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4화
“…확실히 바이너 경이 조금 성급했군요.”
그렌은 일단 인정했다. 바이너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스틸월 백작이 수상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조작됐다고 했지만 저는 이게 진품이라고 믿고요. 엄연히 백작가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아무런 근거 없이 날조로만 몰 수도 없습니다.”
그렌의 손이 탁자 위에 있는 명령서를 탕 때렸다.
“아니면 지크 씨도 뭔가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내놓으셔야 합니다. 스틸월 백작의 결백을 증명할 증거 말이죠. 지금처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스틸월 백작의 결백을 주장한다 해도 다른 분들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있게 들리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렌은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다른 이들에게 동의를 구해 지크를 압박할 속셈. 실제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지크에 비해 명령서란 물증을 가지고 있는 그렌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괜찮을까요?”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미려한 음성이 바로 장내의 관심을 휘어잡았다.
루벨라가 조용히 손을 들고 있었다.
비록 나이 어린 그녀였지만 이곳에서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그렌도 마찬가지.
“물론입니다. 성녀님의 의견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루벨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지크 님의 말씀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렌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지크는 확신했다. 그가 속으로 온갖 육두문자를 날리고 있을 거라고.
“…어째서 그러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 혹시 성녀님께서는 지크 씨도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어떤 이유입니까?”
“지크 님을 신뢰하기 때문이에요.”
결국 버틸 수 없었는지 그렌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지크와 그렌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와중에 지크를 지지한다는 성녀의 말은, 곧 그렌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 지지에 대한 근거란 게 오로지 사람에 대한 신뢰뿐이라면.
다른 사람이라면 참지 못하고 면박을 주었겠지만 상대는 카르위먼의 성녀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다. 그렌은 표정을 수습하고는 마치 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성녀님께서 지크 씨에 대한 신뢰가 각별하단 건 알고 있습니다. 목숨을 구원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이 일은 사람에 대한 신뢰 하나만으로 진행하기엔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언제 지크 님에 대한 신뢰로 이런 주장을 한다고 했죠?”
“…아닙니까?”
“제가 분명 지크 님을 신뢰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제가 지크 님을 지지하는 정확한 이유는 그분이 세운 실적 때문이에요.”
“실적?”
예상치 못한 말에 그렌은 조금 당혹했다.
“네, 실적. 방금 제너드 경이 말씀드렸다시피 포르티에서 지크 님은 제 생명을 구해주셨죠. 그리고 동시에 포르티에 펼쳐지려던 도시 제물의 의식을 막았어요.”
그렌도 알고 있는 일이다. 원래 의식을 막지 못하고 침울해져 있던 루벨라를 위로하며 그녀와의 관계에 첫 발걸음을 뗐어야 했는데 완전히 틀어지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이번 시간선에서 최초의 뒤틀림을 느꼈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도시 제물의 의식을 막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죠. 정확히는 도시 제물의 의식이 완성되기 전, 지하수로 스며든 생명력을 되돌리는 방법을 말이에요.”
“…뭐라고요?”
그래도 꿋꿋이 유지하고 있던 그렌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의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을 들었다는 감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하나, 루벨라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그렌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렌과 같이 굉장히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도시 제물의 의식으로 빼앗긴 생명력을 되돌릴 수 있다니!”
그 정도로 도시 제물의 의식을 막는 방법의 존재는 놀라운 것이었다. 물론 그렌의 그것은 조금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크의 감상은 달랐다.
‘놀라겠지. 지금 나올 방법이 아니니까.’
원래 그 방법은 훗날 루벨라가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루벨라는 지크게에 그 방법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렌에게 있어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얘기일 터.
“이미 알고 있으신 분도 계시지만,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으니 설명드릴게요.”
루벨라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경탄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렌의 입은 점점 더 벌어졌다.
“지금까지 이 방법은 교단 내에서도 일부 사람들만 공유하고 있었어요. 원리를 정확히 파악해 혹시 있을지 모를 부작용을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바로 공개를 하면 방법을 알려주신 지크 님이 밸리드의 집중 표적이 될 것 같기도 했거든요.”
루벨라의 시선이 지크를 향했다.
“하지만 지금은 원리도 파악했고, 무엇보다 이제 고작 이런 것으로 지크 님이 밸리드의 표적에서 지워지진 않을 거라는 판단에 공개하기로 했어요.”
“잘하셨습니다. 고작 그거 하나 추가된다고 해봤자 밸리드 놈들의 저에 대한 호감도가 내려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이미 완전히 바닥을 찍고 있을 테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지크 님의 가장 큰 공적은 따로 있어요.”
“밸리드 북부 지부의 괴멸 말이군요.”
와이그가 루벨라의 말을 지원했다.
“그래요.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밸리드 놈들의 북부 지부 정보를 가져오신 게 지크 님이에요. 그리고 본인도 그 전쟁에 참여하셨죠. 양동을 훌륭하게 성공시키신 건 물론이고, 밸리드 추기경 켈룬 트리슬로와의 토벌과 사각뿔의 원혼의 탈취 등 많은 공을 세우셨기도 하고요.”
여기저기서 감탄성이 들렸다. 새삼 지크의 공적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지크 님이 밸리드에 관해 주장하신 바들은 전부 사실로 드러났고, 그때마다 밸리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어요.”
루벨라가 그렌을 쳐다봤다.
