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0화
그 험악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아이에게나 어울릴 법한 명랑한 웃음을 짓고 있는 맥스의 모습에 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차마 그에게 소름 끼치니 그런 웃음은 때려치우라는 매정한 말은 할 수 없었다.
“그건 그렇지.”
지크란 이름은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에게는 꽤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다. 늑대의 송곳니 설립 이후 최악의 사건 때 함께한 사람이지 않던가. 게다가 지크가 보여준 강력한 무력은 오로지 실력으로써만 세상을 살아가는 용병들에게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틸과 맥스는 개인적으로 친분까지 있었다. 맥스는 지크와 의기투합해 친한 친구로서 지냈고 틸은 지크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설마 그놈이 진짜 귀족일 줄이야.”
맥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은 귀족 같은 곱상한 핏줄이랑은 완전 딴판인 놈인데. 차라리 우리 같은 용병 놈들이랑 죽이 맞는 놈이잖수. 그것도 우리 늑대의 송곳니 같은, 그나마 신뢰와 실적을 움직이는 용병단도 아니고 그냥 저 진창바닥에서 막 굴러먹던 놈 말이우.”
“귀족 출신이라는데 그렇게 막말을 해도 되는 거냐?”
“흥! 그놈이 고작 이런 걸로 뭐라 할 놈은 아니지. 오히려 자기도 동의하며 깔깔댈걸?”
맥스가 말한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걸 아는 틸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괜찮수?”
“뭐가 말이냐?”
“나야 다시 지크 놈이랑 술 한잔하면서 싸운다면야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단장은 아니지 않수. 정말로 스틸월 백작가와 계약을 맺어도 되는 거요?”
그저 명령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맥스와는 달리 틸은 늑대의 송곳니의 단장이다. 여러 가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면서 많이 들었잖수, 백작가의 소문. 솔직히 평은 그다지 좋지 않던데.”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이미 스틸월 백작가가 밸리드의 주구라는 소문은 주변에 쫙 깔려 있었다. 당연히 그건 늑대의 송곳니의 용병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아무리 다른 용병단과는 차별화된 용병단이라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용병들이다. 미신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 많았고, 그런 자들에게 밸리드와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 고용주는 최악이었다.
솔직히 아직까지 단 한 명도 도망친 용병이 없다는 것에서 틸에 대한 용병들의 신뢰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거야 그 사건 이후로 불한당 같은 놈들을 전부 내쫓은 덕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게 틸의 통솔력을 저평가할 만한 요소는 아니었다.
“지크 씨가 보낸 편지에서는 절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 사람, 분명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였지?”
“그랬었죠. 지금도 믿기진 않지만.”
성기사라면 반짝거리는 검과 방패, 갑옷을 입은 채 신을 향한 기도를 외우는 고결한 무언가를 상상하던 맥스에게, 아무리 ‘명예’라는 사족이 붙긴 했다지만 그 지크가 카르위먼의 성기사라는 데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관해서는 틸도 맥스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감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명예 성기사인 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행동이 거칠 뿐, 분명 행동은 명예 성기사라는 이름에 어긋나지 않았고.”
“그건 그렇죠.”
도시를 지키기 위해 물밀듯이 몰려오는 몬스터 대군을 상대로 검 한 자루 들고 날뛰는 지크의 모습은 확실히 성기사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스틸월이 밸리드의 주구가 아니더라도 다른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근데 지금 돌아가는 꼴 보면 전력도 스틸월 백작가가 떨어지잖수.”
용병은 돈을 보고 움직이지만, 그들도 인간인 이상 가장 중요한 건 목숨이다. 그리고 전력이 약한 세력에 고용되는 건 그 목숨에 대한 위협을 증가시킨다. 물론 그만큼 돈은 되지만.
“약한 전력은 우리가 메우면 된다.”
“그거야 뭐.”
얼핏 보면 광오한 말이었지만 늑대의 송곳니는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집단이다. 특히 단장인 틸의 능력은 극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나라 대 나라의 대규모 전면전이 된다면 아무리 틸과 늑대의 송곳니 단원 개개인의 힘이 강하다 해도 지금처럼 ‘약한 전력은 우리가 메우면 된다’ 운운은 하지 못할 테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앞으로 펼쳐질 전쟁은 영지 몇 개가 연합해 충돌하는 규모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정도면 늑대의 송곳니는 충분히 유의미한 전력이 된다.
“게다가 그 지크 씨가 있는 세력이다. 쉽게 지리라 생각하나?”
“전혀요.”
지크의 힘을 떠올려 본 맥스는 망설임 없이 부정할 수 있었다.
‘특히 몬스터 침공 후반에 보여준 그 힘은….’
맥스는 절로 침이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특수한 수법으로 잠시간만 낼 수 있는 힘이라고 했었지만, 그때의 힘은 정말로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너나 나같이 무식하게 힘만 센 게 아니라 머리까지 좋은 사람이다. 당연히 무슨 생각이 있겠지.”
늑대의 송곳니라는 어엿한 용병단을 이끄는 틸 또한 그리 머리가 나쁜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크에 비하면 내세우기 부끄러울 정도다. 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맥스는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단장은 모르지만 나는 그럭저럭 똑똑….”
“헛소리하지 말고 앞이나 봐라. 곧 도착한다.”
저 머리까지 근육으로 꽉 찬 부하의 헛소리를 틸은 무시했다. 맥스는 투덜거렸지만 자기도 조금 무리수라고 생각했었는지 입을 꽉 다물었다.
부하의 입을 닫게 한 틸은 무뚝뚝하게 전면을 쳐다봤다. 저 멀리 어렴풋이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벽이다!”
“비올사야!
