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78화 (478/628)

제478화

“…….”

세르피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의사 표현을 하지 않고 있단 뜻은 아니었다. 서릿발 같은 시선이 지크를 꿰뚫는다.

그녀의 안에서 지크는 온갖 방법으로 수천, 수만 번 죽어나가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지크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본인만 비참할 뿐이지.’

자기 안에서 상대를 온갖 수단으로 박살 낸다고 해봤자, 망상을 현실에 구체화시킨다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현실에선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는다.

그리고 지크는 무척이나 관대하게도 머릿속에서 하는 상상만으로 상대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헤어지자고.”

지크는 한 걸음 물러났다.

“의자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인데 한동안 빌려주마. 나중에 회수하지, 뭐. 혹시 화풀이할 필요가 있다면 마음대로 산산조각 내도록 해. 천하의 클로원의 공주님인데 의자 하나 희생하지 못할까. 화풀이할 때 그걸 나라고 생각해도 돼. 아, 원하면 거기에 내 이름이라도 써줄까?”

그렇게 말하며 펜과 잉크를 꺼낸다. 정말로 상대를 조롱하는 건 세계 최고가 아닐까 생각하며 라일라는 혀를 내둘렀다.

“…지금 스틸월 영지를 둘러싼 음모가 궁금하지 않느냐.”

드디어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것일까. 당장이라도 지크에게 온갖 매도를 날리지 않을까 싶었던 세르피나에게서 뜻밖의 제안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아직 남은 패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았다.

그러나 지크는 이번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필요 없어. 어차피 대충 예상은 가니까.”

지크는 얕잡아보듯 세르피나를 내려다봤다.

“전쟁이지?”

세르피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행동 자체만으로도 대답이 되고 있었다.

“전쟁이라고?”

그에 비해 라일라는 무척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어디랑 어디가?”

“스틸월 백작가. 그리고 아마도 플로드 백작가일 거다.”

“…네 친가와 외가잖아.”

“맞아.”

자신의 친가와 외가의 전쟁을 말하면서도 지크는 무척이나 담담했다.

“놀랄 일도 아니야. 스틸월 백작가와 플로드 백작가는 대대로 피로 피를 씻는 관계였으니까.”

그걸 화해해 보겠다고 행해진 게 지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식이었지만, 플로드 백작가가 있는 대로 뒤통수를 쳐버린 후에는 당연히 예전보다 훨씬 더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건 무리가 아닐까?”

지크가 말하는 전쟁이 두 영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무력 충돌은 아닐 것이다. 분명 지크의 어투는 대규모 무력 충돌을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영지는 같은 나라 소속이 아니다. 명백한 타국. 그것도 둘 다 왕국의 변경을 지키는 변경백의 직위를 갖고 있다. 두 영지의 충돌은 필연적으로 두 왕국의 전쟁으로 비화될 것이 뻔했다.

물론 왕국 전체에 동원령이 떨어질 정도로 규모가 커지지 않고 중앙과 주변 영지의 지원만을 받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전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규모조차 일개 영지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다.

문제는 지금, 스틸월 영지에 온갖 시선이 모여 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의 전쟁은 분명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두 나라를 휘감는 전면전이라면.

“플로드 백작가에 상당한 부담이 될 텐데?”

라일라는 당연히 플로드 백작가에서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스틸월 백작가는 전쟁을 시행할 여유가 없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아니, 오히려 스틸월 백작가에서 선공을 할 수도 있겠구나.”

지금 스틸월 영지를 둘러싼 혼란을, 전쟁이란 수단을 사용해 제거하려 할 수도 있다. 백작가를 보는 외부의 시선이야 더욱 안 좋아지겠지만, 적어도 불안에 시달리는 영지 내의 귀족과 영민들을 똘똘 뭉치게 할 수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선공은 플로드 백작가에서 걸 거야.”

“역시. 하지만 아까 말한 대로 플로드 백작가에 부담이 될 거야.”

