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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80화 (480/628)

제480화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라일라가 그랬다.

커다란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됐는데 분위기 나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중계지의 조작법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스틸월 영지를 둘러싼 음모의 세세한 정보들을 곧 모두 알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그렌 제너드가 됐건 플로드 백작가가 됐건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정보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지크가 진다는 상상이 들지 않는데 제반 정보를 모조리 파악한 상황에선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지크는 생각이 달랐다.

“방심하지 마, 라일라.”

“응?”

“클로원의 공주님 말이야. 계속 경계해.”

“…세르피나를?”

지크의 화술에 일방적으로 맞고 차인 그녀다.

라일라가 연민의 감정을 떠올릴 정도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한데, 그녀를 경계하라니.

“당장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진 않을 거야. 그런 여유 따위 떠올리지조차 못 할 정도로 흔들어 댔으니까. 하지만 그 영향이 영원히 가진 않겠지.”

원래 당황이란 감정은 시간이 흐르면 가라앉는 법이다. 그리고 시간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현 상황에 대해 차분히 파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시간을 언급한 건 녀석을 구슬릴 수단이긴 했지만, 진짜로 녀석에게 유리한 요소이기도 해. 경험이 부족할 뿐이지 녀석이 머리가 비상하단 건 너를 보면 아니까.”

“하긴, 시간이 많다면 사람들은 쓸데없는 것들을 떠올리기 쉽지.”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지크를 바라봤다.

“너에게 당한 울분도 슬슬 올라올 테고.”

그리고 그걸 자신에게 풀리라.

지크는 라일라의 시선을 외면했다.

“생각해 볼 만한 건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자기에게 조금 더 유리한 환경을 만들려 하는 것 정도일까? 말마따나 나는 너만큼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지크가 오기 전까지 세르피나의 철벽 같은 고집을 뚫지 못한 라일라가 아니던가.

“골치 아프겠네.”

앞으로의 고난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아 라일라는 이마를 짚었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거다.”

“그 편이 낫다고? 생각만으로도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트집을 잡으려 한다는 건 그것밖에 수단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상황을 유리하게 반전시키려는 목적이지. 하지만 순순히 협조를 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져. 라일라 너는 저 공주님이 우리에게 고분고분 협력할 것처럼 보여?”

“전혀 아니지.”

그 똥고집을 있는 대로 겪은 라일라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한데 그런 그녀가 별 불만 없이 협력을 한다면 그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밖에 안 돼.”

“과연. 그래서 계속 경계를 하라 한 거구나.”

“문제는 공주님의 그 꿍꿍이를 파헤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될 거란 거다.”

“너라면 쉽지 않아?”

조금 전 그가 세르피나를 어떻게 다뤘는지 옆에서 생생하게 본 입장으로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해서 그 녀석의 꿍꿍이만 파헤치고 있을 수는 없어. 무엇보다 녀석이 이 중계지나 브뤼셀 시스템을 이용해 수작을 부린다면 나라고 알 수 있을 턱이 없지. 그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지크가 라일라를 쳐다봤다.

“만약 그렇다면 그걸 알아챌 수 있는 건 너뿐이다. 혹시 알아채지 못 해 녀석의 시도가 성공한다 해도 그걸 수습할 수 있는 사람도 너뿐이고.”

그러며 지크는 라일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믿으마. 녀석을 철저하게 감시해 줘.”

지크의 믿겠다는 말이 라일라의 심장에 그대로 꽂혔다.

그녀가 두 주먹을 꽉 쥐며 크게 말했다.

“응, 맡겨줘! 녀석이 이상한 짓을 하는지 철저하게 감시할 테니까!”

“그래.”

그러곤 정말로 지크는 세르피나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너무 라일라에게 짐을 씌우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라일라가 아니라면 녀석의 수작질을 알 수 없으니까’

게다가 믿음도 있었다.

지금껏 여행을 같이 해오며 봐 온 그녀의 실력. 그리고 그녀가 겪은 경험을 생각하면, 적어도 세르피나에게 끝까지 놀아나진 않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되더라도 어떻게든 뚫고 나갈 구멍 하나 정도는 마련해 주겠지.’

그거면 된다. 나머지는 지크 자신이 전부 해결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당장 내일부터 있을 세르피나와의 기 싸움을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던 라일라가 지크를 쳐다봤다.

“나는 그렇다 치고. 나가서 지크 너는 뭘 할 거야? 바쁘게 움직일 거라고 했지?”

“전쟁 대비를 해야지.”

이미 세르피나의 태도로 앞으로 전쟁이 벌어질 것을 확신한 상황이다.

“플로드 백작가는 이미 전쟁 준비를 엄청나게 해놨을 거야. 하지만 스틸월 백작가는 주변에 제대로 된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태지. 당연히 전력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만큼 스틸월 백작가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원래의 힘을 갖고 있다면 그 정도 전력 차이정도 나 혼자 메워버릴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마력이 전부 해방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얼마 안 남았지?”

“그렇지.”

지크는 몸에 마력을 흘려봤다.

처음 회귀를 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러나 힘의 마왕이라 불리던 시절과 비하면 손색이 꽤 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남았다.

저 안에 딱딱하게 굳은 마력이 느껴진다.

가장 안쪽에서 굳어 있던 마력이니만큼 지금껏 풀어낸 마력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뭉쳐 있다. 하지만 그만큼 품고 있는 마력의 양도 엄청났다.

“육체는 완성됐다. 이 녀석만 풀어내면 예전 마왕 시절의 힘을 되찾을 수 있어. 그러면 날 정면으로 대적할 수 있는 놈은 사라진다고 봐도 좋아.”

