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5화
라일라가 지크를 찾아온 건 지크가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렌이 다음 행보를 밟을 때까지 할 일도 없어 시간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던 지크로서는 꽤 반가운 일이었다.
“오랜만이네. 그 동안 잘 지냈어?”
“응.”
대답하는 라일라의 표정이 묘하다.
“성과는 있었어?”
“음, 성과라면 성과인데….”
답지 않게 라일라가 말을 흐렸다. 마치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뭔가가 있긴 있었군.’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쁜 것이라도 변화가 있는 것이 낫다. 지크는 바로 캐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나을 거야.”
라일라는 지크를 향해 윈두르를 내밀었다. 지크가 윈두르의 손잡이를 쥐었다. 오랜만에 잡은 애검의 감촉이 기분 좋다.
자신은 무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라일라에게 단호히 말한 지크였지만, 이번에 다른 검을 사용하면서 못내 아쉬움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지크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을 바로 마법 상자 안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윈두르를 등에 멨다. 익숙한 무게감이 등에 매달렸다.
“가자.”
라일라가 먼저 지크의 방을 나가자 지크가 뒤따랐다. 그들의 목적지는 당연히 클로원의 유적이었다.
지크는 능숙하게 유적의 입구에 윈두르를 꽂아 넣고 문을 열었다. 낯익은 통로가 그를 맞았다. 지크는 통로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백작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지나친 몇몇의 하인의 표정과 백작가 전체를 짓누르는 침울한 분위기를 떠올리며 라일라가 물었다. 계속 클로원의 유적에만 있던 그녀는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일 있었지. 그것도 무척 큰일이.”
지크는 라일라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라일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큰일 난 거 아냐?”
“났지. 강 주변 저지대 일대가 모조리 침수될 테니까.”
“그러니 백작가 분위기가 그랬구나.”
새벽에 짙은 안개 낀 공동묘지마냥 음울한 공기가 백작가를 감돌고 있던 게 이해가 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협곡의 일은 백작가가 알아서 할 일이지. 당장 사람들을 동원해 협곡을 막고 있는 돌덩이들을 치울 모양이긴 한데, 붕괴된 규모가 규모니 당장의 침수 피해를 막진 못할 거야. 일단 비라도 그쳐야 뭔가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너는 도와주지 않을 거야?”
“뭐, 일단 용사…가 될 생각이긴 하니 나중에 어느 정도 복구는 도와줄 생각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용사라는 단어를 말할 때 여전히 지크는 말을 더듬었다.
“그렌 제너드 때문에?”
“그래. 놈이 이번 사건을 통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 분명하니까. 일단 그것부터 박살 내야지.”
“녀석이 뭘 꾸미는지는 알 것 같아?”
“예상 가는 건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나중에 알려줄게.”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커다란 덩치로 주변을 압도하는 수정의 모습이 여전했다.
라일라가 지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윈두르를 빌려줘.”
“여기 있다.”
지크는 망설임 없이 라일라에게 윈두르를 다시 건넸다.
라일라는 윈두르를 꽉 부여잡고는 고리에서도 수정 쪽으로 툭 튀어나온 부분, 유적의 제어 장치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크는 조금 거리를 두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왔다.”
라일라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콰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고리가 진동했다. 기억에 있는 현상이다. 지크가 발걸음을 옮겨 고리의 가장자리 부분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쿠우우우우!
아래로 보이는 유적의 바닥에 온갖 색의 마력들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전에 봤던 세계수 분신들의 마력이군.’
언제 봐도 신기한 현상이다.
예전에 목격했을 때와 똑같이 각각의 색채를 지닌 마력들은 수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천천히 상승했다. 그리고 수정에 흡수되어 갔다.
마력들은 곧 수정 안에서 각각의 색채를 잃고 하얗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지만 역시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장관이었다. 예전에 한 번 봤었던 현상이기에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천천히 감상할 여유가 생겨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하얀색 빛은 예전처럼 수정을 빠져나와 천장과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기둥을 휘감고 올라간 뒤 한 쪽 벽을 향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지크의 예상은 빗나갔다. 하얀색의 마력이 예전에 봤던 것과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웅!
수정이 진동하며 소리를 냈다. 기둥을 타고 올라가려던 빛의 마력 일부가 수정 안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동시에 또 다른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라일라의 손에 들린 윈두르에서 나고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녀석이 뭔가를 하는군.’
대체 주인인 자신 몰래 꿍쳐둔 비밀이 몇 개가 있는 것일까. 까다롭고 비밀 많은 연인을 만든다고 해도 결단코 윈두르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지크는 확신했다.
하얀 마력은 수정에서 빠져나와 예전에 지크가 봤었던 것처럼 천장과 연결된 기둥을 타고 올라가더니 한 쪽 벽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수정에는 일부 하얀 마력이 남아 있었다.
스으윽!
남아 있는 하얀 마력이 수정을 빠져 나왔다. 그것은 동그란 모양으로 변한 채 천천히 라일라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윈두르는 여전히 진동을 하고 있었다.
라일라가 뒷걸음질 쳐 지크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거야.”