오히려 스틸월 백작가에서는 좋아할지 모른다. 내부를 통합할 수 있는 외부의 적이 알아서 등장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 부담을 덜어주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마치 자신의 추측을 확인이라도 하듯 지크는 세르피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라일라에게 설명을 했다.

“일단 스틸월 영지는 밸리드의 주구라는 의혹이 박혀 있어. 그건 알지?”

“알지.”

스틸월 백작가가 필사적으로 부인하고 영지 내를 수색해 직접 밸리드 놈들을 쳐 잡고는 있었지만 아직 의혹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영지 내의 신전들은 그렇다고 해도 내부에 스며들어 있던 밸리드 신도들의 존재가 너무도 뼈 아팠던 것이다.

“그 와중에 밸리드 신도들이 호루스 협곡 붕괴라는 대형 사고를 쳤지. 그 피해가 스틸월 영지에만 미쳤다면 상관이 없다만.”

“…분명 플로드 백작가에도 피해가 미칠 거라고 했었지?”

“그래. 그것도 꽤 큰 피해가.”

“자신들의 영지에 피해를 입힌 죄를 스틸월 백작가에 묻겠다는 명분을 들이댈 수 있겠네.”

“안 그래도 스틸월 백작가는 밸리드를 추종하는 세력이라는 의혹이 붙어 있으니 걸고넘어지기 딱 좋지.”

“그리고 그렇게 전쟁이 시작된다면 크로뇽 왕국에서도 스틸월 영지를 지원하는 데 껄끄러움을 느낄 테고.”

점점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국이 완전히 지원을 포기할까? 아무리 스틸월 백작가가 밸리드를 추종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더라도 명확한 증거가 나온 건 아니잖아? 게다가 스틸월 백작가는 명백히 왕국의 일원이지만 플로드 백작가는 타국의 영지이기도 하고.”

만약 스틸월 영지를 플로드 백작가가 삼킨다면 크로뇽 왕국의 세력이 줄어드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 그걸 과연 왕국에서 보고만 있을 것인가.

“아마 거기도 편법을 쓸 거야.”

“어떤 편법?”

“내가 말했지? 호루스 협곡의 붕괴는 세 개의 영지에 피해를 줄 거라고.”

“…설마 여기서 제3의 세력이 튀어나온다는 거야?”

“맞아.”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네 자작가라고, 스틸월 영지 옆에 붙은 조그만 영지 하나가 있어. 스틸월 백작가와는 그냥 데면데면한 사이인데, 문제는 여기도 이번 수해에 많은 피해를 입을 거라는 거지.”

예전 밸리드 신전에서 본 모형에서 분명 호수가 피네 자작가까지 삼킨 것을 확인했다. 물론 협곡의 붕괴가 반만 성공한 만큼 모형에서 보인 수준까지 물이 차오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자작가가 상당한 수해를 입을 건 확실했다.

“피네 자작가는 어디까지나 크로뇽 왕국의 일원이야. 그들이 스틸월 영지와 전쟁을 벌인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왕국 내 영지전이 되는 거지.”

“피네 자작가는 강해?”

“그럴 리가 있나.”

그냥 평범한 자작가 수준이다. 변경백으로서 웬만한 후작가보다 더한 힘을 갖고 있는 스틸월 백작가와 비교하면 초라할 지경.

“하지만 이번 전쟁 때는 든든한 원군이 붙어주지 않을까? 아무리 타국이라지만, 비열한 스틸월 백작가의 음모에 똑같이 피해를 입은, 스틸월 백작가와 버금가는 힘을 가진 원군이 말이야.”

플로드 백작가와 피네 자작가의 동맹을 일컬음이다.

“그렇다면 많은 부분이 해결되지. 안 그래도 소문이 더러운 스틸월 백작가에, 피해를 입은 피네 자작가가 쳐들어가는 것뿐이야. 당연히 형식은 나라 간의 전쟁이 아닌, 왕국 내의 영지전이 될 거고. 플로드 백작가는 어디까지나 같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원군을 파견할 뿐이라고 하겠지.”