압도적인 자신감.

하지만 힘의 마왕 시절 지크의 행적들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자신감이었다.

단신으로 그 그렌 제너드가 포함된 용사 파티와 맞부딪쳤던 지크다. 개인적 무력만은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 중 최강이라 해도 과장이 아닌 것이다.

괜히 부하 몇만 거느리고 세상을 향해 투쟁을 했던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힘을 찾은 건 아니니까 알맞은 계획을 세워둬야 해.”

“그렇구나.”

“그래도 일단 아버지한테는 말해 놔야지. 전쟁이 올 거라고.”

“골치 아프시겠어. 안 그래도 터진 일이 많은데 이번엔 전쟁에 대비해야 하니까.”

그것도 불리한 상황을 강요당한 채 시작하는 전쟁이다.

아무리 스틸월 백작가가 전투력이 강한 집단이라 해도 상당한 고생을 할 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지크에게는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얄미운 인간, 고생 좀 더 하라지.”

곧 일그러질 게 뻔한 백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크는 낄낄거렸다.

* * *

지크의 예상대로 스틸월 백작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지금 영지의 이 난리가 플로드 백작 그 쓰레기들의 짓이라고?”

“아마도 말이죠.”

대답하며 지크는 백작이 앉아 있는 책상을 바라봤다.

전 책상이 백작의 흉포한 화풀이에 산산조각이 난 후 새로 들인 책상이었지만, 아쉽게도 현 책상 또한 그리 오래 갈 것 같진 않았다.

벌써 백작의 손이 얹어진 부위가 ‘뿌득!’ 하고 균열이 가고 있었다.

백작의 손에 들어간 힘이 조금만 더 유지된다면 두 쪽이 나 주저앉을 것이다.

이미 지금 상태만으로도 책상이라는 임무를 계속해 나가기에는 무리가 엿보였다.

아마 저 책상도 곧 교체될 것이다. 하지만 다음 책상도 그리 오래 견디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사태가 잠잠해질 때까지 백작의 앞에 책상을 빼는 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일 것이었다.

지크가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작의 머리는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지크의 주장은 일단 설득력은 있었다.

현재 스틸월 백작가는 밸리드의 활동 때문에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상황. 그리고 지금 상황을 가장 반기고 즐길 존재는 플로드 백작가였다.

하지만 지금껏 백작을 위시한 백작가의 사람들이 플로드 백작가를 최유력 용의자로 올려놓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놈들이 정말 밸리드와 손을 잡았다고?”

한 국가의 어엿한 고위 귀족이 밸리드 놈들과 손을 잡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지크의 말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평화롭게 지내자고 자기 딸을 결혼시킨 후에 뒤통수를 후려친 작자들입니다. 스틸월의 몰락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밸리드와 손을 잡을 수 있죠.”

“…그래.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긴 하지.”

왕국의 고위 귀족이 밸리드와 손을 잡을까란 편견에 휩싸여 있었다는 걸 백작은 겸허히 인정했다.

“하지만 들킨다면 녀석들도 그냥은 끝나지 않을 텐데.”

“안 들키면 그만이죠. 그런 인간들이 할 만한 생각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백작은 이번에도 지크의 생각을 인정했다.

“선전포고는 피네 자작가가 할 거라고?”

“제가 알아본 계획이 맞다면 말입니다.”

“정말로 도련님의 말씀이 맞는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느 때처럼 백작 옆에 서 있던 트레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크도 맞장구쳤다.

“심각한 일이죠. 무엇보다 플로드 백작가는 이번 계획의 최종 목표를 스틸월 백작가의 몰살로 잡고 있을 테니까요. 아무리 들키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밸리드를 끌어들인 겁니다. 적당히 끝낼 생각은 없다고 봐야겠죠.”

백작도 트레얼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몰락도 아니고 몰살이다. 말 그대로 백작가와 관련된 모두를 죽인다는 의미.

문제는 지크의 저 말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플로드 백작, 그 개 같은 영감탱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플로드 백작은 스틸월 백작의 장인이었지만 이미 둘 사이에 그런 친근감 있는 호칭 따위는 어울리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트레얼.”

“네, 백작님.”

“당장 전쟁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게. 다만 당장은 조심스럽게 진행해. 아직 선전포고를 받은 것도 아니니, 우리가 전쟁 준비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지도 몰라.”

아직 스틸월 백작가에 드리운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 전쟁 준비라니. 오히려 스틸월 백작가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냐고 말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알겠습니다. 다행이라고 할 순 없지만 피해 수습을 위해 이미 병사들을 동원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에 맞춰 움직인다면 충분히 외부의 시선을 속일 수 있을 겁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얼이라면 잘해 줄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요. 플로드 백작가는 계속 스틸월 백작가와 싸워 온 만큼 스틸월의 힘을 잘 압니다. 아마 플로드 백작가 외의 힘도 동원할 것 같습니다만. 그에 대한 대책은 있습니까?”

“…중앙과 주변 영지에 도움을 청할 거다.”

하지만 백작의 말엔 그다지 힘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도움을 줄 정도로 신뢰를 쌓아온 자들이 있기를 진심으로 고대하도록 하죠.”

지크의 빈정거림에도 백작은 차마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피네 자작가에서 스틸월 백작가를 향해 거센 항의가 들어왔다.

누가 봐도 전쟁을 염두에 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노골적인 항의였다.

그리고 플로드 백작가는 같은 피해자란 이유로 피네 자작가를 두둔했다.

스틸월 백작가는 피네 자작가와 플로드 백작가에 대한 대응을 하면서 계획했던 대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틸월 백작의 도움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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