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88화 (488/628)
  • 제488화

    “혹시 지크 님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도….”

    “그것만이 이유는 아닙니다만, 이유 중 하나인 것도 분명하군요.”

    와이그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우르원 루스 같은 고위층 배신자에, 명예 성기사라고 뽑은 자도 그런 놈이라니. 우리 카르위먼은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건가.”

    “아뇨, 차라리 잘됐어요.”

    아직 당황 어린 감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루벨라는 침착하게 말했다.

    “한탄한다고 해도 카르위먼의 썩은 부분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당연히 도려내야 할 텐데, 지금 우리에겐 지크 님이라는 도움을 주실 분이 있잖아요.”

    “그도 그렇군요.”

    아무리 어둡기 그지없는 현실이라도, 바보처럼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진실을 마주 보는 게 낫다.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크 님.”

    와이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그 불꽃이 노리는 적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물론이죠. 정보를 얻으면 바로 알려드리죠.”

    지크는 열심히 라일라에게 경유지의 조작법을 알려주고 있을 공주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당장 움직이는 건 추천드리지 못합니다. 뚜렷한 증거는 없으니까요. 솔직히 두 분께서 제 말을 의심 없이 믿어주시는 것에도 상당히 놀라는 중입니다.”

    “그만큼 지크 님이 행하신 위업이 대단하다는 뜻이죠.”

    “카르위먼 최강의 성기사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쨌든, 카르위먼의 썩은 부분을 잘라내고 싶으시다면 바로 움직일 준비만 비밀리에 해놓으세요. 아마 이번 전쟁이 끝날 때면 모든 것이 드러날 테니까요.”

    그리고 그걸로 카르위먼에 대한 그렌의 영향력은 끝장날 것이다.

    ‘팔이든 다리든 손가락이든 발가락이든 전부 하나하나 해체해 버려야지.’

    지크는 일그러질 그렌의 표정을 생각하며 느긋하게 찻잔을 입에 갖다 댔다.

    “그러죠. 우르원 루스, 그자에 대해서도 은근슬쩍 감시를 해 보겠습니다. 이번 일을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 한다면 뭔가 움직임이 있을 테니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회귀 전에는 카르위먼이 그렌의 말에 휘둘려 스틸월 토벌전에 합류했었기에, 카르위먼이 중립을 표방한 지금, 루스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는 몰랐다. 때문에 루스가 어떻게 움직일지 감시하겠다는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럼 오늘 자리는 이것으로 끝내죠. 저도 할 일이 있거든요.”

    남은 차를 일거에 들이켠 지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놈들이 이번 전쟁으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절대로요.”

    웃는 지크의 입 안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반짝였다.

    * * *

    지크는 루벨라, 와이그와 헤어져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라일라와 공주의 모습을 확인하거나 자신이 뿌린 씨앗의 상태를 보는 등 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마구간으로 걷는 지크의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지크 씨!”

    그렌 제너드였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초조함을 어떻게든 억누르고 있는 기색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지크는 무척이나 느긋했다.

    “제너드 씨가 아닙니까. 무슨 일이시죠? 혹시 아까 회의에 관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래봤자 교황께서 이미 말씀을 주신 일이니 우리가 여기서 뭐라 얘기해봤….”

    “그딴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딴 것이라….’

    그 말은 그렌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었다. 증오스러운 지크의 가문을 끝장낼 수 있는 일대의 사건이다. 그렌이라면 기대에 몇 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데, 그런 사건에 제동을 건 회의를 ‘그딴 것’이라고 칭하다니.

    그만큼 그렌의 심정을 뒤흔든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크는 그게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 무슨 용건입니까.”

    “도시 제물의 의식을 방해하는 방법을 제공하셨다죠?”

    역시였다. 지크는 조금 과장되게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더러운 밸리드의 협잡질을 방해하는 데 한 손 거들 수 있어서 무척이나 보람 있었죠.”

    “어디서 얻은 방법입니까!”

    그렌이 한 걸음 더 다가와, 마치 잡아먹을 듯 지크에게 물었다. 지크는 그렌이 다가온 만큼 물러났다. 이성애자인 지크는 당연히 그렌의 밀착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혹 자신이 동성애자였다 하더라도 그렌만은 딱 잘라 사양이었다.

    “우연찮게 어떤 이에게 얻었죠. 한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분명 그렌의 태도는 무례한 것이었다. 다짜고짜 정보를 토해내라고 다그치는 모습이었으니.

    평소라면 그따위 태도를 보여준다면 어제 저녁으로 먹은 요리 같은 지극히 사소한 정보라도 일절 줄 수 없다며 버팅길 지크는, 이번만은 무척이나 상냥한 어조로 대답을 해 줬다.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적이 죽는 걸 보고 울어줄 수 있을 만큼요.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기도 했죠.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어떤 이를 진심으로 믿고 따랐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건 그런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기껏 설명해 줬더니 갑자기 화를 낸다. 그러나 지크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소를 참아내는 것만이 힘들 뿐이었다.

    “그럼 어떤 정보를 원하는 겁니까?”

    “그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원합니다! 이름, 국적, 성별, 거주지 등등! 뭐라도 좋습니다!”

    확실히 애가 타긴 탔나보다. 돌려 말하거나 다른 명분을 갖다 대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크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한 마디를 해줬을 뿐이다.

    “싫습니다.”

