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2화
대신전 유라스 안에 신관과 성기사들이 모여들었다.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여든 사람들의 면면을 본다면 절대 소수라고 무시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신관들은 대부분 대신관들이었으며, 혹 대신관이 아니더라도 대신관의 자리가 빈다면 그 공석을 메울 수 있을 만큼 공적이 높은 자들이었다.
성기사들도 마찬가지. 모두 높은 무력과 많은 공적을 가져 카르위먼 성기사들의 대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들이었다.
거기에 카르위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성녀 루벨라가 참석했다.
마지막으로, 카르위먼의 대표이며 카르나의 뜻을 지상에 널리 알리는 카르위먼 사명의 최선봉에 선 자, 교황이 있었다.
정기적인 회의를 제외한다면 이 정도의 면면이 유라스에 모이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고작 사건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 사건 하나가 너무도 중대했기에 사람들은 불평 하나 없이 교황의 명에 따라 유라스에 모였다.
정해진 날짜가 다급했기에 강행군을 한 모양인지, 대부분의 신관들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형형했다. 적어도 피로를 핑계로 회의에 소홀한 사람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지크는 모인 사람들을 살폈다.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카르위먼과 격렬히 부딪쳤던 회귀 전을 생각해보면 조금 의아한 일이었지만, 지크가 어느 정도 힘을 쌓고 본격적으로 세상과 맞부딪치기 시작한 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후의 일이다.
그에 비해 대신관들은 전부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뿐. 지크 모어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전부 수명이 끝나 만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증거로 대신관은 아니지만 차기 대신관이라고 불리는 신관들 중에 낯이 익은 자들이 몇몇 있었다. 정확히는 미래에 지크의 손에 죽을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회귀 전의 상황. 지크가 카르위먼에 협력하고 있는 이상, 아마 이번 시간선에서 지크의 손에 유명을 달리할 일은 없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참여 면면을 확인하던 지크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그의 맞은편이었다.
‘그렌 제너드.’
여전히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존재다. 혹시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면을 찾아볼까 하다가 관뒀다. 불가능이라는 단어에 기쁘게 덤빌 수 있는 지크였지만 그렌의 마음에 드는 면을 찾는다는 행위는 불가능 이전에 무척이나 불쾌한 것이었다.
‘아, 하나 있다!’
저 잘생긴 얼굴이 자신의 술수로 인해 일그러지는 모습만큼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니, 이 세상 어떤 장관보다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지크는 잘라 말할 수 있었다.
“회의를 시작하겠소.”
교황이 엄숙하게 말하자 조금씩 들리고 있던 잡음이 일제히 사라졌다.
“의제는 모두 알다시피, 크로뇽 왕국의 피네 자작가를 도와 스틸월 백작가를 공격하는, 우리의 외부 무력 투사에 대한 일이오.”
엄숙한 장내에 긴장감이 섞여 돌기 시작했다. 이미 오늘 다룰 의제가 뭔지는 모두 알려져 있었지만 교황의 입에서 외부 무력 투사라는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나온 순간 사태의 심각성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카르위먼은 위부의 무력 투사에 대해, 특히 귀족 간의 다툼에 끼어드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소극적인 걸 알 것이오. 하지만 오늘 이 의제가 올라온 것은 이 일이 단순한 귀족 간의 세력 다툼이 아닌, 우리의 주적인 밸리드의 수작질일 가능성이 있어서요.”
밸리드란 이름이 나오자 엄숙함과 긴장감이 뒤섞여 돌던 장내에 미약한 살기까지 섞였다. 그 정도로 카르위먼은 밸리드의 존재에 엄청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은 대부분 알고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혹 잘못 알고 있거나 전체적으로는 파악하지 못한 분도 계실 수 있으니, 일단 현 사태를 간단히 설명부터 하겠소.”
“설명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교황의 옆쪽에 자리하고 있던 신관 한 명이 일어섰다. 미리 계획되어 있던 모양이었다.
그 신관은 차분한 어조로 이번 일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미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자들도, 조금 덜 알고 있는 자들도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이상입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사람들은 옆에 있는 사람과 잠시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리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입을 여니 장내는 적잖이 소란스러워졌다.
“조용.”
그러나 그것도 교황의 묵직한 한 마디에 사라졌다.
“이제 모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의견을 나눠보도록 하겠소. 먼저 이 의제를 건의한 명예 성기사 그렌 제너드 경을 모시겠소.”
“그렌 제너드입니다.”
그렌이 일어났다.
“제너드 경. 그대가 주장하는 바를 말하시오.”
“일단 제 안건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교황 성하와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참석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너드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예의 바른 그의 태도에 사람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지크는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내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방금 전의 설명처럼 현 상황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밸리드와의 싸움의 역사를 잘 안다고 자부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이런 커다란 사건은 그리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몇몇 역사에 정통한 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즉, 이 사건이 무척이나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밸리드 놈들이 정말로 작정하고 일으킨 사건이라는 뜻이니까요. 때문에 우리 카르위먼도 이번 사건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놈들이 작정하고 움직인 만큼, 이번 음모가 실패하면 놈들에게 커다란 타격이 될 겁니다.”
