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화
지크의 알아낼 수 있다는 말에 와이그고 루벨라고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음, 지크 님. 혹시 정보의 출처를 알 수 있나요?”
루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역시였다.
카르위먼 내부에서 나름 상층부라 할 수 있는 직위에 있는 우르원 루스가 밸리드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식은 무척이나 심각한 정보였지만, 그만큼 굉장한 정보이기도 했다. 감히 카르위먼 내에 스파이를 심어두려던 밸리드의 시도를 무참히 찍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지금껏 지크의 말을 굉장히 신뢰해 온 두 사람이지만 이번 정보만큼은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스틸월 백작이 밸리드의 주구라는 의혹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루스의 경우와 따지자면 아득히 루스 쪽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지크가 정보의 출처 같은 것을 말해줬다면 정보의 신뢰도가 급격히 올라가겠지만 이번에도 지크는 정보의 출처를 말하는 걸 거부했다.
카르위먼 상층부에 있는 밸리드의 스파이. 이 심각한 사실을 지금까지처럼 받아들여야 하는지 와이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전 믿어요.”
의혹을 떨쳐낸 결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와이그가 당황해 옆을 쳐다봤다.
“루벨라 님?”
루벨라가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지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무턱대고 믿어도 괜찮습니까?”
지크조차 루벨라의 전적인 믿음이 의외인지 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벨라가 미소 지었다.
“지크 님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적잖이 놀라는 중이거든요.”
지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루벨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아까 회의에서 말씀드렸죠. 지크 님은 실적이 있다고요. 스파이의 존재가 충격적이라곤 하나, 솔직히 도시 제물의 의식 방해 방법이나 밸리드 북부 지부의 정보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어요. 하지만 지크 님은 그걸 사실로서 증명해 주셨죠. 그거면 충분해요.”
“만약 제가 틀렸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거야 책임을 지면 될 일이죠. 심해야 성녀 자리에서 쫓겨나기밖에 더 하겠어요?”
“루벨라 님!”
“진정하세요, 와이그 님. 솔직히 저한테 성녀란 자리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요. 카르나 님과 세계를 위한 일은 성녀란 직위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이라면 우린 카르위먼 내의 벌레를 짓밟아버릴 수 있다는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어요. 실패해도 제가 별 가치 없는 성녀란 껍데기 하나 잃어버리는 것뿐이죠. 이 정도로 이득과 손해가 차이가 나는데 어찌 믿지 않을까요.”
성녀란 직위에 목매는 첼시가 들었다면 제정신이냐고 발작할 말을, 루벨라는 태연히 내뱉었다.
‘대단하군.’
천하의 지크도 순수하게 루벨라에게 감탄했다. 카르위먼의 얼굴인 성녀란 직위를 저렇게 하찮게 취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그렇기에 성녀에 어울리는지도 모르지.’
“…예전부터 말씀드렸지만, 성녀님의 그 태도야말로 성녀님이 진정으로 그 자리에 어울린다는 증거입니다.”
감탄과 곤혹이 반쯤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와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이미 지크 님은 우수한 실적으로 우리의 믿음에 보답한 적이 있습니다. 우르원 루스가 밸리드의 주구라는 사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루스에 대한 공경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도 루스를 철저하게 배신자로 대하겠다는 표현이었다.
“지크 님. 그렇다면 그 배신자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 움직이게 될까요.”
와이그가 적극적으로 물어 왔다.
“일단 이 전쟁에서 어떻게든 공을 세우려 들 겁니다. 조금 무리수를 둬 가면서요.”
“교황께서 나서서 중립을 표하기로 한 겁니다. 녀석이 정말로 대신관, 나아가서 교황을 노리고 있다면 교황께서 하신 말씀을 대놓고 어기려 할까요?”
“분명 교황의 말씀도 중요하겠지만, 카르위먼 내에서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밸리드의 토벌 아닙니까. 녀석이 토벌한 것이 밸리드의 중요한 세력이라면 용서는 당연하고 그 공적까지 인정받겠죠.”
“하지만 교황께서 하신 말씀도 중요합니다. 보통 중요한 세력을 토벌한 정도로는 되지 않습니다.”
“‘밸리드의 새로운 북부 지부 성립 시도 좌절’이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밸리드 북부 지부. 트리슬로와 추기경이 괜히 지크가 관심을 기울이던 소년 한 명을 잘못 건드렸다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곳이다. 그러나 그 계기를 들으면 백이면 백 어처구니없어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와이그는 인정했다. 교황이 앞장서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루스의 공적을 인정할 만큼 충분한 위업이다.
“지크 님은 이번 스틸월 백작가 사태가 밸리드 북부 지부 성립으로 조작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성녀님.”
“응? 그럼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말씀을 잘못 드렸군요. 제가 부정한 건 밸리드 북부 지부 성립 쪽이 아닙니다. 바로 조작 쪽이죠.”
루벨라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은, 이번 사건이 새로운 북부 지부 성립을 위한 것은 맞는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 이해가 따라가지 않는데요. 이번 사태가 새로운 북부 지부 성립을 위한 것이라면, 배신자인 우르원 루스는 어째서 그걸 막으려는 거죠?”
“이번 사태는 스틸월 백작령을 포함해 주변 영지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사건인 만큼, 여기에 걸린 목적도 꽤 많습니다.”
지크는 손가락 하나를 폈다.