지크는 라일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아까 성과를 물었을 때 지었던 묘한 표정을 또 짓고 있었다. 단,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감정선이 드러나 있었다.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감정은 혐오였다. 그러나 도움이 될 만해 대놓고 꺼릴 수도 없는, 거기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도 엿보였다.
‘비슷한 감정을 알 것도 같은데.’
지크 자신이 느껴본 감정 중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뭔가 심부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듯한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아.’
그건 분명 혐오의 감정이다.
지크는 다시 라일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에서 혐오를 대폭 늘린다면….’
순간 지크의 머릿속에 그 감정을 느꼈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쇠사슬로 묶여 있던, 허공에 뜬 나무. 세계수의 분신 중 바람의 나무를 봤을 때 있었던 상황이다. 정확히는 마력에 의해 실체화된 지크 브레이브를 봤을 때 그런 감정을 느꼈다.
‘설마!’
지크는 놀란 눈으로 하얀 마력을 쳐다봤다. 어느새 그것은 제어 장치가 있는 곳까지 내려 온 상태였다. 고리의 표면에서 사람 허리 즈음의 높이에 멈춰선 그 빛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위 아래로 길쭉해지더니 팔과 다리로 보이는 부분이 쭈욱 튀어나온다. 윗부분 일부가 잘록해지며 목 같은 형상을 만들어 얼굴로 보이는 부분과 몸으로 보이는 부분이 나뉘어졌다. 팔과 다리로 보이는 부분 끝이 갈라지며 손가락과 발가락이 만들어지고 머리 부분에서 새하얀 실 같은 것들이 자라나 늘어져 머리카락의 형태가 됐다.
하얀 빛은 순식간에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력의 표면에 질감이 생기고 다른 색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변화가 끝났다. 이미 하얀색의 마력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있는 건 누가 봐도 사람이라고 주장할 만한 존재뿐.
“그렇게 나왔단 말이지.”
지크는 헛웃음을 흘렸다. 눈앞에 있는, 마력이 변한 인간은 무척이나 눈에 익었다.
길게 늘어뜨린 은발 아래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미모가 반짝인다. 상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투명하리만치 새하얀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보석 같은 반짝이는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지크는 옆을 쳐다봤다. 눈앞에 등장한 여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동료가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나와 같은 현상이겠지?’
다행히 지크는 예전에 비슷한 현상을 겪은 적이 있어서 놀람이 덜했다.
‘아니, 다행인가?’
머릿속에 떠오른 지크 브레이브의 모습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려는 걸 참았다.
“그래.”
지크가 입을 열었다.
“대충 뭐가 일어났는지는 알겠군.”
붉은 눈동자가 지크를 향한다. 라일라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상대였지만 그 눈빛은 전혀 달랐다.
라일라가 지크를 보는 눈빛은 언제나 애정이 넘쳤다. 덤으로 장난기가 덧붙여지는 때도 있고, 불안과 걱정이 보조를 이룰 때도 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크를 향하는 라일라의 시선에는 언제나 격렬한 감정이 넘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크를 보는 눈은 달랐다.
시리다. 그 표현보다 저 눈동자에 어울리는 것은 없다고 지크는 생각했다.
마치 피를 둥글게 모양을 내 꽁꽁 얼린 것 같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지크 브레이브.”
표정과 시선만큼이나 끔찍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다. 목소리가 닿는 곳이 모조리 얼어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지크는 그 속에서 미약한 증오와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지크 브레이브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그녀에 대한 지크의 호감도가 적잖이 상승했다.
“네가 왜 그 이름을 입에 올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만, 나는 그놈과 달라. 그리고 끔찍하게 싫어하기도 하지. 그러니 그냥 지크라고 불러.”
그녀는 말없이 지크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긍정의 표시일까? 아니면 무시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일단 통성명부터 진행하자고. 내 이름은 지크. 당신이 아는 그 놈과는 같지만 다른 자다. 그리고 그놈과는 계속해서 다른 놈이고 싶기도 하고.”
짧은 설명에서 지크 브레이브에 대한 혐오를 잔뜩 나타낸 지크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젠 댁 차례군. 공주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지?”
“…….”
마치 지크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것마냥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살피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세르피나 아르누 보인 슬레스비타 위프신 클로원.”
“음, 들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이름이군.”
저 풀네임을 불러 줄 생각이 지크는 전혀 없었다. 왕족이나 귀족의 위엄을 세운답시고 저딴 긴 이름을 지어대는 자들이 지크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공주님이라고 불러야지.’
틀린 호칭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세르피나는 지크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며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무례하기 짝이 없군. 결국 지크 브레이브는 지크 브레이브란 건가.”
“지금 그 말 때문에 네 호감도가 대폭 추락했어.”
지크가 불쾌해했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난 그놈이 아니야. 네가 여기 있는 내 동료가 아닌 것처럼.”
지크가 라일라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라일라가 손을 들어 지크의 손 위로 포갰다.
“그래. 그 녀석은 내가 아니지. 클로원의 긍지조차 잃어버린 녀석이 어찌 나일 수 있겠는가.”
“그런 긍지 따위 뭐가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았으면 됐어. 그러니 너도 나를 지크 브레이브 취급하지 말라고.”
지크와 세르피나의 시선이 거칠게 충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