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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81화 (481/628)

제481화

플로드 백작가를 등에 업은 피네 자작가의 항의는 분명 스틸월 백작가에 전쟁이라는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스틸월이 밸리드의 추종자임을 열렬히 비난하고 당장이라도 병사를 이끌고 올 것 같던 피네 자작가도 당장 군사를 일으킬 낌새는 없었다.

그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원인은 비였다.

쏴아아아아!

오늘도 스틸월 영지에는 굵은 빗줄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이 대량으로 공급되는, 영지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

대량의 비는 오히려 농사를 망치고 대량의 이재민을 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스틸월 백작가는 비의 양을 엄중히 관찰하며 피해를 제어할 준비를 하곤 했다.

그러나 올해는 하나의 걱정이 그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계속해서 높아지는 강의 수위였다. 아니, 이제 그곳은 강이 아니라 호수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커졌다.

당연히 물에 잠식된 토지는 그게 집이든 밭이든 길이든 숲이든 모조리 사라졌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특성상, 하류 쪽에 위치한 데다 저지대가 많았던 스틸월 영지의 피해가 더욱 컸다.

하지만 스틸월 백작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영민들을 피난시키는 것뿐, 그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왕국에서도 내로라하는 무력 집단이라고 해도 자연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작은 개미 새끼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든 호루스 협곡을 막고 있는 바윗덩이를 치워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이미 그곳은 안 그래도 좁은 지형에 우기로 불어난 물들이 겹쳐 거대한 격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진 기사들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그곳에 들어갔다간 비명횡사하기 딱 좋았다.

게다가 지금 스틸월 영지가 맞닥뜨린 상황 때문에 기사들을 투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호루스 협곡의 복원은 적어도 우기가 끝난 후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백작가는 오늘도 바빴다. 사태의 수습과 해결의 준비. 그리고 전쟁도 대비를 해야 했다.

하루가 일주일 정도로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백작을 위시한 관료들이 한결같이 생각했을 정도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더라도 반드시 시간을 내줘야 할 인물이 있는 법.

카르위먼의 성녀 루벨라와 성기사 와이그는 그 조건에 넘치도록 적용되는 인물들이었다.

“떠나신다고요.”

매일 올라오는 머리 아픈 보고에 요 근래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날이 없던 백작이었지만, 차마 루벨라와 와이그 앞에서까지 그런 표정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초췌해진 얼굴은 어쩔 수가 없다.

귀족이자 강한 기사이기도 한 백작이 그런 얼굴이 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지금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강한지 충분히 짐작이 될 정도였다.

“네. 일단 스틸월 영지에 있는 밸리드 신전은 대부분 정리가 된 것 같으니까요. 백작님의 협력에 감사를 드려요.”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죠. 그 구더기 같은 새끼들을 영지에서 치우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말입니다. 카르위먼이 이번에 도와준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백작이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인사를 받는 루벨라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밸리드를 처리하는 건 카르위먼이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니까요.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며 고민을 하던 루벨라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카르위먼이 계속 스틸월 영지의 편에 설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백작이 관심을 나타냈다.

설명을 한 건 옆에 있던 와이그였다.

“이번에 돌아가는 건 귀환 명령을 받아서입니다.”

“두 분 지위가 지위시니 계속 여기에 머물기 힘드시겠죠.”

마치 그런 이유였으면 좋겠다는 듯 백작이 그렇게 말했다. 눈앞의 실수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려 드는 아이 같다.

하지만 아이의 실수는 언젠가 부모에게 들키기 마련이다.

그리고 세상이란 부모처럼 아이의 모든 걸 용서하고 보듬어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밸리드를 밀어버리는 데 지위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번 귀환 명령은 훨씬 더 중요한 일 때문에 내려졌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카르위먼이 피네 자작가의 편을 들지 말지 이번에 결정하게 될 거예요.”

더 이상 말을 빙빙 돌리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에 루벨라가 단번에 진실을 내뱉었다.

백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누군가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거세게 내려친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생기는 최악의 상황은 고작해야 백작 자신의 사망 정도다.

자신이 사망한다고 해도 백작가는 그레이그를 백작으로 세워 계속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루벨라의 말은 정말로 스틸월 백작가 자체에 사망선고를 내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백작이 어떻게든 입을 여는 데 성공했다.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심경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루벨라와 와이그가 안쓰럽게 백작을 쳐다봤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직 정해진 건 아니에요.”

루벨라가 그렇게 위로했지만, 백작에겐 전혀 위로로 들리지 않았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절벽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를 떨어뜨릴지 말지 고민을 한다는 선포였는데 어찌 위로로 들리겠는가.

하지만 카르위먼의 성녀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이라는 상황이 그나마 백작의 숨을 트여줬다.

“후우! 어찌 된 영문인지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성녀님.”

“이번 스틸월 영지에 있던 밸리드 토벌전에 힘을 거든 사람이 있어요. 그렌 제너드라고, 지크 님처럼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로 임명받은 분이시죠. 그분이 정식으로 교황 성하께 건의를 한 모양이에요.”

그렌 제너드. 그 이름이 처음으로 스틸월 백작에게 인식된 순간이었다.

“그분은 스틸월 백작가를 밸리드의 주구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에요.”

“개소리입니다!”

분을 참지 못하고 결국 백작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례한 언행이었지만 그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한 루벨라와 와이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실례했습니다.”