“일단 하나는 말씀드렸다시피 공적을 세우기 위한 것. 그렌 제너드, 우르원 루스 등등 밸리드의 새로운 북부 지부 성립을 막아 자신들의 이름값을 키우기 위한 것이죠. 스틸월만 쓰러뜨리면 조작 정도는 어려울 것 없을 겁니다. 밸리드와 관련이 있는 놈들인 만큼, 그와 관련된 조작을 하기 무척 쉽겠죠.”
지크는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다른 하나는 말씀대로 새로운 북부 지부 성립을 위한 것이죠. 주변에 거대한 물이 필요한 밸리드 놈들의 신전 특성상, 신전의 위치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들킬 확률도 높고요. 그렇기 때문에 북부 지부의 재건은 놈들에게도 꽤 골치가 아픈 일일 겁니다.”
“그렇겠죠. 물이 많은 데다가 신전을 짓기 적합한 지역은 우리 카르위먼이 눈에 불을 켜고 샅샅이 뒤지고 있으니까요.”
소규모 신전이라면 모를까, 북부 지부 정도의 대신전이라면 아무래도 눈에 띄기 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들이 북부 지부 재건 시도를 하려 하지 않을 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놈들은 이번 사건을 이용하기로 한 거죠.”
“어떻게 말입니까?”
“피네 자작가를 기억하시죠?”
“물론이죠. 이번 전쟁의 시작을 알린 자들 아닙니까.”
대부분 이번 전쟁의 두 주체를 스틸월 백작가 대 플로드 백작가로 알고 있지만, 엄연히 이 전쟁의 시작을 알린 건 피네 자작가였다.
“그놈들이 밸리드의 주구입니다.”
대체 몇 번이나 놀라는 것일까. 와이그와 루벨라는 반쯤 입을 벌렸다.
“…정말로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그 정보의 출처를 알려주실 마음이 정말 없으십니까.”
지크가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궁금했다. 밸리드에 관해서는 세계에서도 가장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카르위먼이 흔적조차 잡지 못한 정보를 대체 어떻게 얻는 것일까.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회귀나 공주님에 관한 걸 말해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공주의 정보는 쓸 만했다.
‘설마 내가 밸리드 북부 지부를 쓸어버리는 걸 예측하고 대비를 준비했을 줄이야.’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놈들은 회귀 전, 지크 모어가 밸리드 북부 지부를 쓸어버리는 것을 방관했다. 아마도 그게 지크의 컨트롤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나 소멸한 지부를 그대로 둘 수도 없으니, 그 대안으로 진행한 게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음모였다.
‘하지만 지금 계획은 원래 시기보다 더 빠르다고 했지.’
지크가 시간선을 마음껏 뒤틀어버린 영향이 나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정보는 분명 사실입니다. 놈들은 피네 자작가의 성 그 자체를 밸리드의 북부 지부로 삼을 셈입니다. 한 나라의 어엿한 귀족가를 의심할 자들은 없겠죠. 문제는 주위에 물이 없다는 건데, 이번 호루스 협곡 붕괴 사건으로 피네 자작가가 받은 피해는 꽤 심합니다. 말 그대로 영주성 근처까지 물이 차오를 정도로 말이죠.”
“밸리드의 신전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가지게 되겠군요.”
“와이그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물론 제 방해 때문에 목표 수위를 채우진 못했습니다만, 그거야 스틸월 영지를 차지한 후에 얼마든지 높일 수 있죠. 협곡을 한 번 더 붕괴시키고, 저번 붕괴의 충격이 이제야 나타났다고 주장하든지 해서 말입니다.”
“정말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상황이군요.”
와이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다른 목적도 있습니까?”
“있죠. 그리고 그게 바로 이 계획이 세워진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애초에 그 목적을 위해 계획을 세우던 중 중간에 끼워 넣어진 것에 불과하죠.”
“그렇게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까?”
“중요하다면 중요하겠죠. 어떤 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니까요.”
아리송한 말이다.
“가능하다면 그것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틸월 백작가가 몰락하길 바라는 자가 있습니다.”
“플로드 백작가를 말하는 겁니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스틸월 백작가와 세대를 거듭하면서 반목해 온 플로드 백작가다. 이번 사건에도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던가.
“당연히 플로드 백작가도 스틸월 백작가가 몰락하길 바라는 세력이긴 합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도 이용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틸월 백작가의 몰락을 바라며 처음부터 움직인 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그렌 제너드입니다.”
다시 한번 나온 그 이름에 와이그는 잠시 침묵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루벨라도 주먹을 콱 쥐었다.
“…그가 스틸월 백작가를 노리는 이유는 뭡니까?”
“제가 싫어서요.”
“네?”
“뭐라고요?”
와이그와 루벨라가 반문했다. 지금 들린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제가 싫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제 가문도 꼴 보기 싫은 거죠. 아무리 절연을 한 상황이라도 말입니다.”
“이, 이런 엄청난 일을 순전히 사람 한 명이 싫어서 계획했다는 말입니까?”
“정말로 대단한 자가 아닙니까.”
지크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루벨라도 와이그도 그 웃음에 동조해줄 수가 없었다.
“두 분은 저와 그렌 제너드가 서로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죽고 죽이려 할 정도는 아니라고도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 둘 사이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감정의 골이 상당히 깊습니다. 상대가 싫다고 상대의 가문을 몰살하려 들 정도로요. 그것도 이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면서 말입니다.”
“이, 이해할 수가 없네요.”
루벨라는 도저히 그렌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 없는 모양이다. 성녀인 그녀도 싫어하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결코 그 가족까지 몰살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것도 이런 대규모 사건을 일으키면서.
“네,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그게 정상입니다.”
지크는 부드럽게 보충했다.
“하지만 그놈은 보통 놈이 아닙니다. 또라이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