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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93화 (493/628)

제493화

지상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 라일라는 유적에 틀어박혀 세르피나에게 경유지에 대한 조작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쿠우우우웅!

오늘도 세계수의 분신들이 보낸 막대한 마력들이 경유지 바닥을 가득 채웠다. 라일라는 수정을 감싸고 있는 고리 위의 제어 장치에 손을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세르피나가 팔짱을 낀 채 여느 때와 같은 무감정한 눈으로 라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우웅!

라일라의 손으로부터 뻗어나간 마력이 제어 장치 안으로 스며들어 간다. 수정이 빛나며 고리가 은은히 떨렸다.

움찔!

평소처럼 수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둥을 타고 오르던 마력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기둥을 따라 빙글빙글 돌긴 했지만 수정을 향해 올라가진 않았다.

그 광경을 본 세르피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 됐다.”

라일라가 불어넣던 마력을 중단했다. 기둥 주위를 돌던 마력은 언제나 그랬듯 다시 수정을 향해 올라갔다가 한데 뒤섞여, 흰빛으로 변해 벽 너머로 사라졌다.

“후우!”

라일라가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아니고 마력 소모도 감당할 만했지만, 아무래도 심력이 소모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옅은 피로를 느끼면서도 라일라의 마음은 뿌듯했다.

“많이 늘었군.”

세르피나의 말대로 라일라의 경유지 제어는 굉장히 숙달되어 있었다. 이 유적 전체를 조작하는 것인 만큼 그 제어는 무척이나 어렵다. 그걸 생각하면 라일라의 숙달 속도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그러나 세르피나는 라일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할 생각이 없었다.

“내 육체니 당연한 결과지.”

오히려 조금 늦었으면 라일라의 무능을 한껏 비웃으며 조롱했을 것이다.

한껏 느끼고 있던 뿌듯함에 초를 친 그녀를 라일라가 노려봤다. 하지만 세르피나는 라일라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마.”

세르피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이 사라지지 않았더냐. 뭘 더 하고 싶어도 더 이상은 무리다.”

“다른 조작을 가르쳐주면 되잖아.”

“다 가르쳐 줬지 않느냐. 이론은 전부 가르쳐준 거나 다름없고, 나머진 숙달의 문제인데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이 없으면 연습을 할 수 없지.”

“…그렇게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끌려는 건 아니고?”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럴 거라는 증거는 있으면서 하는 말이었으면 좋겠구나. 아니라면 일단 증거부터 찾고 오너라.”

“네가 지금처럼 현실에 나오고 있는 건 내 덕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협박이라도 할 셈이더냐.”

“못 할 것도 없지.”

“좋을 대로 하거라. 하지만 분명 계약은 내가 경유지의 조작법을 알려주고 너는 나를 현실에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네가 계약을 어긴다면 나 또한 지킬 이유는 없다는 걸 명심해라.”

“…….”

라일라는 세르피나를 노려봤다. 저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일까?

‘지크가 있었더라면….’

하지만 지금 지크는 없다. 그는 지상에 다른 일을 처리하러 나갔다. 그녀를 믿고서.

때문에 라일라는 더더욱 세르피나를 견제하는 일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할 말이 없다면 이쯤 하자꾸나. 나도 그다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고 세르피나는 눈을 감았다. 아마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킬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라일라는 다시 제어 장치에 손을 올렸다. 지금 당장 세르피나의 속내를 캐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제어 장치를 확실하게 다룰 수 있도록 연습을 하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다시 제어 장치에 마력을 넣고 경유지에 대한 권한을 천천히 훑어갔다.

그렇게 조용히 시간이 흘러갔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라일라도 세르피나도 서로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서로에 대한 호감 같은 건 일절 없는 사이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편이 더 이상했다.

라일라는 제어 장치에 집어넣는 마력을 끊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많아진 땀을 닦아내며 제어 장치에서 한 발 물러설 때였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린다. 라일라가 뒤를 돌아봤다. 평소에는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겨 있던 세르피나가 라일라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다. 그렇게 노력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다.”

무슨 바람이 불어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라일라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세르피나를 바라봤다.

“어차피 브뤼셀 시스템은 붕괴됐으니 더 이상 회귀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세계수의 해방도 너희가 굳이 기를 쓰고 노력할 필요는 없는 일이지. 기실, 지금 네가 하는 일은 철저하게 그렌 제너드와 그 뒤에 있을 흑막을 몰락시키기 위한 작업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적어도 너는 그 둘과 뚜렷한 악연이 없다. 기껏해야 브뤼셀 시스템에서 탈출한 너를 흑막이 잡으려 들었던 정도지. 그 때문이냐?”

“글쎄.”

라일라는 생각을 다듬었다.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 노력을 하는 것일까.

“일단 그렌 제너드와 흑막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줬고, 앞으로도 줄 테니까. 그를 막으려 드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대단한 정의의 사도 납시셨군.”

세르피나의 빈정거림을 라일라는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크의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사랑 때문이란 건가.”