“괜찮아요. 어쨌든 그 때문에 대신관들의 회의가 잡혔어요. 정말로 스틸월 백작가를 밸리드의 주구로 인정하고 파문을 한 후, 무력 투사를 할지 말지를요.”

“저희는 절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알아요. 지크 님이 그렇게 믿으시는 분인걸요.”

루벨라의 대답에 적잖이 안심이 되는 백작이었지만, 그 이유에는 입이 쓸 수밖에 없었다.

백작가에서 차별을 해, 반쯤 내쫓은 지크가 지금은 스틸월 백작가에 없으면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너드 님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런 건의를 하신 걸 거예요. 귀족, 그것도 영지를 가진 고위 귀족을 파문시키고, 더불어 무력을 행사하는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니까요.”

“보통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와이그의 말처럼, 종교 세력인 카르위먼이 함부로 귀족에게 칼을 휘두르는 걸 여러 나라들은 곱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백작가에 안심되는 일은 아니었다. 백작이 침울하게 말했다.

“…지금은 보통 상황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것이 문제였다.

자칫하다간 정말로 피네 자작가에 카르위먼이란 종교 집단이 합류할 수도 있었다.

“일단 저희는 반대표를 던질 예정입니다. 지크 님의 확신이 있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밸리드에 한해서만은 백작님은 깨끗하시겠죠.”

하지만 와이그의 말을 반대로 생각하자면, 지크의 확신이 없었다면 그의 검이 스틸월 영지를 향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와이그의 밸리드를 향한 무자비함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백작은 등허리가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엔 지크 님도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그 녀석이 말입니까.”

“네. 지크 님은 카르위먼 내에선 유명하신 분입니다. 예전에 성하도 한 번 만나 뵌 적이 있으셨죠.”

백작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 하지만 교황마저 만나본 적이 있다니.

“그분이 세운 공을 생각하면 다른 대신관들도 쉽사리 어깃장을 놓지 못할 겁니다. 적어도 직접적인 무력 행사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니, 너무 마음고생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정말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 별 의미 없는 말을 조금 더 나눈 후, 루벨라와 와이그는 물러났다.

하지만 백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무실에 쌓인 엄청난 서류의 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

백작이 여느 때처럼 그의 뒤편에 서 있던 트레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기를 바라야죠.”

트레얼이 한숨을 내쉬었다. 잔뼈가 굵은 그도 정신없이 사방에서 터지는 사건들 때문에 피로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백작을 보조하는 자로서 생각하는 걸 멈출 순 없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 대책을 세워놔야 할 것 같습니다.”

“대책이 있나?”

백작이 희망을 담아 말했다. 이런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뽑아낼 대책이란 게 있다니.

하지만 트레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말할 대책의 실현 가능성도 의문이었던 데다가 백작과 백작 가족은 무척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크 도련님을 스틸월의 후계자로 세우는 겁니다.”

“…뭐?”

백작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의심을 했다.

그러나 백작은 어리석지 않았다. 곧 왜 트레얼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후계자가 되면 적어도 카르위먼의 공격은 중단되겠군.”

“자기들이 임명한 명예 성기사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니까요. 피네 자작가와 플로드 백작가도 조금쯤은 눈치를 보겠지요.”

그들의 공격이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호루스 협곡이 붕괴되어 받은 피해가 있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밸리드에 관해서는 명분이 크게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아무리 지크를 싫어하는 백작이라도 지금은 백작가가 흔들리고 있는 와중이다.

개인적인 사정을 끼워넣을 수는 없었다.

“물론 카르위먼이 이 전쟁에 상관을 하지 않는다면 필요 없을 일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과연 스틸월의 후계자 자리를 주려 한다 해도 도련님이 받으실까죠.”

지금껏 계속 스틸월의 후계자 자리엔 관심도 없다는 언행을 계속해온 지크다.

그런 그가 과연 백작의 뜻대로 후계자 자리에 앉으려고 할까.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처음으로, 백작은 지크를 쫓아냈던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 * *

지크는 루벨라, 와이그와 함께 교황이 있는 총단으로 향했다.

한시가 급한 일이라 그들은 쉴 새 없이 말을 몰았다.

평소 마차를 타고 다니는 루벨라도 이번엔 말을 탔다.

그녀는 꽤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다만 아무래도 체력은 떨어지는 편이라 총단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상당히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보통 신관들 중 육체적 단련을 하는 이들은 얼마 없다.

다만 루벨라는 포르티의 그 끔찍한 일을 겪은 경험 때문에 쉬지 않고 기본적인 육체적 단련을 해 온 것이다. 이번 강행군의 성공도 평소의 단련 덕이었다.

“시간에 늦지 않았네요.”

루벨라가 피곤한 음색으로 말했다.

와이그가 그런 그녀를 기특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루벨라 님의 평소 단련이 배신하지 않은 거죠.”

“후후후, 저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

퀭한 눈을 빛낸 채 그녀가 조금 음습하게 웃었다.

지크는 눈앞의 총단, 대신전 유라스를 올려다봤다.

이제부터 여기서 중요한 회의가 열린다.

지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앞으로 열릴 그렌의 깜찍한 짓거리가 기대됐다.

‘어디 얼마나 열심히 춤을 추는지 기대해볼까.’

그래야 자신이 만든 무대가 와르르 무너질 때 재미있는 얼굴을 보여줄 테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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