회귀 전 지크도 상당히 즐겨 마셨었다.
그런 술에 익숙해진 레오나에게 지금 마시고 있는 독한 술이 맛있을 리 없었다.
“나도 들어본 적 있군. 그렇게 맛있나?”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인지, 아니면 애주가로서의 흥미인지 윌위스가 관심을 보였다.
“적어도 이런 술보다는 훨씬 맛있어.”
“나중에 먹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
그러며 윌위스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둘의 대화를 바라보던 지크가 이번엔 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리 용병답지 않게 신뢰와 실적을 중요시 한다지만 그래도 용병은 용병인지 술의 맛을 음미하는 윌위스와는 다르게 그는 말 그대로 술을 위장에 퍼 넣고 있었다.
“맛은 괜찮습니까?”
“네.”
대답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아까부터 그다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틸의 말수가 무척 적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저번에 어울릴 때는 분명 적잖게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틸의 말수는 무척이나 적었다. 딱히 지크나 이 자리를 불편해 하는 기색은 없다. 그저 그의 성향 탓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예전에 본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이 사람과 사적인 대화는 그리 나눠본 적이 없지.’
대부분은 일이나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였고, 사적인 얘기라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같이 도시에 고용된 일 관련 동료로서 짧게 한 게 다였다.
‘사적인 자신과 공적인 자신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타입이었나?’
그런 사람이 있긴 하다. 지크는 저번에 꿈에서 본 광경을 떠올렸다. 분명 지크는 당시 등장한 틸을 과묵한 거한이라 생각했었다. 지금 틸의 모습은 꿈에서 봤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그걸 떠올린 순간, 지크는 등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젠장, 마치 내가 지크 브레이브의 꿈속에 있는 것 같잖아.’
지크는 이래저래 틸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틸의 과묵함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용병단에 관한 것이나 일에 관한 것에는 유창하게 나오던 틸의 입은 이번엔 잘 열리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말을 걸면 틸이 오히려 불편해 할 터. 지크는 어쩔 수 없이 틸이 과묵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진 괜찮았다.
‘아직 레오나와 윌위스가 있으니까.’
꿈속에서 티격태격대던 둘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둘은 꽤 죽이 잘 맞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마력을 운용하는 거야?”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엘프보다 마력 운용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많다보니 개발된 편법이지.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고위 마법사가 되기 힘드네.”
“그럼 너는 달라?”
“다르지. 이래 봬도 인간들 중에서는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러며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아무래도 마법이라는 공통점이 두 사람의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모양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젊다 못해 어리게까지 보이는 레오나가 나이 든 윌위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 같지만 나이로만 따지면 레오나가 훨씬 윗줄이다.
윌위스도 그걸 알기에 지금의 대화를 즐길 뿐,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 적어도 저 둘은 그 꿈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그러나 지크의 안도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술자리가 점점 깊어진다.
술이 맛이 없다며 인상을 찌푸리던 레오나도 분위기에 취해 조금씩 홀짝거리더니 곧 취기가 올랐다.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라오면 술이 술을 마시게 되는 법.
아무리 과실주라도 레오나도 술을 모르는 자는 아니었기에 레오나가 마시는 술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레오나와 윌위스 사이의 대화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뭐냐. 나이만 많이 먹었지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는 꼬마 아닌가.”
“엘프의 나이로는 난 아직 젊어!”
“그럼 이 어르신한테 어느 정도 공경의 빛은 나타내야지! 이러니까 요즘 젊은 놈들은…!”
술기운 때문에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떽떽거린다.
언제부터 저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둘은 서로를 향해 험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물론 분명 선은 지키고 있고 악의가 섞인 것도 아닌 상황이었지만, 지크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꿈속에서 본 지크 브레이브의 동료들과 똑같이 행동하기 시작한 둘의 모습 그 자체가 문제였다. 말라붙어버린 공포란 감정이 새삼 샘솟는 것 같다.
지크는 틸을 쳐다봤다. 그는 괜히 둘 사이에 끼어들어 불똥이 튀는 걸 꺼리는지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만약 중재를 한다면 숫제 지크 자신이 해야 할 판이었다.
꿈속의 지크 브레이브처럼.
‘빌어먹을! 술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이렇게 술맛이 떨어진 건 맹세코 처음인 것 같다. 지크는 슬쩍 레오나와 윌위스를 보고는 시선을 외면했다.
‘절대 저 둘의 중재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그것은 어쩌면 그렌 제너드를 몰락시키겠다는 다짐보다도 더욱 굳건한 맹세였다.
그러나 결국 술자리를 끝내야 할 때 둘 사이를 진정시켜 돌려보낸 건 지크였다.
* * *
다음 날, 지크는 오랜만에 제자들과 만났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한스를 대표로 인사를 하는 셋을 지크는 빤히 바라봤다. 평소와 다른 지크의 태도에 한스와 스녹이 슬쩍 눈치를 봤다.
