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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89화 (489/628)

제489화

지크란 이름이 나오자 백작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지크의 부탁이라고 하셨소?”

“네. 얼마 전에 저희 후작가로 지크 님이 편지 한 통을 보내셨습니다. 스틸월 백작가는 밸리드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말과 함께, 여유가 있다면 백작가에 도움을 달라고 말입니다.”

지크가 루즈 후작가의 일에 큰 도움을 줬다는 것은 알고 있다. 왕국의 수도에서 그가 직접 이블린 루즈의 누명을 벗기는 걸 보지 않았던가.

때문에 지크의 부탁으로 그들이 왔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영지의 사정상, 그들의 도움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굳어지려는 얼굴을 지금까지 익혀 뒀던 귀족 특유의 가면으로 황급히 덮는다. 아무리 거친 성정을 가진 백작이라지만 그래도 귀족은 귀족. 속마음을 숨기고 대화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하나, 지크라는 이름 하나가 던지는 파급력은, 적어도 백작에겐 정말로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껏 지원을 해준다는 상대방에게 표현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소이까?”

백작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으로는 당연히 이 화제가 빨리 끝났으면 했다. 하나, 아무래도 상대방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요! 작게는 저희 공녀님을 구하셨고, 크게는 루즈 후작가의 명예를 되찾아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도움을 청하셨는데 그걸 두고 볼 리 있겠습니까. 그건 루즈 후작가의 이름을 욕보이게 되는 일이죠.”

“그렇군.”

백작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급한 순간에 기껏 도움을 주겠다고 찾아온 사람의 말을 듣기 싫다고 할 수도 없다.

다행히 지크에 대한 찬사는 거기서 끝이었다.

“당장 전쟁에 쓸 물자부터 가져왔습니다. 상당히 쪼들린다고 하셨죠.”

“안타깝게도 그렇소.”

스틸월 백작가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건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상인들도 그랬다. 물론 신분의 차이가 있는 만큼 대놓고 거래를 끊으려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최대한 거래를 자제하려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전쟁 준비를 하는 백작가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치명적인 일이었다.

돈과 권력으로 어떻게든 물자를 끌어모으고는 있었지만 손에 들어오는 건 필요량보다 훨씬 적었다.

“일단 1차로 가져온 물자들을 바깥에 쌓아 놨습니다. 정확한 수량은 여기 적어 뒀으니, 나중에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루즈 후작가의 관리가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백작은 그걸 받아 펴봤다. 상당한 양의 물자가 적혀 있었다.

“정말로 고맙소. 이걸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것 같소이다.”

“이번 물자는 급한 대로 보낸 것이고, 앞으로 더욱 많이 올 겁니다.”

“루즈 후작가에서 이 정도로 우리를 도와주실 줄은 몰랐소만.”

이미 보내준 물자만도 상당한데 여기서 더 보내주겠다니. 아무리 루즈 후작가가 지크에게 빚이 있다지만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설명을 못 드렸군요. 지금 드린 물자는 저희 루즈 후작가에서만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루즈 후작가에서만 제공하는 게 아니다?”

“저희 공녀님께서 이번에 이웃 왕국의 드라큘 백작님과 약혼을 한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 루즈와 그녀의 전 약혼자인 알버스 윈플의 파혼은 무척이나 유명한 일이었다. 왕세자의 암살 미수와 궁전에서의 전투 등, 가십으로 삼기 너무도 좋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블린의 새로운 약혼 소식에 왕국 귀족들은 제법 관심을 기울였었다. 그 소식은 당연히 백작의 귀에도 들어왔었다.

“드라큘 백작님도 지크 님을 돕겠다며 상당한 양의 지원금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왜….”

드라큘 백작을 보긴커녕 그 존재에 대해서도 스치듯 들어본 게 전부인 백작은 떨떠름했다.

“혹시 루즈 후작께서 힘을 써주신 거요?”

루즈 후작의 사위가 되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일면식도 없는 상대가 자신들을 도와줄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관리가 말해준 이유는 무척이나 뜻밖이었다.

“드라큘 백작가도 지크 님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의 드라큘 백작님이 백작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지크 님 덕이라더군요. 그리고 드라큘 백작님과 저희 공녀님이 인연을 맺을 수 있던 것도 지크 님의 덕이 크고요. 그래서 드라큘 백작님이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백작의 머리가 띵해졌다. 설마 여기서 또 다시 지크의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백작의 상태를 모르는 듯 관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생각 같아서는 병사도 파견하고 싶어 하신 백작님입니다만, 드라큘 백작가의 사정상 병력 동원은 힘든 모양입니다. 하지만 물적 지원은 충분히 하신다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나중에 드라큘 백작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군.”

백작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 윈플 후작가에서도 지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관리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가라앉았다. 윈플 후작가의 알버스 윈플이 이블린과 루즈 후작가에 뭘 하려 했는지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예전의 그 음모가 철저하게 알버스 윈플 혼자만의 것이었기에 루즈 후작가가 막대한 보상을 받은 후로 두 가문은 껄끄럽게나마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 가문도 지크 님이 아니었다면 알버스 윈플 그 개자식에게 완전히 놀아났을 터이니, 상당한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특히 추락한 명예와 지금 후계자의 위치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죠.”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지만, 윈플 후작가에 그런 여유가 있소?”

