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화
잠시 기 싸움이 오갔다. 잠시 후, 세르피나가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을 지크 브레이브와는 별개의 인물로 취급하면 되는 건가?”
“그래. 당장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나중에는 바라는 게 더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투로군.”
“어차피 너나 나나 이제 처음 보는데 어떻게 미래를 예단할 수 있겠냐. 게다가 네가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 자체가 우리와 엮일 가능성이 많다는 거고. 빼먹을 게 있다면 빼먹어야지.”
“…확실히 넌 그자와 다르군. 적어도 그자는 고결했지, 너처럼 천박하지 않았다.”
“칭찬 고마워.”
전 마왕으로서 천박이란 단어에 부끄러움 따위 전혀 느끼지 않는 지크에게 저런 말은 칭찬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게 자신과 지크 브레이브의 차이점으로서 부각된다면 더더욱.
세르피나는 그런 지크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시선을 라일라에게 향했다.
“네가 나는 아니라지만 적어도 같은 육체를 사용하는 자로서 무척 불쾌하구나. 적어도 남자 보는 눈은 조금 더 높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무리 클로원의 왕족으로서 긍지를 잃고 피마저 부정하여 한낱 범부로 전락했다고는 하나, 네가 갖고 있는 육체의 능력만으로도 이 세상을 충분히 호령할 수 있느니라. 원래 내 육체이니 무엇보다 잘 알지. 원한다면 저런 천박한 작자보다 훨씬 나은 이들을 네 주변에 둘 수 있거늘. 능력으로도 미모로도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네 녀석이 어찌 저런 망나니를 좋아하는 것이냐.”
라일라는 코웃음을 쳤다.
“말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대답을 하든 넌 납득하지 못할 텐데.”
“하긴, 자신이 걷는 길이 바닥없는 늪인지 아닌지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에게 충고 따위는 소용없는 법이지.”
세르피나는 순순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이유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세르피나를 잠시 바라보던 지크가 갑자기 라일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윈두르, 더 필요해?”
“음, 글쎄. 저 녀석을 불러놓고 놓아본 적이 없어서.”
“그럼 지금 실험하지, 뭐.”
세르피나가 사라지든 말든 무시하는 태도로 지크가 윈두르를 건네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르피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에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을 뿐.
하지만 지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이 더 중요했다.
“저거 어떻게 한 거야?”
“뭘?”
“공주를 소환한 것 말이야.”
뜬금없는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라일라는 대답했다.
“세계수들의 마력이 들어올 때 윈두르에 마력을 집어넣어 공명시키면 돼.”
“쉬운 방법이군. 어떻게 알았어?”
“윈두르가 알려준 방법이야.”
이 새침데기 검이 이번에도 주인에게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라일라에게만 알려 준 모양이었다.
“쯧쯧, 자기 검에게도 무시당하는 주인이라니. 힘의 마왕이란 이름이 우는구나.”
세르피나의 이번 비아냥은 꽤 날카로웠다. 윈두르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지크는 간신히 참았다. 게다가 어쨌든 방법은 알지 않았는가.
“혹시 지크 브레이브를 불러낼 셈이야?”
라일라가 지크의 욕망을 콕 집어냈다.
“약속대로 그놈 대가리 깨야지.”
감히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도망간 놈을 지크는 절대로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지크 브레이브의 의도가 아닌, 뭔가 다른 외부의 개입 때문에 발생한 일이 분명했지만 지크는 그걸 이해해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라일라가 윈두르를 이용해 공명을 하니 그녀와 관련된 세르피나가 나왔다.
‘당연히 내가 하면 지크 브레이브가 뛰쳐나오겠지?’
다음 마력이 분출될 시간이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그러나 지크의 기대는 세르피나의 발언으로 산산이 깨어졌다.
“네가 공명을 한다고 해서 지크 브레이브가 나오진 않을 거다.”
“…뭐?”
지크의 얼굴에 그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절망의 빛이 빠른 속도로 물들었다. 그건 손에 쥐고 있던 달콤한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의 얼굴에 가까웠다. 지크의 표정 변화에 세르피나도 꽤 당황한 모양인지 얼음 같던 얼굴에 미미한 금이 갔다.
하지만 그녀가 지크에게 구원을 주는 미래 따위는 없었다.
“그 여자와의 관련성 때문에 내가 나온 건 맞다. 하지만 내가 나온 건 세계수의 의지이기도 하지. 지금 상황에 필요한 건 지크 브레이브가 아니라 나니까. 그러니 네가 공명을 시킨다고 해도 세계수, 정확히 말해서 네 검이 지크 브레이브를 불러주진 않을 거다.”
지크는 윈두르를 내려다봤다. 여느 때와 같이 윈두르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이거 확 버려버릴까? 화산 같은 곳에 집어 던지면 녹여 버릴 수 있을지도 몰라.”
“쓸데없는 일이라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고작 그런 걸로 망가질 검이었다면 우리 클로원에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검으로 삼지도 않았다.”
잔혹한 진실에 지크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천하의 힘의 마왕 지크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라일라는 윈두르의 능력(?)에 감탄했다. 어처구니없음이 그 감탄의 9할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하여간 빌어먹을 검 같으니.”
지크는 투덜거리며 윈두르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하지만 그 행동은 무척이나 쪼잔하고 의미 없었다. 지크가 정말로 윈두르를 버릴 수 있을 거라곤 라일라나 세르피나는 물론, 지크 본인부터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잠시간의 투정일 뿐이었다.
“그래, 네가 지금 상황에 필요하다고?”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윈두르는 일견조차 하지 않고 지크가 세르피나를 향해 물었다.
