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6화
그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가장 먼저 부상한 감정은 당연히 짜증과 분노였다.
그가 준 엄청난 피해들이 생각났다. 그것만으로도 사지를 갈아 물고기들에게 먹이로 주고 싶은 생각이다. 한데, 이번에 녀석은 또 다시 새로운 칼로 자신들을 겨눴다.
‘도시 제물의 의식을 막는 방법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스는 차오르는 경악을 필사적으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충격이 너무도 커서, 결국 얼굴에 티가 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른 이들도 충격을 받은 건 마찬가지였기에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받은 충격과 다른 이들이 받은 충격은 그 방향성이 달랐지만.
간신히 평정심을 부여잡고 일을 모두 마쳤지만 이렇게 혼자 있게 되자 새삼 감정이 들끓었다.
‘포르티에서의 일이 실패했단 건 알았지만, 설마 그딴 방법 때문이었다니!’
무척이나 불쾌한 방법. 이 세상을 지배할 유일한 신, 밸르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일절 없는 빌어먹을 방법이다.
‘이번 일이 끝나면 바로 알아봐야겠어!’
대략적인 이야기는 듣긴 했지만 그가 원하는 건 아주 세밀하고 정확한 정보다. 그래야 뭔가 대처라도 할 것 아닌가.
‘감히 밸르께 바치는 의식을 방해하는 방법을 방치해둘 순 없지!’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제 정말 한 걸음 남았다!’
곧 그는 대신관이 될 것이다. 이미 다음 대신관이 죽는다면 그를 이을 후보로 일컬어지는 자 중 하나가 됐다. 그랬기에 이런 중요한 회의에도 낄 수 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직 도달한 건 아니야.’
목표에는 닿지 않는다.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라는 말은, 결국 그 외에 다른 이들도 있단 뜻이다.
‘역시 공적이 필요해.’
하루라도 빨리 대신관에 오르는 편이 목적에도 이롭다. 게다가 그는 대신관만 노리고 있는 게 아니다.
‘목표는 교황.’
루스는 자기가 교황의 자리에 앉는 모습을 상상했다. 근엄한 모습의 자신에게 성녀와 대신관, 성기사들을 포함해 카르위먼의 모든 자들이 고개를 숙인다. 상상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돋는다.
손에 쥘 권력 때문만이 아니다. 카르위먼에서도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되는 자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일 그 상황 자체가 그에게 극한의 희열을 부여했다.
‘카르위먼의 교황이 위대한 밸르를 섬긴다고는 도저히 생각 못 하겠지.’
자신들을 향한 극독이 자신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알아챌까. 그걸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 한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다.’
독실한 밸리드의 신도로서 카르위먼의 신관으로 위장하는 나날은 당연히 편치 않았다. 무엇보다 고생이었던 점은 밸리드의 기운을 카르위먼의 기운으로 속이는 것. 하지만 특수한 처치에 의해 그는 완벽하게 기운을 속일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밸리드가 카르위먼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의 증명이리라.
물론 무척이나 어렵고 까다로운 방법이라 시행할 수 있는 자는 드물었지만, 루스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런 방법이기에 그가 선택받을 수 있었던 것이니.
‘역시 움직여야겠어.’
카르위먼에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여유는 없다.
‘그놈과 말을 해봐야겠군.’
루스는 그의 공범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괜찮으려나.’
회의가 끝난 후, 그렌의 태도가 걸렸다.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하지만 그의 태도는 확실히 어색했다. 뭔가 혼이 달아난 것 같은 태도.
원래의 그렌이었다면 원래 이 자리에도 처음부터 참석해 있었을 것이다.
‘도시 제물의 의식을 막는 방법이 나왔을 때부터 그다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지.’
하지만 도시 제물의 의식을 막는 방법 때문이라기엔 또 의문이다. 그는 공범자일 뿐, 밸리드의 신도는 아닌 까닭이다.
‘뭐, 됐어.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능력은 있는 놈이니 곧 떨쳐낼 거다.’
자그마치 밸리드의 교황께서 지정해 준 협력자가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껏 그는 상당한 능력을 보여 왔다. 설사 놈이 못 쓰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루스는 이번 전쟁에 참여하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명분은 짜 맞추면 그만이다. 확실한 공적이 있으면 뭐라고 할 순 없겠지.’
물론 아무리 편법을 사용하더라도 교황이 정리한 일을 부정하는 모양새가 될 테니 그다지 좋은 눈초리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교황이나 대신관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은, 카르위먼이라면 무척이나 융통성을 인정해주는 집단과 연관되어 있다.
바로 밸리드.
‘흥! 카르위먼 놈들의 우리 교단에 대한 증오가 도움이 될 때도 다 있군.’
물론 루스로서는 전혀 고맙지 않았다.
‘어쨌든 이번 전쟁에 참여하여 스틸월 백작가를 쓸어버린다. 백작가가 교단과 협력했다는 증거는 스틸월 백작가를 밀어버린 후 교단에서 알아서 조작을 해줄 테니.’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루스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설마 카르위먼 안에서 나 같은 독버섯이 자라고 있는 걸 누가 알겠는가.’
* * *
“카르위먼 내에 배신자가 있습니다.”
같이 차를 마시던 지크가 뜬금없이 내뱉은 발언에 루벨라와 와이그는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일제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지크 님!”
