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2화
“뭐 하나? 어서 받으시게.”
노인이 가죽을 흔들었다. 노인의 뒤편에서 한 중년인이 한숨을 푹 내쉬고 노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경비분께서 당황하시지 않습니까, 스승님.”
그는 노인의 손에서 가죽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은 뒤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지크 씨가 저희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함께 주신 편지입니다. 스틸월 백작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는 슬쩍 틸과 레오나 그리고 그 일행들을 훑었다.
“듣자 하니 저희 같은 분들이 또 있으신 듯하니, 한 번에 가져다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 그러죠.”
경비병은 가죽으로 감싸인 편지를 받아 동료에게 건넸다. 동료의 손에 쥐어진 편지는 총 세 개. 동료는 허겁지겁 성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당신들도 지크의 친구야?”
레오나가 갑자기 끼어든 무리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노인, 윌위스 드웨인이 레오나를 쳐다봤다.
“친구라…. 그래,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역시 그렇구나!”
외견상으로는 굉장히 젊어 보이는 레오나가 노인인 윌위스에게 일견 예의 없이 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에 눈살을 찌푸리는 자는 없었다.
엘프가 극히 긴 수명을 가지고, 몇 백 살이 넘었다 해도 젊어 보인다는 건 꽤 유명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레오나도 겉보기와는 다르게 나이가 꽤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 자네도 지크의 친구라고 들었다만.”
“그래!”
“호오, 엘프 친구라. 역시 능력 있는 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먼.”
스스로 무언가를 납득하고 윌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이번엔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에 시선을 돌렸다.
“자네들도 지크의 친구고?”
“그렇습니다, 노인장.”
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으로 보이는데 굉장히 예의가 바르군.”
“그게 저희 용병단의 신조입니다.”
윌위스는 감탄한 눈빛으로 늑대의 송곳니를 훑어봤다.
“훌륭하군.”
“노인장은 마법사로 보이시는데, 맞습니까?”
“그렇네. 그러니 이 전쟁에 도움을 주겠다고 왔지. 마법이 아니라면 이 기운도 없는 노인네가 어찌 전쟁에 도움을 주겠나.”
윌위스는 껄껄 웃었다.
“다른 분들도 모두 마법사시고요.”
“맞네. 내 제자들이지.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말해도 끝끝내 따라온 어리석은 녀석들일세.”
말과 다르게 윌위스의 얼굴엔 흐뭇함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을 챙기는 제자들의 행동이 무척 감동적인 모양이었다.
틸은 마법사들을 훑어봤다. 수는 적다. 대충 열댓 명 정도. 하지만 저들이 모두 마법사라면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니다.
틸은 저자들이 내뿜는 마법을 향해 돌격하는 상황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틸 자신은 몰라도 용병단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게 틀림없었다.
‘물론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자들이라면 모르겠지만.’
털털하게 웃는 노인도 그렇고 그 옆에 서 있는 중년인도 그렇고, 절대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
‘저 정도의 마법사들이 있는 곳이라면 한 곳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혹시 노인장은 마탑 출신이십니까?”
마탑. 그 짧은 단어에 녹아 있는 권위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대답은 윌위스가 아닌 중년인의 입에서 나왔다.
“스승님께서는 얼마 전까지 스누위크의 마탑주셨습니다.”
틸은 경악했다. 만만치 않은 노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마탑주였다니. 그 말은 곧 눈앞의 노인은 이 왕국에서 마법 실력만으로는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한 손 안에 꼽히는 실력자라는 뜻이다.
경악하기는 다른 용병들과 경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마탑의 위엄에 관해서는 들은 적이 많은 것이다.
“…마탑?”
다만 인간 사회를 잘 모르는 엘프들에겐 생소한 단어일 뿐이었다.
“인간 사회에서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마법사들을 기르고 연구를 하는 등, 마법에 관한 전반적인 걸 다루는 단체로 알고 있습니다.”
파병된 엘프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레오나에게 설명을 했다. 그는 예전에 인간 세계를 꽤 오랜 시간 여행을 한 경험이 있어 다른 엘프들보다는 인간 사회에 해박했다.
“그렇구나.”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은 그저 새로운 지식 하나를 얻었다는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담백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엘프이기 때문이다. 인간, 그것도 평범하게 경비병이나 하던 자에게는 막대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마, 마탑의 탑주라고?’
어떻게 보면 일국의 왕만큼이나 거대한 권위를 가진 자가 바로 마탑의 탑주다. 계속해서 이어진 충격에 경비는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예군으로 유명한 스틸월 백작가의 경비로서 그도 상당한 훈련을 받은 자였다. 고작해야 정신적 충격 좀 받았다고 임무를 병폐할 순 없었다.
그러나 정신이 어질어질한 것도 사실. 그는 빨리 편지를 쥐고 달려간 동료가 명령을 갖고 돌아오길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 * *
스틸월 백작가에 소란이 일었다. 전쟁을 앞두고 부족한 전력에 끙끙 앓고 있던 그들에게 새로운 전력이 등장한 것이다. 분명 굉장히 기쁜 일이다. 하지만 백작가의 사람들이 느낀 감정은 기쁨보다는 당혹감의 비율이 더 높았다.
새로운 전력이 지나치게 규격 외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됐나!”
백작이 보고를 하러 온 트레얼에게 급히 물었다. 트레얼도 평소의 침착한 얼굴이 상당히 깨진 상태로 보고를 올렸다.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은 고급 숙소 하나를 대절해 줬고, 엘프들은 백작가 정원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마련해 줬습니다. 마법사들은 조용한 곳을 원해 별채에 짐을 풀게 했고요.”