    뒤따를 병신, 등신, ‘그걸 내가 알려주겠냐’ 같은 부연설명을 생략하느라 무진장 애를 써야 했다.

    다급해하던 그렌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렌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저랑 장난하시는 겁니까?”

    “장난은 당신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갑자기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정보를 토해내라고 하다니. 설마 앞으로 있을 전쟁을 여기서 하자는 겁니까?”

    지크가 짐짓 위협스럽게 말하자 그렌이 멈칫했다. 그제야 조금쯤 상황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주변에 사람은 없었지만 여긴 아직 유라스 안이다. 조금 더 크게 소란을 피우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화제상, 그건 그렌에게 그다지 득 될 게 없는 상황이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너무 흥분을 했습니다.”

    “사과는 됐습니다. 그저 제가 좀 급해서 말입니다. 길을 좀 비켜주셨으면 합니다만.”

    “도시 제물의 의식을 방해하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을 가르쳐 주신다면 바로 비켜드리겠습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싫습니다.”

    “정말로 안 되겠습니까?”

    “정말로 안 됩니다. 만약 그 정보가 새어 나가 그분께 밸리드의 마수라도 뻗치면 어떻게 합니까?”

    “입을 철저히 다물겠습니다.”

    ‘퍽이나. 널 믿느니 밸리드 놈들이 앞으로는 불구덩이 옆에다 신전을 짓겠다는 말을 믿겠다.’

    존재 자체가 거짓이나 다름없는 놈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둘 예외를 인정하다 보면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것이 정보라는 것이니까요. 당신이어서가 아니라 전 이 정보를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성녀님과 와이그 님께도 알려드리지 않았는데 당신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루벨라와 와이그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말에 그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크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렌은 옆으로 비켜섰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런 대단한 방법을 만든 사람을 꼭 한번 뵙고 싶어서 말입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이 녀석, 너무 쉽게 물러나는데?’

    혹시 포기한 것일까. 그러나 지크는 그럴 리 없다고 단정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

    뻔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렴풋이 예측이 가기도 했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죠.”

    지크는 그렌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렌은 지크의 등을 빤히 노려봤다.

    ‘어떻게든 그 인간을 찾아야 해!’

    아무리 변수에 변수가 판을 치는 시간대라고 해도 도시 제물의 의식을 막는 방법이 벌써 등장하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그 방법은 그렌이 옆에서 여러 도움을 준 후에나 루벨라가 만드는 방법인 까닭이다.

    ‘그러고 보니 지크 모어를 변화시킨 변수가 있다 했었지.’

    혹시 그 인간이 또 가르쳐준 것일까. 그렌은 상당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역시 저 녀석이 토해내게 만들어야 해.’

    이번 시간선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상황이 아니다.

    ‘마침 잘됐어. 어차피 저 녀석과는 이번 전쟁터에서 만날 테니까.’

    그때 자신의 우월한 힘을 과시하며 녀석을 때려눕힌다. 그리고 정보를 토해내게 만들면 된다.

    ‘어차피 녀석을 마지막으로 쓰러뜨릴 제물로 만드는 건 실패했다. 더 이상 두고 볼 이유는 없어.’

    무엇보다 자신을 제치고 주변에서 용사 취급을 받는 것이 짜증 났다. 용사는 바로 자신인데도. 아무리 실패한 시간선이라지만 세상에 존경받는 용사는 자신뿐이어야 했다.

    ‘이번에 제거한다.’

    그렌의 눈에 살기가 스며들었다.

    * * *

    지크가 한창 유라스에서 그렌의 같잖은 계획을 파투내고 있을 무렵, 스틸월 영지도 착실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세력들이 스틸월 백작가에 한 발 거리를 두고 있는 만큼 그 준비는 수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즈음, 스틸월 백작가를 한 명의 사람이 찾아왔다.

    “루즈 후작가에서 오셨다고 하셨소?”

    스틸월 백작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그렇습니다.”

    사내는 백작의 앞에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백작은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웬만큼 인연이 있는 곳마저 스틸월 백작과 거리를 두고 있는 만큼, 루즈 후작가와 같은 고위 귀족이 자신들을 찾아오는 상황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기대를 품었다.

    “그래, 루즈 후작께서 무슨 일로 그대를 보내셨소?”

    “스틸월 백작가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우리 스틸월은 끄떡없다고 큰소리를 치고 싶은 마음이오만, 지금은 허세를 부릴 여유조차 없소. 맞소이다. 지금 상당히 위기 상황이지.”

    이미 플로드 백작가는 주변 영지들과 연합하여 상당한 군세를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틸월 백작가는 아무래도 자신의 힘만으로 적을 상대해야 했다.

    “역시 그러시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루즈 후작가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리에 상당한 기대감을 품고 있소이다. 혹시 우리를 지원해 주려는 것이오?”

    미사여구를 완전히 뺀 직접적인 말. 기대를 품고 있지만 그만큼 불안감도 가지고 있다. 혹 다른 일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백작에게 무척이나 다행히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리 루즈 후작가는 백작가에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 오오! 정말로 그렇소이까!”

    백작이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껴안기라도 할 기세였다.

    “루즈 후작께서는 누가 봐도 외국의 음모임이 분명한 일에 왕국 전체가 놀아나는 듯하여 무척이나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같은 왕국의 일원으로서 백작가를 도와야지요.”

    그리고 사내는 말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우리 후작가의 은인이신 지크 님께서 직접적으로 부탁을 하신 일이니, 이 정도 지원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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