밸리드 놈들에게 커다란 타격이 되리란 소리에 몇몇이 몸을 움찔했다. 밸리드 놈들과의 최전선에 있는 성기사들이 대다수였다. 그걸 보면 분명 그렌의 말은 사람들에게 싸움에 대한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놓고 그렌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는 없었다.
“일단 저는 제너드 경의 말이 일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신관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밸리드 놈들을 때려잡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밸리드 놈들은 때려잡는다. 그것이 카르위먼의 최우선 방침 아닙니까. 그 방침에 따르면 될 일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지금 우리는 스틸월 백작가를 적으로 둘지 말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당연히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밸리드가 강대하다 하더라도 우리 카르위먼이 위축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적이 강하다 약하다를 떠나서 스틸월 백작가가 밸리드의 주구란 증거가 없….”
“스틸월 백작가는 밸리드의 주구가 확실합니다.”
“……!”
말을 하던 대신관이 입을 다물고 놀란 눈으로 그렌을 쳐다봤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아무리 스틸월 영지에서 밸리드에 관한 온갖 사건, 사고가 터지고 있다지만, 고위 귀족을 밸리드의 주구로 낙인찍는 건 무척이나 껄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렌은 그 일을 태연히 내뱉었다.
“여러분의 생각도 압니다. 세계 많은 나라가 카르나를 믿고 따르며 우리 카르위먼을 존경하지만, 우리가 직접적으로 나랏일에 개입하는 걸 꺼리죠. 쉽게 말해 우리가 권력을 얻는 걸 싫어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귀족의 일에 상관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이번 일에 개입하는 것도 무척 싫어하겠죠.”
그렌은 일단 부정적인 말부터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지만 그렇게 이것저것 눈치를 본다면 우리가 어찌 밸리드 놈들을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일로 우리가 오명을 뒤집어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 겁을 먹고 우리가 움츠러든다면 밸리드 놈들은 더더욱 이 세상에서 활개를 치게 될 겁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더 많아지겠죠.”
그렌은 주먹을 꽉 쥐며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따라서 세상이 뭐라 하더라도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우리를 의심하고 힐난한다 하더라도 마음속 신념을 굳게 두고 움직인다면, 세상도 결국은 우리의 진심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렷한 발음과 적절한 억양. 그리고 말에 맞춘 커다란 동작은 그렌의 말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설픈 선동에 놀아날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렌의 말을 한 번 더 곱씹어보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걸 눈꼴시게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거야 당연한 말 아닙니까?”
열정적으로 불타오르던 그렌에게 지크가 찬물을 확 뿌렸다. 그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그런 것 정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까?”
그렌과는 정반대로 담담한, 나른하다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은 어조다. 하지만 그의 말 또한 사람들의 귀에 선명히 스며들었다.
“애초에 예전 밸리드 북부 지부 토벌 때도 교황 성하께서 직접 관련 나라에는 다른 정보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끝난 후 수습도 완벽하게 하셨죠. 성하께서 그렇게 하실 정도로 이미 당신이 할 말 따위, 여기 계신 분들은 전부 숙지하고 있는 일입니다. 제너드 씨의 말은 그저 시간 낭비로밖에 들리지 않는군요.”
같은 내용일지라도 어떻게 얘기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바는 다르다.
지크가 말한 것처럼 그렌의 말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대부분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그렌은 그 생각을 구체적인 말로 표현해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자신의 말에 설득력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지크는 몇 마디 말로써 그렌의 말을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만들었다. 실제로 몇몇은 지크의 말에 동의하는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좌중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애초에 오늘 회의는 당신이 스틸월 백작가가 밸리드의 주구라는 구체적인 증거를 내놓느냐 내놓지 못하느냐에 갈린 일입니다. 안 그래도 바쁘신 분들 모아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증거나 내놔요.”
아무리 잘 봐줘도 예의 있다고 생각되는 발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다. 게다가 지크를 처음 본 사람은 있어도 그의 존재와 활약상을 모르는 존재는 없다.
직업 특성상 성질 괄괄한 성기사들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지크의 태도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휘어잡은 분위기를 깨트린 지크를 그렌이 서늘하게 노려봤다. 그러나 고작 눈길 따위로 지크를 제압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크는 역으로 삐딱하게 그를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지크 씨가 원하시니 바로 그 증거를 내놓도록 하죠.”
그렌은 고개를 돌려 어떤 이를 불렀다. 누군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 녀석은….’
낯이 익은 녀석이다. 지크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야, 무지 반가운 녀석일세.’
그는 뚜벅뚜벅 걸어 그렌의 옆쪽으로 다가왔다.
“먼저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그렌이 말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할튼 바이너라고 합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바이너 경은 스틸월 백작가의 강철창 기사단에 속해 있는 젊은 기사입니다.”
할튼 바이너. 지크가 막 회귀를 했을 당시, 한스를 감싸며 그를 무시하다가 뒤통수에 화분을 처맞고 기절한 후, 책임 소재를 따지며 지크에게 누명을 씌우려다가 결국 결투에서 지크에게 처참히 패배한 기사.
바로 그가 이곳에 등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