세르피나의 목소리가 묘해졌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감정인가?”

“넌 모를 거야.”

“모른다. 난 클로원을 위한다는 대의로 움직일 뿐이니까. 그런 사소한 감정 따위는 이해할 생각도, 필요도 없다.”

“잘됐네. 나도 널 이해시킬 생각은 없어. 우리 서로의 감정은 상관 말고 놔두자고.”

라일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걸로 대화는 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감고 사색에 빠질 거라 생각했던 세르피나는 여전히 라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고방식은 지크에게 배운 것인가.”

“그래.”

“재미있군. 처음 만났을 때는 적의와 아련함을 느끼던 상대에게 이제는 사고방식마저 배운 것이니.”

라일라가 살짝 놀란 눈으로 세르피나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솔직히 왜 그런 감정을 느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나의 감정이 남아 있는 상태여서 그런 것일 터다. 적의는 지크 브레이브와 대적했던 기억 때문이고, 아련함 또한 지크가 지크 모어가 아닌 것 같으니 지크 브레이브가 아닐까 잠깐 생각했기 때문이지. 나라는 존재에게 지크 브레이브는 여러모로 인상적인 상대였으니까.”

세르피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의 고저가 없었지만, 라일라는 그 속에서 약간의 감정이 뒤섞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크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느냐.”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네가 지크에 대해 궁금해하다니.”

“살짝 흥미가 생겼다. 클로원을 위한 대의와 함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너라고 해도 네가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한 과정에 조금은 흥미가 솟는구나.”

라일라는 살짝 고민을 했다. 이것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제어 능력을 숙달시키는 걸 방해하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이 녀석이 쓸데없는 방법을 떠올릴 시간을 없앨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좋아.”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부터 얘기할까?”

세르피나의 앞에 앉은 라일라는 더듬더듬 기억을 더듬어 그녀와 지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세르피나는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 * *

스틸월 백작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밸리드의 주구라는 좋지 않은 소문과 바로 앞으로 다가온 전쟁, 그리고 모이지 않은 응원군 덕에 백작령의 사기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얼마 전, 예상치 못한 원군이 도착한 후로 밑바닥으로 처박혔던 사기가 반등했다. 원군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기가 상승할 이유지만, 그 원군의 면면도 대단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두 개의 후작가에서 그들에 대한 지원을 선언했고, 이웃 나라까지 명성을 날리고 있는 대규모 용병단과 엘프들, 그리고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들까지 합류했다.

국가 간의 전쟁이라도 이런 호화스러운 멤버가 집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세력을 껴안은 플로드 백작가가 상대라도 이 정도의 원군이 있다면 최소한 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틸월 백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의 뇌리에 새겨졌다. 자연스레 사기도 드높아졌다.

그리고 그들을 데려온 지크에 대한 명성 또한 덩달아 높아졌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유라스에서 볼일을 끝내고 비올사로 돌아온 지크는, 자신을 보며 군기가 바짝 든 채 큰 소리로 반기는 경비병을 볼 수 있었다.

‘저 새끼 뭐 잘못 먹었나?’

지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경비병을 바라봤다. 하지만 경비병은 반짝반짝한 눈초리로 지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꺼림칙한 존경의 눈초리에 손을 몇 번 흔들어 답해준 후 지크는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소름 끼치는 시선은 경비병의 것만이 아니었다. 지크를 보는 사람들의 눈이 하나같이 뭔가 대단한 사람을 본다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지크가 그 이유를 안 건 백작가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 사람들이 도착했다고?”

“그렇습니다.”

지크를 맞은 트레얼이 늑대의 송곳니와 엘프, 마법사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진짜 왔네, 그 사람들.’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지크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일단 전력이 부족한 것 같으니 그가 아는, 전력이 될 것 같은 세력에게 모두 편지를 보냈을 뿐이다. 한마디로 찔러나 본 것. 설마 그들이 모두 지원군을 보낼 줄은 몰랐다.

“그 사람들 어디 있습니까?”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은 고급 숙소를 통째로 빌려 제공해 드렸고, 엘프분들과 마법사분들은 저택 내에 숙소를 마련해 드렸습니다.”

“모두 제 방으로 초대해 줄 수 있습니까? 불렀으니 인사라도 해야겠죠.”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원래도 백작과 싸울 때를 제외하고는 지크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리던 트레얼이지만, 오늘은 한층 더 공손해진 것 같았다.

“한데 도련님. 카르위먼에 갔던 일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카르위먼은 중립을 표하기로 했습니다. 파문도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트레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카르위먼이 자신들을 적대한다는 최악의 상황이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에게 보고는 알아서 해주세요. 전 일단 도와주러 온 사람들을 보러 가야겠으니까요.”

“알겠습니다.”

트레얼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사라졌다. 기쁜 소식을 어서 백작에게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의자에 앉아 여행의 노고를 달랠 때였다.

똑! 똑! 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요.”

지크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너머에는 환한 표정의 레오나가 서 있었다.

“지크! 오랜만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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