“그래, 반갑다. 무척이나.”
한스와 스녹이 움찔했다. 엘레나야 여행에 끼어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라일라의 제자라는 특성상 지크에게 그다지 겁을 먹지 않는다지만 둘은 다른 것이다.
지크가 저렇게 자신들을 반긴 적은 없다. 혹시 자신들이 뭔가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일까.
그러나 얼굴을 보니 지크는 정말로 자신들을 반가워하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벌을 받을 것 같지는 않아 한스와 스녹은 안도하면서 긴장을 풀었다.
아무리 지크와 같이 다닌 둘이라도 지크가 설마 자신들을 보며 본인이 지크 브레이브가 아님을 새삼 되새기며 감사하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응원군 요청 수고했다. 잘해줬어.”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칭찬했다. 아무리 우기 때문에 전쟁이 미뤄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원군에 대한 요청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때문에 지크는 자신의 편지를 한스와 스녹에게 맡겼다. 둘은 지크의 명령대로 빠르게 편지를 전해 응원군이 시간 안에 올 수 있도록 했다. 그건 확실한 공적이었다.
한스와 스녹을 치하한 지크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할아버지하고 회포는 잘 풀었나?”
“네.”
“네 할아버지가 기뻐하시더군. 네 실력이 무척 늘었다고 말이야.”
“그런가요?”
엘레나는 부끄럽다는 듯이 볼을 긁었다. 하지만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방심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라고 하셨어요.”
“아무리 성과가 잘 나더라도 향상심은 항상 가지고 있어야지.”
그렇게 말하고 지크는 다시 제자 한명, 한명을 둘러봤다.
“알고 있겠지만 곧 전쟁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나와 같이 그 선봉에 서야 할 거고. 긴장에 얼어붙어 있을 필욘 없지만 그 대책은 철저히 하고 있어라. 알겠냐?”
[네!]
셋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 * *
백작가 저택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전쟁을 앞둔 상태라 그 수는 평소보다 늘어난 상태.
병사부터 하인까지 묘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전쟁이 곧 터진다는 사실이 슬슬 피부 언저리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트레얼은 오늘도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쟁을 대비하는 백작을 대신해 저택의 대소사를 처리해야 하고 백작의 전쟁 준비에 한 팔 거들기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백작이 가장 신뢰하는 가신 중 한 명이자 스틸월에서도 유능하기로 손에 꼽히는 자다웠다.
그는 하인들 몇몇을 앞에 두고 이리저리 명령을 내렸다.
하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난 후 다음 일을 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트레얼.”
그에게 여성 한 명이 다가왔다.
백작가의 안주인이자 그레이그의 친어머니, 플로라 스틸월이었다. 트레얼은 바쁜 와중에도 그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님.”
“바쁘신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다른 귀족 가문의 안주인들은 전쟁을 앞둔 상황에 불안감을 호소하겠지만, 플로라에게 그런 낌새는 없었다. 그것이 왕국의 강철벽, 스틸월가의 안주인 된 자로서 보여야 할 태도였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택의 일말인데요.”
저택의 일은 트레얼만 챙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플로라도 트레얼과 같이 저택의 일을 어느 정도 맡고 있었다. 그녀가 트레얼을 찾은 이유도 저택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이 일은 그렇게 처리할게요.”
“알겠습니다, 마님.”
“저택의 일은 최대한 제게 맡겨주시고 트레얼은 백작님을 돕는 것에 집중해 주세요.”
“명심하죠.”
트레얼은 새삼스레 플로라를 쳐다봤다.
사라 스틸월이 죽은 후 본부인이 된 후처. 째진 목소리로 떽떽거리던 것밖에 하지 못하던 사라와는 달리 플로라는 변경백의 부인으로서 거의 완벽한 여성이었다.
그것은 스틸월 역사상 최악의 혼란기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작금의 상황에도 침착함을 유지한 채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중심을 잡고 있는 모습만 봐도 충분히 증명됐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단점이랄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플로라의 시선이 창문 밖을 향했다.
트레얼은 그녀의 눈빛이 무척이나 복잡해지는 걸 확인했다. 트레얼도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스, 스녹, 엘레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크의 모습이 보였다.
트레얼은 다시 플로라를 쳐다봤다.
원래라면 지크에게 무조건 적의를 날렸을 플로라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복잡미묘했다.
사라에 대한 악감정과 후계자의 자리에 그레이그를 앉히고 싶은 욕심 때문에 덮어놓고 싫어한, 자기가 낳지 않은 아들.
하지만 바로 그 아들 덕에 휘청휘청 흔들리던 백작가가 다시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아마 지크를 보는 그녀의 시선은 백작가의 다른 이들이 지크를 보는 시선과 그리 다르지 않을 터.
과연 이 전쟁이 끝나고 스틸월 백작가가 살아남았을 때 그녀가 지크를 보는 시선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트레얼은 그것이 살짝 궁금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