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7화
하지만 지크는 시큰둥했다.
“세계수가 가만히 있을 리 없을 텐데?”
“녀석에겐 분명 자유 의지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특별하다고 해도 나무는 나무일 뿐이지. 게다가 지금은 힘도 봉인당한 상태지 않느냐. 황제의 검과 내 육체를 가진 저 여자, 그리고 이 장소의 특성을 이용해 나를 불러낼 수 있게 만들지언정, 나를 통제하거나 멋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애초에 자신의 해방을 위해 자신을 가장 억압한 자 중 하나인 내게 기댈 수밖에 없는 시점에서 놈의 무력함이 느껴지지 않나?”
그녀의 어투에서는 세계수를 얕잡아보는 느낌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유용한 도구쯤으로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제국이 세계수를 어떻게 다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다지 틀린 생각도 아니리라.
지크는 그녀의 생각에 딴지를 걸 생각은 없었다. 그도 어디까지나 그렌 제너드를 몰락시키기 위해 세계수의 해방을 목표로 할 뿐, 세계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바는 없었다.
그렇다고 세르피나의 의견에 찬동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그닥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세르피나의 말에 열렬히 반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소한 거라도 그럴 이유가 있다면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것도 지크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다음에 이어진 말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세계수의 본체를 손에 넣고, 세계수의 분신들을 재차 봉인시킨 후에 저 여자를 다시 코어로 삼으면 되는 거니까.”
“…라일라를 다시 코어로 넣는다고?”
지크는 라일라가 자신의 소맷자락을 꽉 쥐는 걸 느꼈다.
“그렇다.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라는 건 아무나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라.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고, 여러 조정을 거쳐야 하지. 네 옆에 이미 그렇게 완성된 재료가 있는데 다시 코어를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지크는 세르피나를 잠시 바라보다 라일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렇다는데, 네 생각은 어때?”
“절대 싫어!”
생각할 것도 없다. 라일라는 진저리를 치며 거절했다.
“그렇다는군.”
지크가 세르피나에게 말했다. 세르피나가 라일라를 쳐다봤다. 그 도구를 보는 무감정한 시선에 라일라가 지크의 소매를 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이해할 수가 없군. 코어로서 살아간다면 세계수의 마력으로 인해 영원히 불멸이 된다. 네가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지. 불멸을 원하는 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숫자와 동등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늘. 어째서 그렇게 거부하는 것이냐.”
“그게 어떻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는 거야! ‘나’라는 존재 없이, 그저 시스템의 일부가 될 뿐이잖아! 그런 건 살아있는 게 아냐!”
“문제가 되는 건 자유인가? 세계수도 그러더니 너도 똑같은 말을 하는군.”
세르피나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비꼬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라일라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부자유하게 된다는 건 인정하마. 하지만 드높아질 제국의 영광에 비하면 그런 것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더냐. 너는 그 제국의 영광에 이바지하게 되는 거다. 어차피 오래 살아봤자 백 년을 조금 넘어 썩어 없어지게 될 몸, 영원한 제국에 바치게 된다면 너는 불멸이 될 것이며, 제국인들은 널 칭송할 것이고, 너는 제국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영원히는 무슨. 망했잖아, 제국.”
지크의 말은 신랄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를 세워 둬야지. 그렇게 따지면 차라리 잘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이번에야말로 정말 불멸의 제국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세르피나는 정말로 현시대에 제국을 재건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너는 정말로 그걸로 괜찮았던 거야?”
라일라가 세르피나에게 물었다.
평생을 자신의 의지라고는 없이 제국을 이끌어가는 시스템의 부품으로서 살아간 자.
그녀 자신이 몸담았던 제국은 이미 그런 나라가 존재했었다는 작은 단서조차 찾기 힘들 만큼 완전히 소멸했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 제국을 일으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그 때문에 또 다른 자신인 라일라가 다시 한번 시스템의 부품이 되는 걸 감수하고서.
“나는 클로원의 공주로서 태어나 코어로서 자랐고 코어로서 살아왔다. 그런 질문 자체가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넌 뭔가 결핍됐어.”
“원래 위대한 자들은 다른 이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법이지.”
그녀의 행동을 정말로 위대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도 되는 일일까. 지금껏 자신을 도구로만 보는 그녀에게, 라일라는 있는 힘껏 혐오와 경계를 보여 왔다. 그러나 세르피나는 라일라만 도구로 보는 게 아니었다. 그녀에겐 그 자신조차도 도구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녀를 향한 라일라의 감정에 연민이라는 감정이 섞이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라일라가 어떤 상념을 안았든 세르피나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눈빛으로 지크에게 대답을 채근했다.
그리고 지크도 대답을 결정한 후였다.
“안 해.”
“…어째서지?”
“라일라가 싫어하니까.”
지크는 너무도 태연히 내뱉었다. 하지만 그 말이 끼친 여파는 상당히 강했다. 라일라의 눈동자에 감동이 들어찼다. 그에 비해 세르피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고작 그런 사소한 이유로?”
“고작 그런 사소한 이유로 거절할 만큼 네 제안이 별것 아니라는 거지.”
처음으로 세르피나에게서 분노란 감정이 느껴졌다. 감정의 변화가 무척이나 미약한 그녀인지라 그 기색은 미미했지만, 분명 그 감정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착한 사람의 것이든 나쁜 사람의 것이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의 것이든 미약한 자의 것이든, 분노는 분노. 그리고 지크는 자신을 향하는 분노란 감정에 이미 익숙하다 못해 무덤덤해진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협력도 없다.”