“불만 같은 건 없었나?”
“전부 만족한 듯 보였습니다. 사람을 붙여 불만이 있으면 바로 알려달라 했으니, 있다면 보고가 될 겁니다.”
“그래.”
상황이 일단락됐다는 것에 백작은 안도했다. 허공을 보고 한숨을 한 번 내쉰 그의 시선이 곧 책상 위에 있는 세 장의 편지에 도달했다.
백작의 시선은 복잡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미 확인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이번 전쟁에 대비해 지크가 아는 이들을 불렀으니 그들을 고용하라는 말이 전부.
문제는 지크가 부른 사람들 그 자체였다.
백작은 일단 가장 왼쪽에 있는 편지를 집었다. 그건 늑대의 송곳니가 가지고 온 편지였다.
“늑대의 송곳니라…. 설마 고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언제나 전쟁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틸월 백작가의 특성상, 왕국과 그 주변 나라에서 활동하는 용병단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용병단을 파악하고 있진 않다. 그럴 필요도 인력도 없었다. 하지만 실력 있는 용병단만은 계속해서 주시했다.
그 중에서 가장 상위에 위치하고 있는 게 바로 늑대의 송곳니였다.
실력은 두말할 것 없고 용병들에게 부족한 신뢰조차 충족한 용병단. 특히 단장인 틸의 무력은 스틸월 백작마저 눈여겨 볼 정도였다.
당연히 이번 전쟁에서 고용하고 싶은 용병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확히 그들을 찍어 고용하기엔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찾으려면 금방 찾을 순 있겠지만 문제는 지금 스틸월 백작가에는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한데 설마 알아서 자신들을 고용해 달라고 올 줄이야.
“명성이 자자한 용병단이니 분명 이번 전쟁에 도움이 될 겁니다. 실제로 직접 보니 좋은 의미로 용병단답지 않더군요.”
트레얼의 말에 백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아이들은 잘 있는가?”
틸의 아들과 닉의 딸을 말함이었다.
“네. 저택에서도 좋은 방을 내주고 하녀들에게도 잘 돌보라고 철저히 주의를 줬습니다.”
지크는 편지에서 아이들만은 백작가에서 직접 돌보라고 적었다. 백작은 이를 받아들였다. 지금 상황에 늑대의 송곳니 같은 용병단을 끌어들이는데 아이 둘 정도 돌보는 게 무슨 대수랴.
그렇게 일단 늑대의 송곳니에 대한 의논은 끝났다.
하지만 늑대의 송곳니까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고 늑대의 송곳니가 최상위 용병단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용병단인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달랐다.
백작은 이번엔 중앙에 있는 편지를 집었다.
“호수의 일족의 공주님이라고?”
“그렇다고 하더군요.”
백작은 머리를 짚었다. 전쟁에 도움을 주겠다고 엘프들이 참가한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 엘프 일족의 공주님이 끼어 있다니.
“공주님은 호수의 일족이지만 그렇다고 호수의 일족 엘프들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일족의 병사들도 섞인 일종의 연합군이더군요.”
“그들이 전부 지크에게 빚을 졌다는 건가?”
“본인들 주장으론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전쟁에 도움은 되겠지?”
“엘프들의 궁술과 마법 실력에 대한 명성은 자자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번 병력 파견은 엘프들 중에서도 정예들만 추려서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일단 실력을 보긴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대보다 낮을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게다가 어쨌든 전력이 늘어나는 건 확실하다.
백작은 마지막 편지를 잡았다.
“스누위크 마탑의 탑주가 포함된 마법사들이라….”
“전 탑주입니다.”
트레얼이 정정해 줬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현 탑주든 전 탑주든 어쨌든 스누위크에서도 최고의 마법사라는 것 아닌가.”
그에 관해서는 트레얼도 이견이 없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마탑주와 그 제자들 열셋. 이건 정말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여러 전장에 나간 경험이 있는 백작은 당연히 마법사들과도 공투를 해봤다. 그리고 마법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지 똑똑히 눈에 새겼다.
그런 이들이 열넷이나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마법사들 중 손에 꼽히는 이들이.
정예 기사와 병사들을 보유한 스틸월 백작가와 그 마법사들이 힘을 합하면 전력은 엄청나게 상승할 것이 틀림없었다.
늑대의 송곳니, 엘프, 마탑의 마법사.
얼마 전까지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스틸월 백작가에거 엄청난 패가 들어왔다.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여러 세력을 끌어 모은 플로드 백작가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역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기뻐할 일이다.
하지만 백작의 감정은 복잡했다. 기쁜 감정이야 당연히 있다. 하지만 이 응원군을 끌어모은 게 지크라는 게 문제였다. 지금 스틸월 백작가를 돕고는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지크는 백작가에서 쫓겨난 몸.
그러나 지금 백작가를 지탱하고 있는 존재는 백작이 아닌 지크였다.
지크의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는 신분이 백작가에 밸리드의 주구라는 낙인이 찍히는 걸 막아줬고 이번엔 부족한 전력을 단숨에 채워주기까지 했다.
반면에 백작이 그토록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던 그레이그는, 단호히 말해서 이번에 도움이 된 것이 없다. 오히려 그레이그조차 지크의 도움을 받고 정신적 충격을 회복하고 있었다.
백작은 입안이 꺼끌거림을 느꼈다. 침을 모아 꿀꺽 삼켜봤지만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