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5화
바이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누가 봐도 흥분한 상태. 미미하게 근육이 경련하는 것이 당장 지크에게 달려가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작게 남은 인내심이 그의 마지막 행동을 막아섰다.
하지만 직접적인 폭력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는 미약한 인내심이 입과 혀까지 막아줄 수는 없었다. 그가 방금 전보다 조금 더 거친 말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꽈악!
팔뚝에 강한 압력이 걸렸다. 강도 높은 수련으로 단련되어 근육이 튼실히 붙어 있는 팔뚝이건만 상당한 고통이 엄습했다.
바이너가 눈살을 찌푸린 채 팔뚝을 쳐다봤다. 그렌이 딱딱한 얼굴로 그의 팔뚝을 부여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의 말을 막는 행동이다. 그렌이 눈빛만으로 슬쩍 주위를 둘러보라 눈치를 줬다.
바이너는 주변을 돌아봤다. 흥분했던 감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불쾌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지크의 말마따나 지크를 의심하는 건 지크에게 명예 성기사 자격을 내린 카르위먼이 무능하다는 표현을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물며 그 의심이 밸리드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하여 실언을 했습니다.”
바이너가 사방으로 고개를 숙였다. 기사가 취하기엔 비굴하게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럴 만한 잘못을 저질렀으니 어쩔 수 없다.
“바이너경이 저렇게 사과를 하시니 이쯤에서 용서를 해주시면 어떨까요. 혈기 왕성한 나이라 생각도 전에 말이 튀어나온 모양입니다. 우리도 한때 그런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루스가 얼른 바이너를 감쌌다.
“글쎄요. 혈기 왕성한 것도 정도가 있지요.”
“아무리 한창 성질을 다스리지 못할 때도 저런 발언을 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신관들의 불쾌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바이너의 얼굴에 붉은 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창백함만이 남았다.
“아직 경험도 제대로 쌓지 못해 미숙한 자입니다. 모자란 이를 감싸 카르나 님의 은혜가 얼마나 자애로운지 보여주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루스가 대놓고 바이너를 모자란 자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바이너에게 적지 않게 모욕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바이너의 사과와 루스의 보호에 힘입어 일단 사람들은 바이너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를 향한 불쾌한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단 하나는 확실히 하죠.”
조금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와이그가 말을 꺼냈다. 그의 어조와 눈빛도 과히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지크 님이 밸리드와 협력 관계라는 건 일단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로 지크 님이 밸리드의 스파이라면 지금껏 정보를 제공한 이유는 우리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밸리드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밸리드의 북부 지부가 통째로 날아갔어요. 세상에 어떤 세력이 스파이를 잠입시키겠답시고 자신들의 세력 일각을 붕괴시키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밸리드 놈들은 쓰레기 놈들이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멍청한 놈들은 아닙니다. 그 정도로 멍청한 놈들이었다면 우리가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지요. 즉, 지크 님이 밸리드의 협력자란 말은 단적으로 말해 개소리입니다.”
와이그는 그렇게 말하고 바이너를 노려봤다. 개소리란 단어에 욱한 바이너지만 차마 지금 와이그와 눈싸움을 할 순 없었다. 그는 슬쩍 눈을 돌렸다.
“자자! 진정하세요, 와이그 경. 저를 비롯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지크 경과 밸리드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이너 경도 너무 긴장하고 흥분해서 실수를 한 것뿐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 성정을 되도록 빨리 고치는 게 좋을 겁니다. 남들에게 민폐 끼치고 다니기 딱 좋은 성격이니까.”
“당연히 바이너 경도 그럴 겁니다.”
그러며 루스는 바이너를 내보냈다. 그렌도 동의했다. 스틸월을 공격할 증인으로서 그를 불러들였는데 대신관들에게 괜히 악감정만 잔뜩 심은 것이다. 도시 제물의 의식을 방해하는 방법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바이너의 실언에 바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일단 한마디 하겠소.”
바이너가 퇴장한 후 어수선해진 상황에서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교황이 입을 열었다.
“나는 우리 카르위먼이 인정한 명예 성기사가 삿된 믿음에 현혹되지 않을 거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소.”
짧은 말이었지만 교황의 말은 사람들에게 묵직한 압력을 선사했다.“회의를 계속 진행하시오.”
그렇게 말하고 교황은 다시 입을 닫은 채 논의를 지켜봤다.
이후로 얼마간의 의견 교환이 오고 갔다. 양측의 주장은 나름 팽팽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렌의 의견이 점점 밀렸다. 귀족 간의 다툼에 카르위먼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그렌이 증인이라고 데려온 바이너의 탓도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둘째 치고, 그의 증언과 그가 가져온 증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다.
회의가 끝났다. 그에 도출된 결과가 교황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카르위먼은 이번, 스틸월 백작가와 피네 자작가 사이의 일에 대해 지금껏 그래왔던 대로 중립을 지키도록 하겠소.”
지크 쪽의 완벽한 승리였다.
* * *
회의가 끝나고 대신관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업무가 급한 자들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신들의 신전을 향해 출발했지만, 대부분의 대신관들은 잠시 짬을 내어 다른 이들을 만나고 다녔다. 대신관들이 이렇게 모이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건 교류라고 부르기에는 분위기가 무척이나 살벌했다.