세르피나가 싸늘하게 말했다. 협상은 파투 나는 분위기였다. 라일라는 적잖이 당황했다. 지크가 그녀의 편을 들어준 것은 행복이라는 감정이 심장에서 샘솟아 뇌를 직격하는 기분을 맛보여줬지만, 그 때문에 세르피나가 협력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꺼림칙하게 샘솟은 그녀의 눈꼬리가 그녀가 쉽사리 말을 번복하진 않을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긴장감이 자욱하게 번졌다. 지크와 세르피나의 시선이 공중에서 거칠게 충돌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지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관두지, 뭐.”
“응?”
“…뭐라?”
라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르피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지크는 두 사람이 놀라든 말든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지크는 일어나 자신이 앉았었던 의자를 다시 마법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라일라가 앉아 있는 의자의 등받이 위에 손을 얹었다.
“뭐 해? 일어나.”
“으, 응.”
당황한 라일라가 엉거주춤 일어섰다. 지크는 라일라의 의자마저 집어넣었다. 그리고 라일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요새 이 어두컴컴한 지하에 처박혀 있느라 고생했지? 올라가서 한동안 푹 쉬어. 햇볕도 좀 쬐면서 산책도 하고.”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는 라일라에게 시선을 뗀 지크가 세르피나를 쳐다봤다.
“너도 이제 일어나라. 의자 가져가야 하니까.”
“…지금 뭐 하는 게냐.”
세르피나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나 지크는 시큰둥하기만 했다.
“뭐 하긴. 협력은 없을 거라며? 그럼 여기서 입씨름할 필요가 어디 있어. 너나 우리나 서로 좋게 생각하는 사이도 아닌데, 여기서 더 마주 앉아 있어봤자 얼굴 붉힐 일밖에 더 있겠냐. 그러니 우리 서로 갈 길 가자고. 아, 너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사념체였지. 여기서 사라지면 끝날 테니 우리만 갈 길 가면 되겠네.”
그러며 지크는 어서 일어나라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정말로 대화를 끝내자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세르피나의 얼굴에 당황이란 감정이 점점 커져갔다.
“…허세는 그만 부리는 게 어떠냐.”
“무슨 허세?”
“여기서 내 협력을 얻지 못하면 곤란해지는 건 네놈들일 텐데.”
지크는 피식 웃었다. 가로소롭다는 감정이 무척이나 선명히 전달되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것참 궁금하군. 왜 네 협력을 얻지 못하면 우리가 곤란해진다는 거지?”
“세계수의 해방을…!”
말을 꺼내려던 세르피나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할 말의 모순을 깨달은 것이다.
“그 세계수의 해방을 네가 원치 않잖아.”
지크가 그 모순을 콕 집었다.
대답이 궁한 세르피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아니라면 이곳의 제어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내지 못할 거다.”
“필요 없어.”
지크는 또 한 번 세르피나의 말을 부정했다.
“어이, 공주님. 댁이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이곳에 온 건 윈두르가 안내해서야.”
지크가 윈두르의 손잡이를 검지로 툭툭 쳤다.
“그리고 이 녀석이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한 건 세계수를 해방하기 위해서겠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다지 세계수의 해방에 절실한 사람이 아니야.”
지크는 마치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내 목표는 그렌 제너드를 완벽히 몰락시키는 거지. 세계수의 해방은 그에 필요하니까 했던 거고. 즉, 세계수의 해방은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하단 거다.”
“나와 협력을 하면 당연히 도움이…!”
“그런데 지금은 굳이 세계수 해방이란 수단에 매몰될 필요가 없어요.”
지크는 세르피나의 말을 끊었다.
“내가 계속 세계수를 해방시키려 했던 건 그렌 제너드 놈의 회귀 능력 때문이야.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그 능력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 네가 자긍심을 가지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로 브뤼셀 시스템은 엄청난 힘이니까. 그런데 지금 그 브뤼셀 시스템은 망가졌잖아? 그 말은 즉, 그렌 제너드가 더 이상 회귀를 못 한단 소리고.”
지크는 히죽 웃었다. 세르피나는 그 웃음이 무척이나 재수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세계수의 협력이 없더라도 충분히 그놈을 몰락시킬 수 있어.”
그건 진심이었다.
“물론 세계수를 해방시키려 움직이다 보면 그놈을 몰락시키는 게 더 쉬워지긴 하겠지. 하지만 네 요구를 들어주면서까지 필요로 할 정도로 간절하진 않아.”
“…적은 그렌 제너드만 있는 게 아니다.”
“아, 그래. 흑막의 존재도 있었지.”
예전에 지크 브레이브가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지크가 고분고분 윈두르의 뜻대로 따랐던 것도 그 정체를 알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수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놈을 찾지 못하리란 법도 없어. 그렌 제너드를 살살 격장시켜서 정보를 끌어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이 섞인 하얀 마력이 뻗어나간 방향이 세계수의 본체가 있는 곳 아닌가? 그럼 그 방향을 이 잡듯 뒤지면 세계수의 본체와 함께 놈도 찾을 수 있겠지. 당장 생각나는 것만 이렇다. 조금 더 고민을 하자면 다른 방법도 분명 나올 거야.”
세르피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크는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조롱했다.
“알겠어, 공주님? 브뤼셀 시스템을 차지하란 네 권유를 내가 거부했을 때, 너는 갖고 있던 모든 패가 사라진 거야. 물론 그 패가 굉장히 강력한 것인 걸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어쩌겠어. 내겐 그다지 흥미가 가는 패가 아닌걸. 클로원이 건재했던 시절이면 몰라도 세계수의 마력에 의해 만들어진 넌 고작해야 그 정도의 가치뿐이지. 이제 이 협상의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는지 잘 알겠나? 위대하신 클로원의 공주님, 세르피나 아르누 보인 슬레스비타 위프신 클로원 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