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9화
세르피나는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성급히 입을 열었다가 방금 전처럼 지크의 화술에 휘말리는 걸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경계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정말로 별것 없는 것 같군.”
지크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다음 포석을 위해 세르피나에게 보여주는 연극일 뿐이었다.
이미 다음에 할 말과 행동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지크의 뇌리에 시간순서상으로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좋아, 공주님. 내가 기회를 주도록 하지.”
“…무슨 기회를 말이냐.”
“일단, 세계수가 공주님을 내보낸 정확한 이유를 말해 봐. 정보의 설명 정도야 그 빌어먹을 지크 브레이브를 통하는 게 나았을 텐데.”
지크 브레이브가 나온다 해도 설명을 듣기도 전에 지크가 대번에 대가리를 깨려 해,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라일라는 생각했지만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 말을 해준다고 해서 어떤 이득이 있지?”
“이봐, 공주님. 어차피 지금 다급한 건 내가 아냐. 공주님이지. 공주님이 그 빌어먹을 지크 브레이브 대신 나왔다면 공주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단 거 아냐. 그렇다면 그게 뭔지는 밝혀야지.”
그리고 지크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아,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이랑 대화하는 거 정말 어렵네.”
세르피나의 손끝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아마도 당장 마법을 퍼붓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게 아닐까.
세르피나란 존재를 싫어하는 라일라조차 현재 그녀의 처지에 슬슬 연민이 샘솟고 있었다.
그리고 지크와 같은 편이 된 자신의 혜안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결국 세르피나는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세계수 분신의 마력을 한데 모아 세계수의 본체로 보내는 경유지다. 동시에 세계수의 마력을 가공하는 곳이기도 하지.”
“음, 음!”
듣기 좋은 청자임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지크가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세르피나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그녀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끊기지 않았다.
“아무리 브뤼셀 시스템이 중단됐다고 하나, 세계수의 마력만으로도 흑막의 힘은 강대하다. 하지만 이곳의 유적에서 조작을 한다면, 적어도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은 차단당하게 되지.”
“그렇군. 흑막의 힘을 빼겠다는 건가.”
지금 직접적으로 세계수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자가 그 흑막일 테니, 세계수로서는 당연히 그 자의 힘을 줄이고 싶을 것이다.
“지크 브레이브가 아닌 내가 나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녀석이 이곳의 조작을 능숙하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확실히 공주님의 도움이 있다면 편하겠어.”
드디어 자신의 말이 일부라도 지크에게 먹히는 것 같자 세르피나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그 조작법을 라일라에게 가르치는 건 어때? 유적을 조작해야 할 때마다 계속 너를 불러내는 것도 좀 그렇잖아?”
“세계수의 의도는 그렇다.”
“역시 녀석은 뭘 좀 아는 녀석이라니까.”
지크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좋아, 그러면 최대한 빨리 시작하자고. 그래도 나름 라일라도 준비를 해야 하니 본격적인 가르침은 내일부터 할까?”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갑작스럽게 일정을 잡아버리는 지크에게 라일라와 세르피나 둘 다 당황했다.
그러나 지크는 둘의 의사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그게 좋겠어. 계속 지하에서 조사만 했을 테니 라일라도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해야지. 햇볕도 쐬고 갓 만든 음식도 먹으면서 말이야.”
“기다려라! 난 가르침을 주겠다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세르피나가 반항했다. 그러나 한심한 것을 보는 것 같은 지크의 눈초리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지크가 또 어떤 말을 할지 걱정부터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걱정대로 지크의 혓바닥은 다시 세르피나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봐, 공주님. 아무리 자기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황 파악은 제대로 하고 입을 놀려야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공주님이 원하는 바는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해. 정말로 공주님은 그걸로 괜찮은 거야?”
괜찮을 리가 없다는 건 세르피나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공주님이 가진 패란 건 내가 귀찮음을 무릅쓰면 쓸모 없는 것들뿐이야. 하지만 공주님한테는 다행스럽게도 난 귀찮은 걸 좋아하는 변태는 아니거든. 즉, 공주님의 패가 완전히 헛된 건 아니란 거지.”
그답지 않게 희망적인 말을 한다.
하지만 라일라는 저게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데 자신의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분명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임이 뻔했다.
“하지만 공주님이 말한 요구를 들어줄 정도까지는 아니야. 즉, 공주님의 요구 조건을 조정할 필요가 있단 거지.”
“클로원의 재건 이외에 내가 원하는 바는 없다.”
“아니, 아니지. 공주님은 그저 그 이외의 조건을 생각하지 않은 것뿐이야.”
지크가 단언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공주님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사라져. 그리고 공주님의 모든 것인 클로원 또한 저 숲속에 사는 엘프들에게나 드문드문 언급되다가 사라지겠지. 그걸 원하는 거야?”
“그건….”
“당연히 싫겠지. 그러니 클로원의 재건 같은 엄청난 조건 말고 조금 더 현실성 있는 조건을 생각해 봐.”
세르피나가 생각에 잠겼다. 고민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지크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당장 다른 조건을 제시하란 말은 않겠어. 거래는 공정해야 하는 법이니까.”
저 공정이란 단어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값싸게 들릴 수 있는지 라일라는 혀를 내둘렀다.