손에 든 찻잔에서 찻물이 넘치는 것도 모른 채 루벨라가 물어왔다. 당장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면 지크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기세였다.
그에 비해 와이그는 침착했다. 그동안 쌓아온 연륜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루벨라처럼 흥분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평소 털털한 모습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모습으로 와이그가 말했다.
“루벨라 님도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그렇게 있다가는 제대로 이야기도 듣지 못합니다.”
“아, 알겠어요.”
“일단 찻잔부터 내려놓으시죠.”
루벨라의 찻잔은 이미 반쯤 비어 있었다. 그중 루벨라의 입으로 들어간 양은 극소수. 대다수는 바닥으로 흘러 떨어졌다. 평소라면 자신의 추태를 부끄러워 할 루벨라도 지금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루벨라가 지크를 바라봤다. 무언의 눈빛이 지크의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카르위먼 내에 배신자가 있습니다. 그것도 밸리드의 신도가 말이죠.”
루벨라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것만큼은 와이그도 침착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카르위먼 내에 배신자가 있다’와 ‘카르위먼 내에 밸리드의 신도가 있다’는 그 의미 자체가 다르다.
“…우선 지크 님. 지금 하신 말씀의 뜻은 알고 하시는 것이겠죠?”
“당연하죠. 조금 전까지 그에 대해서 말들을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까.”
지크가 밸리드의 협력자가 아니냐는 바이너의 말에 회의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이 바로 조금 전이다.
“한데 그런 의심을 받으신 지크 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다라….”
“모양새가 조금 우습기는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입 다물고 있을 수는 또 없지 않습니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인데 말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왕 충격을 받으신 김에 한 마디를 더 하죠.”
“이번엔 또 어떤 말씀을 하실지 두렵군요.”
빈말이 아니라 와이그는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다음에 나온 말은, 와이그에겐 골치 아프게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그렌 제너드는 밸리드의 협력자입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 회의에서 성하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지크 님도 기억하고 계시죠?”
“이를 말입니까. 대충 명예 성기사들이 밸리드 놈들과 협력하지 않는 걸 믿고 있다는 말씀이셨죠.”
“그렇다면 지금 지크 님의 말씀은 교황 성하의 말씀을 전면으로 산산조각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래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픕니다. 교황 성하의 선량한 믿음이 빗나가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말입니다.”
“…후우!”
더 이상은 그동안 쌓아 온 연륜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지 와이그는 거센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젖혔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마음을 다잡던 와이그가 다시 지크에게 시선을 보냈다.
“지크 님의 말씀처럼 충격을 받은 김에 전부 들어야겠습니다. 그럼 배신자는 누굽니까?”
와이그도 루벨라도 긴장에 가득 찬 채 지크의 대답을 기다렸다.
“두 분도 아까 보신 인물입니다. 신관 우르원 루스. 그가 바로 밸리드가 카르위먼의 상층부에 심어 놓은 인물입니다.”
“젠장!”
와이그는 결국 욕지기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우르원 루스가 누구인가. 차기 대신관으로서 지지를 받는 인물이다. 그리고 공적과 경험을 더 세운다면 교황 자리까지 노려볼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한데, 그런 자가 밸리드의 주구라니.
“정말입니까, 지크 님? 농담으로 끝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지크를 무척이나 신뢰하는 와이그로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농담 한번 해 본 것이라고 지크가 말해줬으면 했다.
와이그 본인이 방금 한 말처럼 절대로 농담으로 끝낼 수 있는 말이 아니지만, 이번 한 번만큼은 깔끔하게 용서해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와이그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이런 말을 농담으로 할 리가 없죠. 확실합니다. 우르원 루스는 밸리드의 주구. 기본적으로 대신관을 노리고, 가능하다면 교황의 자리까지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자가 왜 그 자리들을 노리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적대 세력이 스파이를 심는 이유야 뻔했다.
“하, 하지만 지크 님! 그…분이 정말로 밸리드의 신도였다면 저나 다른 분들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어요!”
아직 루스를 밸리드의 주구로 낙인찍을 수는 없는지 루벨라는 그에게 ‘님’이란 호칭을 붙였다. 하지만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지크의 말에 흔들리고 있는 것도 분명했다.
“특수한 처치를 받은 겁니다. 더러운 밸리드의 기운을 카르위먼의 기운으로 덮는 처치를 말이죠.”
“그런 방법이 있다고요!”
루벨라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과 같이 변해 있었다. 정말로 지크가 말한 방법이 있다면 카르위먼으로서는 최악인 것이다. 와이그의 얼굴도 무섭게 굳었다.
“그 방법이 어떤 방법입니까.”
서둘러 와이그가 물어 왔다.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아직은 모릅니다.”
루벨라는 암담함에 빠져들었다. 밸리드 놈들이 카르위먼으로 위장할 수 있는 방법의 정체조차 모르다니.
“해결 방법은요?”
“그것도 아직 모릅니다.”
암담함이 더 깊어졌다. 하지만 공황에 빠진 루벨라와는 달리 와이그는 지크의 말에서 중요한 단어 하나를 포착했다.
“아직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알아낼 수 있단 소리입니까?”
루벨라가 공황에서 벗어났다. 희망 어린 눈길이 지크를 향했다.
그리고 지크는 이번엔 루벨라와 와이그의 희망을 배신하지 않았다.
“네, 알아낼 수 있습니다.”
‘밸리드의 배신자 정보처럼 공주님한테서 빼낼 거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