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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83화 (483/628)

제483화

지크에게도 할튼 바이너는 꽤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마왕 지크 모어로서 군림할 때, 그렌처럼 그를 토벌하려 하는 자는 있었어도 마치 길가에 난 잡초처럼 무시하며 시비를 거는 자는 없었다. 감히 그러기엔 지크의 힘과 악명이 너무도 높았던 것이다.

때문에 회귀 후 바이너의 태도는, 지크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것과는 별개로 무척이나 신선한 것이었다. 물론 그건 한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바이너는 그에게 무력까지 휘두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의 가치는 딱 거기까지. 계속 관심을 줄 정도의 인간은 아니다.

실제로 스틸월 백작가에 돌아왔을 때, 그는 바이너란 인물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이미 바이너는 지크와의 결투에서 옴팡지게 망신을 당한 뒤로 지크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인상적인 만남이 어디 가진 않아 지크는 바로 그를 알아봤다.

‘스틸월의 기사인 놈이 제너드 놈과 함께 나타났다라.’

당연히 좋은 의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바이너의 시선이 지크를 향했다. 순간 지크는 그의 눈에서 음습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복수심이군.’

아마 예전에 당한 모욕 때문에 생긴 감정이리라.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지만 바이너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크는 복수심이란 감정에 그다지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크 자신도 기분 나쁜 일 있으면 하는 게 복수인데 그 감정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때문에 지크는 자신을 향한 복수심도 충분히 인정을 했다.

‘다만, 그 복수를 받아주는 건 별개의 문제지.’

어디까지나 그가 복수를 하는 행위를 인정할 뿐이지, 당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능력 있으면 성공하겠지.’

다만 녀석이 그럴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크는 팔짱을 끼고 턱을 들었다. 누가 봐도 예의 바른 자세는 아니다. 바이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둘의 신경전은 그렌이 입을 열 때까지 이어졌다.

“바이너 경. 당신이 겪은 바를 설명해 주십시오.”

그렌의 말에 바이너는 지크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른 이들을 둘러봤다.

“할튼 바이너라고 합니다. 바쁘신 분들이 많으실 테니,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이너는 숨을 한 번 내쉬고 입을 열었다.

“예전에 스틸월 백작님의 집무실에 수상한 자가 드나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수상한 자라…. 구체적으로 어떤 자를 말하는 겁니까?”

대신관 한 명이 물었다. 잘 물어봤다는 듯, 바이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밸리드의 신도였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바이너는 진실성을 부각시키려는 듯 선명한 어조로 주장했다.

“그자가 어떻게 밸리드 신도인 걸 아셨습니까?”

“얼마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그저 백작가의 손님인 줄로만 알았죠. 물론 단순한 손님은 아니었습니다. 백작님과 독대를 자주 했었으니까요. 그래봤자 귀한 손님이라는 인식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런데 이번 사건이 터지기 시작한 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그 사람은 백작가 내에 다른 사람들과도 제법 친분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때는 그저 백작님만이 아니라 백작가 자체와 가까운 사람이겠거니 생각했죠. 한데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떠오른 겁니다. 그 사람과 가깝게 지낸 자들이 이번에 밸리드의 주구로 판명된 사람들이란 걸요.”

몇몇 사람이 신음했다. 그에 자신감을 얻은 것인지 바이너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그자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사람이 다시 백작가를 찾아왔습니다. 여느 때처럼 백작님과 독대를 한 그는 백작가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전 그 사람을 미행했죠. 그가 향한 곳은 비올사 변두리에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렌이 질문을 던졌다. 다른 이들의 궁금증을 대신 표해주는 동시에 일순 딱딱해질 수 있는 설명을 부드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제가 가진 건 심증일 뿐,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으니까요. 다만 그 집을 기억하고 자주 들렀죠. 혹시 뭔가 특별한 일이 없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비올사 근처에 대규모 신전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건물에서 인기척이 사라졌습니다.”

“인기척이 사라진 건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밤에 들를 때마다 집 안에서 항상 불빛이 새어 나왔는데, 이상하게 그 소식이 퍼진 이후로는 불빛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렇게 몇 날 며칠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불빛은 계속 보이지 않았죠.”

“그래서 들어가 보셨군요.”

“네.”

그렌과 바이너는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크는 그들의 연극이 어떻게 진행될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제로 열고 들어갔죠. 그에 대한 죗값은 반드시 치르겠습니다.”

“당신의 올바른 마음씨는 무척 감명 깊습니다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에 관해 다룰 때가 아닙니다. 설명만 계속해 주세요.”

‘놀고 있군.’

아주 제들끼리 고해하고 참회하고 용서까지 다 하는 꼴에 지크는 속으로 야유를 보냈다.

“집은 비어 있었습니다. 가구도 몇 점 없어서, 도저히 사람이 생활을 하던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온갖 물건이 어질러져 있었죠. 마치 급하게 그곳을 떠난 듯 말입니다. 집의 주인에 대해 더더욱 궁금해진 저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어땠습니까?”

“발견한 건 몇 개 없었습니다. 더러운 옷가지 몇 벌과 썩어가는 음식 정도. 하지만 그 중에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바이너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돌돌 말린 두루마리였다.