“공주님은 아직 흑막이란 패를 가지고 있지. 세계수가 가지고 있는 정보도 공주님이 가지고 있는 패야. 그 패들과 교환할 조건들을 잘 생각해 봐. 조건이 맞으면 나도 얼마든지 공주님에게 협력해줄 생각이 있어. 그게 바로 내가 말한 기회야.”
그리고 지크는 마치 악마가 말하듯 세르피나의 귀에 속삭였다.
“클로원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알았다. 생각해 보마.”
세르피나 그렇게 말하는 걸 들은 라일라는 전율이 이는 것 같았다.
저게 그, 수천 년 동안의 고집으로 자신의 말을 번번이 무시하던 그 클로원의 공주란 말인가.
하지만 지크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잘 생각했어. 그러면 아까 말한 대로 내일부터 이 경유지의 조작법을 라일라에게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잠깐! 그건 내가 조건을 생각한 이후…!”
“이봐, 공주님! 내가 이렇게까지 공주님을 위해 얘기를 해줬는데도 이런 식으로 삐딱하게 나올 거야? 나는 지금 공주님한테 기회를 준 거야. 그러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내가 공주님의 패를 모두 까라는 게 아니잖아!”
방금 전까지 아이를 어르듯 조근조근하던 지크의 말이 또 다시 거칠어졌다.
하지만 곧 다시 설득하는 어조로 돌아왔다.
“그리고 공주님이 그다지 손해 보는 일도 아니야. 어쨌든 클로원을 위해 우리에게 뭘 요구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잖아? 사념체인 공주님이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윈두르를 통해 이렇게 현실에 나와야 하고 말이야. 결국 공주님은 생각하는 것조차 우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거지. 그를 위해 대가를 치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리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어.”
“…….”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혹시 아나? 그렇게 생각한 끝에 정말로 우리가 클로원을 재건해야만 하는 조건을 떠올릴지도. 그걸 생각하면 지금 공주님이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현실에 실체화해서 생각할 시간을 버는 거야.”
“…알았다.”
결국 세르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지크가 말한, ‘생각할 시간’이란 말이 그녀의 마음 속에 깊이 와 닿았다.
“일단 이 경유지의 조작법에 대해서는 알려주도록 하지.”
“아주 잘 생각했어!”
지크는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세르피나에게서는 무척이나 얄미운 웃음이었다.
“그래, 사람은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 협력을 할 수 있다니까!”
“네가 할 말이냐!”
세르피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나 지크의 웃음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패배자의 울부짖음 따위 지크의 마음은커녕 고막조차 뚫을 수 없었다.
“뭐, 대화가 모든 걸 납득시켜 주진 않지.”
뻔뻔하게 그렇게 말한 지크가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세르피나를 바라봤다.
세르피나는 그 시선이 이젠 징글징글했다.
“음, 혹시 말이야. 이번 전쟁에 대한 정보를 미리 조금만 땡겨 얻을 수 없을까? 생각해보니 너를 불러내려면 내가 계속 윈두르를 라일라에게 빌려줘야 한단 말이지. 그 때문에 떨어질 내 전투력을 생각하면 네가 조금 더 뭔가를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하나 확실하게 말하마. 너는 지크 브레이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최악의 개자식이다!”
* * *
“이야, 쉽다 쉬워.”
유적을 빠져나오며 지크는 싱글싱글 웃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라일라는 차마 그와 같이 웃지 못했다.
자기와 똑같은 얼굴을 한 세르피나가 어떤 식으로 지크에게 놀아났는지 옆에서 생생히 본 것이다.
“설마 클로원의 공주에게서 그렇게 협력을 뜯어낼 줄은 몰랐어.”
“뜯어내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험악하게 하냐. 어디까지나 서로가 서로의 조건을 보고 정당하게 협력을 맺은 것뿐인데.”
“정당이란 말을 다시 한번 찾아보는 게 어때?”
그렇게 힐난을 했지만, 그녀는 내심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래도 대단했어. 그 공주를 그렇게 마음대로 휘두르다니.”
“대단한 게 아냐.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거든.”
지크는 세르피나를 떠올렸다.
“고대 제국의 공주이자 나보다 훨씬 전의 마왕님이라고 해도 협상 능력이 우월하다곤 할 수 없지. 오히려 과거를 생각하면 협상 능력은 엄청 떨어질 수밖에 없어.”
지크는 손가락을 펴 이유를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코어로서 조정을 받아 바로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을 테니 협상 경험은 전혀 없을 거야. 마왕으로서 깨어났을 때도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인 것 같으니 그 때도 경험을 쌓진 못했을 거고. 아니, 협상 경험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공주님은 세상 경험 자체가 너무 부족해. 그런 사람 구슬리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지.”
“그래도 그 공주는 막대한 지식이 있었잖아.”
“지식과 경험은 달라. 그 때문에 세계수도 지크 브레이브가 아니라 그 공주님을 부른 게 아니겠어?”
“하긴.”
라일라는 납득했다.
“그나마 거슬리는 게 클로원의 공주라는 자부심 정도인데, 그거야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요소고. 뭐, 요약하자면 송사리 같은 상대였다는 거다.”
“…난 그 송사리 같은 상대를 전혀 설득하지 못했는데.”
“너도 세상 경험이 많은 건 아니잖냐. 게다가 지식도 공주보다 달렸을 테고. 여러모로 네가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그리고 지크는 쓸데없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뭣보다 너도 송사리 수준인 건 같으니까 말이야.”
라일라의 손바닥이 지크의 팔뚝을 때렸다. 지크는 실없이 낄낄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