“물론 주력은 플로드 백작가겠지?”

“어쩔 수 없지 않겠어? 같은 피해를 입은 새로운 친구는 간악한 악당과 대적하기에는 힘이 모자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 플로드 백작가는 뭘 얻을 수 있어? 그들이 승리한다 해도 피네 자작가가 스틸월 영지를 집어삼킬 뿐이잖아.”

“영토 일부를 떼어주겠지. 하지만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건 스틸월 백작가의 완전한 멸망일 거야.”

지크는 회귀 전, 부하에게 알아보라 시켰던 스틸월 백작가의 상황을 떠올렸다.

단순한 하인마저 철저하게 도륙해서, 말 그대로 스틸월 백작가의 모든 것이 박살 난 상황. 어지간히 스틸월 백작가에 원한이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잔인한 마인 손에 걸렸다면 그럴 수 있긴 하지만.’

온갖 마인들이 활개치고 다닌 시대가 마인 시대였으니.

하지만 지크는 그 범인이 플로드 백작가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주적이었던 스틸월 백작가의 멸망은 플로드 백작가로서는 엄청나게 기쁜 일일 거야. 게다가 스틸월 백작가 자체가 크로뇽 왕국에서도 상당히 강한 영지였던 만큼 왕국 전체의 전력도 줄어들 테고. 거기에 피네 자작가가 스틸월 영지를 제대로 통제한다는 보장도 없어. 스틸월 백작가만큼 강해진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고 말이야. 설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막대한 시간이 걸릴 테지.”

그때부터는 플로드 백작가 마음대로다. 힘으로 압박해가며 이권을 뜯어낼 수도 있고, 전쟁을 일으켜 통째로 집어삼킬 때의 난도도 낮아진다.

어느 모로 보나 플로드 백작가가 손해 볼 일은 전혀 없다.

“거기에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그렌 제너드가 플로드 백작가에 힘을 실어준다면 계획은 더더욱 완벽해질 테지.”

라일라는 아까 그렌 제너드가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지크의 말을 떠올렸다.

“설마 이게 그렌 제너드의 계획이란 말이야?”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정말로 잘 짜인 계획. 하지만 난도 높은 계획이기도 하다. 플로드 백작가와 피네 자작가의 협력, 스틸월 영지에 밸리드 신도 잠입 등, 사전에 준비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계속 회귀를 반복한 그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렌 제너드가 플로드 백작가에 합류했으면 정말로 스틸월 백작가는 손도 발도 못 썼겠네.”

설혹 카르위먼이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플로드 백작가에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스틸월 백작가는 또다시 명분에서 엄청난 손해를 봤을 것이다.

그렌 제너드와 그 동료들의 힘은 덤이다.

“다만, 이번엔 그 효과가 그리 크지 않겠지만.”

“하긴. 같은 명예 성기사인 네가 스틸월 백작가의 편을 들고 있으니까.”

“물론 그렌 제너드에게 방법이 또 없는 건 아니야. 내가 스틸월 백작가 출신인 건 사실이니까, 핏줄에 대한 정 때문에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우습게도 말이지?”

“우습게도 말이지.”

지크와 스틸월 백작가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주장.

하지만 둘 사이의 세세한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리 없다. 반대로 핏줄의 끈끈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다.

“뭐, 어쨌든 현재 내가 파악하고 있는 상황은 여기까지다.”

지크는 세르피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공주님. 내가 한 추측은 어때? 아직도 공주님이 가진 패가 효과가 있어 보여?”

“…….”

세르피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곤 라일라를 쳐다봤다.

“추측이 확신이 됐네.”

만약 아니라면 세르피나가 뭔가 다른 반응을 했을 것이다.

세르피나도 자신의 반응에 지크가 추측을 확신으로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녀의 분에 공감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공주님, 다른 패는 없어? 뭐든 꺼내 봐. 나를 설득해야지.”

오히려 빼먹을 다른 정보가 없는지 눈을 번뜩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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