“이것입니다.”

바이너가 그렌에게 그것을 건넸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루마리에 쏠렸다.

“대체 그게 뭡니까!”

조금은 성질이 급한 대신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바이너는 기꺼이 그에 대한 대답을 했다.

“스틸월 백작님이 비올사 근처에서 발견된 신전에 있는 모든 증거들을 인멸하라 명령한 명령서입니다.”

바이너의 목소리에 맞춰 그렌은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두루마리를 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높이 펼쳐들었다.

“정말입니까?”

의심 반, 놀람 반의 질문이 날아온다. 바이너는 단호하게 말했다.

“문서에 찍힌 날인은 분명 스틸월 백작님의 것입니다. 직업상 스틸월 백작님의 날인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침음성과 탄성이 들려온다. 지금껏 스틸월 백작가는, 백작가 일부가 밸리드에 물든 건 사실이지만 백작을 위시한 백작가 중심 인사들은 밸리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유지해 왔다.

한데 바이너가 내민 증거는 그 주장을 일거에 박살내는 것이었다.

“…정말로 스틸월 백작가가 연루됐단 말인가.”

“일단 확인을 해야겠습니다만, 만약 날인이 정말로 스틸월 백작가의 것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사람들에게 바이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더불어 필체도 분명 백작님의 것입니다.”

점점 더 백작에 대한 의심이 짙어졌다.

안 그래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던 백작이다. 사소한 증거가 나오더라도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판에 꽤나 강력한 증거가 나와버렸다.

“이것들은 스틸월 백작가가 밸리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피네 자작가의 편에 서서 스틸월 백작가를 토벌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청 높여 주장한 그렌이 지크를 쳐다봤다.

“지크 씨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우리 카르위먼은 피네 자작가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지크를 딱 잡아 지목한 이유야 뻔했다. 루벨라와 와이그가 슬며시 인상을 썼다. 하지만 지크는 태연했다. 가볍게 웃음기까지 띠며 말했다.

“전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그렌은 침착했다. 느긋하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유리함을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제가 스틸월 백작의 옆에서 봤을 때, 그자는 절대로 밸리드 신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영지 내에서 일어나는 일과도 전혀 관계가 없었고요. 자기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무능하다는 딱지를 붙인다면 저도 동의하겠습니다. 한데, 그자가 밸리드의 주구다? 그 작자 성격상으로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지크의 말을 스틸월 백작이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분명 스틸월 백작을 두둔하는 말이었지만,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모멸의 투가 잔뜩 들어 있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당신과 똑같이 말이죠.”

그렌이 표정을 굳혔다. 그가 명령서를 가리켰다.

“저는 여기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증거라고 주장하는 서류죠. 전 이 사건을 어떤 이들이 스틸월 영지를 노리고 꾸민 아주 교활한 음모라고 생각합니다. 그놈들은 스틸월 백작가에 아주 교묘히 밸리드 놈들을 침투시켰죠. 그 능력을 생각한다면 백작의 날인과 필체 정도 위조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없어요.”

“당신이 스틸월 백작님의 아들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바이너가 지크에게 말했다. 그건 지크가 회귀한 직후에 그와 했었던 결투 이후, 처음으로 둘 사이에 나누어진 대화였다.

바이너의 목소리엔 적대감이 가득했다. 그에 비해 지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장소와 주변 인물들이 달랐지만, 지금의 상황은 어딘가 익숙했다.

회귀한 지크가 한스와 바이너를 쥐어 팬 후, 스틸월 백작의 앞에서 진상 규명을 할 때의 상황과 비슷했던 것이다.

두 사람도 그걸 느꼈다.

당시의 패자인 바이는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승자인 지크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개인적인 감정을 섞었다, 이 말입니까?”

“아니란 말입니까?”

지크는 피식 웃었다.

“이거 재미있군요. 그 작자와 내 사이를 아주 잘 알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아무리 당신과 백작님의 사이가 나쁘더라도 핏줄이 어디 가는 건 아니죠.”

“진짜 제가 핏줄이라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스틸월 백작가를 두둔한다고 칩시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건 나뿐이 아닐 텐데요.”

지크가 손가락으로 바이너를 가리켰다.

“일단 당신은 내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전에 내게 시비를 걸고는 상황을 모면하려 거짓말을 하다가 당시 명백한 하수였던 내게 결투로 패했으니까요.”

바이너가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지크는 그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스틸월 백작가의 편을 들고 있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신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지크는 손가락을 그렌에게 향했다.

“저기 있는 제너드 씨도 마찬가집니다. 나와 저 사람의 사이는 좋지 않죠. 이미 여기 있는 루벨라 님과 와이그 님은 알고 계신 사실이고, 분위기를 보아 하니 다른 몇몇 분들도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둘 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이니 둘 사이에 대한 정보가 카르위먼 내에 퍼졌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모르시는 분들도 이번에 알게 되셨을 테니 별 상관은 없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제너드 씨도 나를 공격하기 위해 피네 자작가의 편을 들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렌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반드시 그럴 거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저기 계신 바이너 경이 말씀하신 개인적인 감정 운운은 당신들도 피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러곤 지크는 무척이나 얄밉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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