“그걸 생각하면 지크 님의 말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돼요. 밸리드에 관한 한, 지크 님이 틀린 적은 없으니까요.”
루벨라는 할 말을 모두 끝내고 입을 다물었다.
루벨라의 말에 공감을 하는 자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분명 루벨라 님의 말씀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입을 연 자는 우르원 루스. 대신관은 아니지만 차기 대신관으로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신관이었다.
그리고 지크가 적잖이 관심을 두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제너드 놈에게 명예 성기사 자격을 줘야 한다고 추천한 놈이지, 저거.’
그 외에도 여러모로 그렌과 연관이 있는 놈이다.
지금껏 조용히 있어 이 자리에서는 별 관여를 하지 않으려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렌이 밀리자 지원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지금껏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많이들 생각하죠. 분명 일리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말이기도 하죠. 원래 사건이란 것은 지금껏 그래왔던 일이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때 많이 발생하니까요. 즉, 지크 경이 지금껏 밸리드에 관해서는 틀린 적이 없다고 해도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단정할 순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실적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지금까지 지크 경이 한 일들을 보면 분명 어딘가 독자적인 정보망을 갖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크 경?”
대신관 한 명이 지크에게 물었다. 지크는 자신에게 ‘경’이란 칭호가 붙여지는 것에 등에 소름이 우둘투둘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르위먼에서 명예 성기사란 직위를 부여받은 그가 카르위먼의 고위급 회의장에서 ‘경’이란 칭호로 불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루벨라와 와이그 정도만이 ‘님’이란 다른 호칭을 붙이고 있을 뿐, 다른 이들은 모두 ‘경’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고 봐야 했다.
즉, 참고 넘겨야 할 시련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답변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대신관은 지크의 대답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지크 경은 저렇게 말씀하시지만 저는 정보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그렇다면 지크 경의 지금의 태도도 그 정보망을 근간에 두고 있다 봐야 할 겁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지 않습니까. 지크 경은 어디까지나 답변할 수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 추측은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군요.”
“하지만 그 추측이 아니라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루스와 대신관의 논쟁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 한 사람 끼어들기 시작하더니 곧 격렬하게 의견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지크는 그 장면을 잠시 관찰하다가 그렌을 쳐다봤다.
원래라면 지금 벌어지는 논쟁에 참가해 어떻게든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해야 할 그다. 하지만 지금 그렌은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논쟁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자신의 주장을 가다듬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그렌은 명백하게 얼이 빠져 있었다.
‘어이구. 도시 제물의 의식을 막는 방법이 그렇게도 충격이었나?’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것은 일개 ‘변수’ 운운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지크가 루벨라에게 그것을 가르쳐 줬다면 자연스레 하나의 가능성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지크의 회귀.
지크는 느긋하게 그렌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렌은 거의 사고가 정지된 것 같았다.
지크 입장으로서는 너무도 만족스러운 모습. 그 표정을 나무든 돌이든 철이든 똑같이 새겨 집 안 한구석에 걸어두고 싶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것만 본다면 모든 울분이 가라앉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지크가 그렌의 표정을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그건 지크 씨가 밸리드와 협력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누군가 소리쳤다. 지크는 빌어먹게도 행복한 지금의 시간을 방해한 말아 처먹을 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분노에 찬 눈초리로 지크를 쳐다보는 바이너가 있었다. 자신을 감히 밸리드 같은 덜떨어진 놈들과 같은 취급을 한 것도 열이 뻗치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그렌의 멍청한 표정을 감상하던 시간을 방해한 것이 더욱 괘씸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말을 삼가시오, 바이너 경!”
사람들이 바이너를 향해 분노 어린 음성을 날렸다. 지크는 엄연히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다. 그런 그에게 밸리드와 같은 편이라고 하다니. 그건 지크를 넘어 지크에게 명예 성기사의 자격을 준 카르위먼마저 모욕하는 일이었다.
바이너도 엉겁결에 나온 말이 꽤나 자극적이었다는 걸 알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나, 그가 입을 다문다고 해서 지크가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었다.
“말 잘 했습니다, 바이너 경.”
모욕적인 말을 들었지만 지크의 태도는 담담하기만 했다.
“당신은 내가 스틸월의 편을 들고 있는 이유가 스틸월과 같이 밸리드와 한통속이어서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말입니다. 그 말은 곧 당신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뭐…!”
“내가 말했죠. 이번 사건은 음모라고 생각한다고요. 그리고 그 음모의 세력은 분명 밸리드와 관련이 깊을 겁니다. 관련이 없을 수가 없죠. 어쩌면 음모의 세력이 밸리드 자체일지도 몰라요. 한데 두 분은 그 세력의 목표로 보이는 스틸월의 토벌을 주장하고 계시죠. 즉, 음모의 세력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을…!”
“어라? 아직 이해 못 하셨습니까? 그다지 어려운 말을 하고 있진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뭐, 이해가 가지 않으셨다면 직접적으로 말씀드리죠.”
그리고 지크는 또박또박 둘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이 그 음모자들 혹은 밸리드와 한 편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디서 그딴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바이너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에 비해 지크는 나긋나긋했다.
“왜 헛소리입니까? 지금 어떤 분께서 감히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나보고 밸리드의 주구가 아니냐고 의심하셨잖습니까.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밸리드의 주구가 되는 판이니, 안 되는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