로브 놈들에 의해 알버스를 제외한 후계자가 전멸했던 윈플 후작가다. 겨우겨우 먼 친척 한 명을 구해 후계자로 내세웠지만 그 자리가 탄탄할 리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지원을 해주려는 것일 겁니다. 지크 님은 윈플 후작가에게도 은인이 아닙니까? 후작님을 몸져눕게 만든 놈들과 손을 잡은 패륜아가 후작가를 차지하려는 걸 막아 주셨으니까요. 그걸 생각하면 새로운 윈플 공자님이 지크 님을 지원하는 건 분명 그분께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은혜를 갚음으로서 부족한 정통성을 채울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스틸월 백작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혹 직접적인 파병도 가능하겠소?”

물자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됐지만, 아무래도 직접 병력을 보내주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일도 없다. 전쟁이란 건 머릿수도 중요하니까. 그리고 지금 스틸월 백작가의 병력은 적보다 분명히 적었다.

“일단 저희는 그럴 생각입니다. 후작님께서 적절한 파병 규모를 판단하고 계시니까요. 윈플 후작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들도 파병을 할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합니다.”

백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하오! 우리 스틸월 백작가는 루즈 후작가의 도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백작은 관리에게 루즈 후작가의 관대함을 몇 번이나 더 칭송한 후에 방에서 내보냈다. 루즈 후작가로 돌아가기 전 하루를 묵게 된 관리에게 일절의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를 취한 건 당연했다.

그렇게 관리와의 만남이 끝나고 백작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트레얼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고맙네, 트레얼.”

안 그래도 목이 마르던 참이다. 백작은 찻잔을 받아 들고는 목을 축였다. 오랜 세월 백작을 모신 경험이 어디 가진 않아 차는 딱 백작이 좋아하는 정도로 우려내져 있었다.

트레얼은 백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좋은 이야기가 있었나 봅니다.”

“좋은 이야기였지. 루즈 후작가와 윈플 후작가가 우리를 지원해 준다는 소식이었으니까. 아, 옆 나라의 드라큘 백작가도 그렇고.”

“드라큘 백작가? 옆 나라의 백작가가 어째서 우리를 도와준다는 겁니까?”

도움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그 이유가 궁금했다. 백작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말하기 힘든 듯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한숨을 한 번 내뱉고는 말을 했다.

“지크에게 받은 은혜가 있다더군.”

“도련님에게서요?”

“그것뿐만이 아니야.”

한 번 입을 떼니 그 다음부터는 쉬운 듯, 백작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루즈 후작가도 지크 녀석의 편지를 받고 도움을 주러 온 것 같아.”

“루즈 후작가도 말입니까? 그럼 설마 윈플 후작가도 그렇습니까?”

“그래.”

백작은 찻잔 안으로 시선을 내렸다. 찻물 위로 착잡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백작가와 인연이 있는 자들은 이번 사건에 관련되는 걸 노골적으로 꺼려하는데, 꼴 보기 싫어 반쯤 내쫓다시피 한 지크와 인연이 있는 자들이 오히려 백작가를 도우려 하고 있다.

백작의 심경을 이해한 트레얼도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백작의 심경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어쨌든 예전보다 불리함은 줄어들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 편을 들어주는 자들이 늘어난다면 관망하는 다른 자들도 생각을 고쳐먹을 거야.”

물론 이 이상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자들이 늘어날 거란 보장은 없다. 아니, 아마도 이 인원이 마지막 지원군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백작도 트레얼도 그에 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물자에 숨통이 트였으니 이젠 병력만 조금 더 충원한다면 해볼 만할 게야. 용병들과의 고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역시 모자란 병력을 급하게 충원하는 데 있어 가장 좋은 건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스틸월 백작가는 그조차 수월하지 않았다.

“쉽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용병 일을 하는 자들은 미신을 믿는 경향이 강하지 않습니까.”

항상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일을 하는 용병들인 만큼 당연히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지금 스틸월 영지는 밸리드라는, 용병들이 굉장히 기피하는 존재와 엮여 버렸다.

“그래도 최대한 고용을 해보게. 이번 지원으로 자금에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금액을 조금 더 높여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접촉해보죠.”

하지만 그런다고 용병들이 스틸월에 가담할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 트레얼은 백작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일어섰다.

‘어디 생각도 못 한 지원군이 나타나는 일은 없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헛된 희망. 당장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트레얼은 방에서 나왔다.

* * *

스틸월 백작령에 내리는 비는 여전히 굵고 거셌다. 간간이 거칠어지는 바람이 빗방울을 더욱 난폭하게 만든다. 자연히 가도에는 사람의 인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빗줄기를 뚫고 움직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우기라고 해서 각오는 했었지만 이거 생각보다 더 거셉니다.”

비를 피하기 위한 로브를 입고 무리 앞쪽에서 말을 몰고 있던 사람이 뒤를 보며 말했다. 그곳엔 역시 로브를 입은 자가 말을 몰아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비올사니, 곧 비를 피하고 몸을 녹일 수 있을 거다.”

“그것만이 희망이요.”

잠시 투덜거리던, 앞서 있던 자가 곧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곧 지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쁜 기분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뒤의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틸 단장?”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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