루스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젊은 기사를 쳐다봤다. 그는 그나마 자신의 잘못을 아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솔직히 이번 일에는 많이 실망을 했소, 바이너 경.”
“죄, 죄송합니다!”
바이너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루스의 싸늘한 시선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후우!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대를 내치고 싶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화풀이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고개를 드시오.”
“가, 감사합니다!”
그제야 바이너는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대가 저지른 실수는 꽤 커다란 것이오. 대신관들이 그대의 증거와 증언에 신뢰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않았어도….”
그렇다고 카르위먼의 전쟁 참여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그리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크란 존재가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틸월 백작가를 파문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아무래도 파문이 된다면 그들을 도와줄 세력은 더더욱 적어질 것이기 때문.
그러나 그것도 결국 무산되어 버렸다.
루스는 바이너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괜히 이 녀석을 증인으로 내세운 건지도 모르겠어. 그냥 스틸월의 내부 스파이로 써먹는 편이 나았을지도.’
하지만 이미 지크 앞에서 스틸월의 뒤통수에 칼을 꽂는 행위를 한 이상 그가 스틸월에 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이 녀석을 써먹을 수 있는 남은 방법은 하나다.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스틸월 백작가를 상대하시오. 그것만이 오늘의 실수를 덮을 수 있는 일이 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시오. 경도 나도 한동안 바쁠 터이니.”
축객령을 받은 바이너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이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척이나 새파란 것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마음과는 전혀 달랐다.
“빌어먹을!”
그게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바이너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다행히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아 주변 사람들은 듣지 못했다.
‘이게 무슨 쪽팔리는 꼴이야!’
바이너는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 흉흉한 기세에 사람들이 물러났다. 그러나 바이너는 지금 주변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회의에서 본 지크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 개자식!’
그와 한 결투로 인해 바이너의 모든 것이 박살 났다.
촉망받는 인재로서 미래에 강철검 기사단의 단장이 될 수 있다고까지 일컬어지던 그다. 하지만 그 결투에서 패한 후, 그의 입장은 변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를 홀대하거나 박대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자신에게 예전만큼 기대 어린 시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언뜻언뜻 느껴지는 모멸의 시선.
이제 막 마력을 다루기 시작한 지크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아무리 지크가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긴 했어도 그가 막 마력을 개화한 사람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실력은 그가 위 아니었던가.
그 사실을 지우려는 듯 바이너는 미친 듯이 수련에 빠져들었다.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지크가 심리적으로 걸어 놓은 족쇄가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의 경지는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고, 멀찌감치 따돌려 놓았다 생각한 동기들이 빠른 속도로 따라왔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바이너의 지크에 대한 원망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리고 원망은 곧 스틸월 백작가에까지 퍼졌다.
한데, 어느 날 지크가 돌아왔다.
증오스러운 자의 귀환이었지만, 바이너는 그의 귀환이 뭔가 대단한 변화를 주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운 영지에 뭐 먹을 게 있어서 귀환을 했는지 내심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바이너와 똑같이 아니, 바이너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상황에 빠져 있던 그레이그 스틸월이 지크의 손에 회복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틸월 영지의 위기 상황에 지크가 개입해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지크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욕설이 비집고 나왔다.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자가 대체 왜 칭송을 받고 있는 것인가. 예전엔 믿음직하지 못한 후계자라고 씹어대던 놈들이 순식간에 태세를 바꾸는 모습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만큼 지크에 대한 증오도 끓어 올랐다.
그때, 자신에게 뻗어 온 플로드 백작가의 손은 말 그대로 구원이었다.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지크에게도 자신을 무시한 스틸월 백작가에게도 복수할 수 있다. 아니, 그건 복수가 아니다. 밸리드를 추종하는 무리에게 하는 정의의 심판이다.
‘다음에 그놈과 만나는 건 전장에서로군.’
그때는 이번과 같은 실패 따윈 없을 것이다. 바이너는 마음속의 칼을 날카롭게 다시 벼리며 끌고 온 말에 올라탔다.
* * *
바이너가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본 루스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쓸모없는 놈만 잔뜩이군.’
결국 이번 계획은 실패 해버렸다.
‘꽤나 중요한 계획이었는데.’
스틸월을 몰락시키는 것은, 의외로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스틸월의 몰락은 그렌 제너드의 개인적인 유흥. 루스에게 중요한 것은, 작게는 그 자신이 이 전쟁으로 공적을 세우는 것이고 크게는 카르위먼이 귀족 간의 다툼에 끼어들게 하는 데 있었다.
일단 이유가 있다 해도 귀족 간의 다툼에 한 번 끼어든 카르위먼은, 앞으로 일어날 혼란에 조금 더 쉽게 무력을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카르위먼의 힘은 자연스레 줄어들 터.
‘그랬어야 했는데…!’
실패했다. 원래라면 이번 전투가 이 시대에 있을 카르위먼의 첫 무력 개입이 되어야 하건만. 단 한 존재 때문에 전투 개입은커녕 파문조차 못 했다.
‘지크!’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