“으하! 이제 이 빌어먹을 비를 피할 수 있겠구나!”
“술! 술이다! 맥주든 뭐든 일단 가장 먼저 구할 수 있는 것부터 입에 처넣어야지!”
“바로 침대에서 눈부터 감을 거야!”
말은 안 해도 빗속 행군이 꽤 고단했는지 비올사의 성벽을 본 용병들이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은 소동은 용병단이 마치 호위하고 있는 것처럼 둘러싸고 있는 마차 안까지 전해졌다.
“으음, 도착했어?”
마차의 창문이 열리고 틸의 아들인 윌터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그래, 거의 도착했어.”
맥스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러며 소란을 떨어 윌터를 깨운 용병들을 노려봤다. 용병들은 부단장의 매서운 눈초리에 입을 꾹 닫고 시선을 피한 채 딴청을 피웠다.
“엘리는 뭐 하니?”
틸이 묻자 윌터는 마차 안을 잠깐 보더니 대답했다.
“아직 자.”
“그래. 너도 좀 더 자려무나.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
“응.”
윌터는 창문을 닫고 들어갔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거요? 이번에도 숙소에 맡길 거요?”
“아니. 지크가 백작가 안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준다더군.”
맥스가 놀란 눈초리로 틸을 봤다.
“백작가? 내가 아는 그 단어가 맞는 거요? 스틸월 백작가?”
“그래.”
“…이제 좀 그 녀석이 귀족같이 들리는데.”
설마 아이들을 귀족가에서 돌보게 해준다고 할 줄은 몰랐다.
“뭐, 그렇게 됐으니 이번 전쟁 때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는….”
틸이 말을 하다 말고 옆을 쳐다봤다. 맥스도 마찬가지. 그리고 차츰차츰 다른 용병들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이 걷는 길 옆으로 또 하나의 길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걸어온 길과 다른 지역으로부터 뻗어온 길로 조금 앞에서 완만하게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그 다른 지역으로부터 뻗어온 길에서 한 명의 사람이 걸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 때문인지 그는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용병단도 그리 다를 바 없는 복장이니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수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누가 보도 그 로브는 용병단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용병들의 손이 슬쩍 자신의 무기 쪽으로 움직였다. 상대의 정체를 확실히 모르는 만큼 바로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진 않았지만, 상대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 싶으면 바로 무기를 뽑을 생각이었다.
틸은 다가오는 자를 자세히 살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닌 틸이라도 로브를 관통하고 투시를 하는 능력은 없어 상대의 정체를 몰랐다. 하지만 움직일 때 언뜻언뜻 로브 위로 드러나는 몸의 형태를 보면 상대는 여성이 분명했다.
무장은 어깨에 걸치고 있는 활 하나. 하지만 로브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우리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지?”
“아마도 그러지 않겠수?”
“무슨 일일까?”
“글쎄. 적어도 반해서 오는 건 아니겠지. 우리 애들 얼굴 생각하면 말이요.”
“그건 그래.”
맥스의 의견에 틸은 두말없이 찬동했다.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을 빤히 보고 있었다.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도 어느새 걸음을 멈췄다.
“우리에게 뭔가 용건이 있습니까?”
맥스가 나서서 로브에게 질문을 던졌다. 얼굴의 흉터가 꿈틀대며, 심약한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이 완성됐다.
하지만 상대는 별 동요가 없었다.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은 조금 더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맥스의 얼굴은 그들이 상대를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였다. 맥스 본인은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당신들, 지금 지크라고 했지?”
예상대로 로브 안에서 나온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내용만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음, 그렇긴 합니다만.”
굳이 숨길 건 없다는 판단하에 대답을 해주긴 했지만, 맥스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분명 그들이 대화를 나눌 때 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저자는 없었다. 혹 바람을 타고 소리가 흘렀나 의심해봐도 지금처럼 폭우가 쏟아질 때는 무리다.
물론 마력을 사용하면 충분히 엿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작정하고 엿들었다는 소리가 된다.
“남의 말을 엿듣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군요.”
상대가 악의를 가졌을 확률이 조금 더 커졌다. 맥스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혀,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을 더더욱 무섭게 만들며 말했다. 아니, 위압했다.
그러나 그 위압도 상대에겐 통하지 않았다.
“불쾌하게 한 건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엿들은 건 아냐. 그냥 들린 거지.”
“그냥 들렸다? 적어도 우리는 이야기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댁이 무심코 목소리가 흘러들어 갈 정도로 가까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냥 우연히 들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
로브는 한숨을 한 번 푹 내쉬었다.
“뭐, 이쯤 왔으면 상관없나.”
그렇게 한 번 중얼거리더니 그녀가 로브를 젖혔다. 로브 안에 숨겨져 있던 긴 머리카락이 공중에 흩날렸다가 내려앉았다.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은 무척이나 놀랐다. 로브 안에서 등장한 여성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던 게 첫 번째 이유. 그리고 머리 양옆에서 머리카락을 뚫고 길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귀가 두 번째 이유였다.
“…엘프?”
한 용병이 중얼거렸다.
“봤지? 인간은 모르겠지만 그 정도 거리에서 하는 목소리는 우리한텐 다 들려.”
“아, 네….”
맥스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본 엘프에 적잖이 당황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반응이 익숙한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너희들도 지크를 알고 있단 거지?”
“네? 아, 네. 지크라는 인물이라면 한 명 알고 있습니다만.”
처음 보는 엘프란 종족에 당황한 맥스가 저도 모르게 꼬박꼬박 대답을 해줬다.
“그게 스틸월 백작가 출신인 지크야?”
“그렇습니다만. 혹시 엘프님도 녀석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하지. 내 친구인걸.”
그녀,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