“그렇다.”
“왜?”
“내가 그걸 왜 말해야 하지?”
지금껏 자신이 한 말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 같은 말. 마치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지크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과연, 세계수의 의도와 네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는 건가?”
“눈치는 있구나.”
세르피나가 희미하게 웃었다. 단, 누가 봐도 얕잡아보는 태도가 보여 결코 호감이 가는 미소는 아니었다.
세계수에 의해 불려 나온 놈이 세계수의 해방을 위한 협력을 거부한다는, 일견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저 녀석, 세계수를 이용해먹은 나라의 인간이잖아.’
그것도 브뤼셀 시스템을 만든 황제의 딸이자 직접 그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로서 존재하던 자다. 그런 인간이 순순히 세계수의 해방을 위해 움직일 거라는 게 순진한 생각이다.
‘하지만 세계수가 그걸 모를 리는 없어.’
그렇다면 왜 세계수는 세르피나를 불러내게 만든 것일까.
생각나는 것은 하나다.
‘저 녀석의 능력 때문이겠지.’
오직 세르피나 아르누 보인 슬레스비타 위프신 클로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다.
라일라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녀가 지크에게 말했다.
“아마도 이 유적의 제어에 관한 일이지 않나 싶어.”
“과연. 그거라면 저 사람보다 더 적임인 자는 없겠지. 지크 브레이브는 애초에 논외일 거고.”
문제는 그 적임자가 그들에게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것.
“설득은 우리가 해야겠지?”
“아마도 그럴 거야.”
“이미 몇 번 해본 것 같은데, 결과는 어때?”
“나이를 먹으면 고집이 는다고 하지? 그럼 저 공주님은 얼마나 고집쟁이일까?”
최소 몇천 년 동안 쌓인 고집이라니.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은 결과만이 머릿속에 튀어나온다. 생각 같아서는 깔끔하게 백기를 저 예쁜 면전에 던져 넣으며 네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욕설을 한 9할 정도 섞어 뱉어주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지크가 막 나간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앉지.”
몇 시간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게 뻔한 마당에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지크는 의자 몇 개를 꺼냈다.
의자는 평범한 나무 의자였다. 눈살을 찌푸릴 만도 하건만 의외로 세르피나는 선선히 의자에 앉았다.
“우리와 절대로 협력할 생각은 없나?”
지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없진 않지. 정확히 말하면 너희들이 내게 협력을 하는 거지만 말이야.”
“어떤 협력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하지만, 그래도 일단 묻지. 무슨 협력이냐?”
“클로원의 재건.”
옆에 있던 라일라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지긋지긋한 그녀의 표정이, 그녀가 얼마나 시달려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을 멸망 전으로 되돌리자는 건가?”
“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지.”
“안 돼.”
지크의 단호한 반대에 의외로 세르피나는 별 동요가 없어 보였다. 그녀도 한번 말해본 것일 뿐, 현실성이 없는 건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직접 클로원을 재건해라.”
세르피나가 대안을 말했다.
“나라를 세우라고?”
“너희 둘이라면 가능하지 않나?”
가능, 불가능을 따지자면, 충분히 가능했다. 지크와 라일라는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에겐 그다지 흥미 있는 제안은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가 나라를 세우고 클로원이란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그게 진짜 클로원인 건가?”
이미 클로원은 너무도 오래되어 엘프들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인간들에게는 완전히 그 존재가 잊힌 나라가 아니던가. 이제 와 그런 나라를 세워봤자 이름만 같은 다른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크는 곧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이란 건 황제와 황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다. 따라서 황실의 핏줄이 남는다면 그 핏줄을 중심으로 언제나 다시 세워질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지크의 곁에는, 클로원 초대 황제의 딸이 있었다.
“알아차린 모양이군. 맞다. 왕실의 긍지를 잃고 핏줄을 부정하는 자지만, 그래도 그 핏줄이 클로원의 것인 건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황금 황제라 불렸던 아버지의 딸이니, 그 피의 순수함은 여타 다른 황제들에 비해도 압도적이지.”
세르피나가 라일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라일라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세르피나의 시선이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닌, 철저한 도구로서 대하는 시선.
지크를 만나기 전, 영문도 모른 채 로브 놈들에게 도망칠 때 로브 놈들이 자신에게 던졌던 시선이 딱 저랬었다.
“네가 직접 저 여자와 애를 낳아도 좋고 다른 이와 맺어져도 상관없다. 중요한 점은 저 여자의 자식으로써 클로원 황실의 피가 이어진다는 것이니까. 비록 시간도 영토도 피지배인들도 전부 다르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분명 그 나라는 클로원이 틀림없다.”
“원하는 건 그게 끝이냐?”
“아니, 한 가지가 더 있다.”
“뭐지?”
“브뤼셀 시스템의 재건이다.”
“이봐. 브뤼셀 시스템은 끝장났어. 그건 너도 알 텐데?”
더 이상의 회귀는 없다. 그건 지크 브레이브가 확인해 준 사실이다.
“그래. 하지만 내겐 지식이 있지. 시스템을 충분히 부활시킬 수 있는 지식이 말이야.”
그녀가 마치 사람을 꾀는 뱀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너도 알지 않나. 그 그렌 제너드가 회귀의 힘을 사용해 얼마나 이득을 봐 왔는지. 그 힘이 고스란히 네게 돌아가는 거다. 그렌 제너드는 결코 재능 있는 놈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귀의 힘으로 인해 결국 너를 꺾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지. 그놈도 그럴진대, 폭발하도록 빛나는 재능을 갖고 있는 너라면 어떻겠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