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4화
진압군은 빠른 시간 내에 배신자들과 밸리드 신도, 언데드들을 몰아내고 스티프 요새를 함락시켰지만, 결국 그들의 최종 목적이었던 호루스 협곡의 붕괴를 막지는 못 했다.
그 결과 협곡을 흐르던 강은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와 합세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당시 석상에서 발산된 힘을 생각하면 훨씬 더 대규모의 폭발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호루스 협곡은 더욱 격렬한 붕괴를 일으켰을 거고, 협곡을 막는 돌덩이들의 양은 훨씬 더 많아졌겠죠. 당연히 수해로 인한 피해도 더 커졌을 겁니다.”
지크의 말에 와이그도 동의를 표했다.
“생각해보면 이미 석상이 빛을 내뿜었을 때부터 쓸데없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힘이 많았습니다. 아마 놈들은 그 힘까지 오롯이 폭발로 전환하려 했을 테지만, 준비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우리가 들이닥친 거겠죠. 놈들도 궁지에 몰린 끝에 준비도 안 된 폭발을 어쩔 수 없이 일으킨 거고요. 자기들의 목숨을 희생해서까지 말입니다.”
와이그가 아까 전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다만 그런 미완성의 폭발로도 많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입니다.”
지금 이 사태를 일으킨 밸리드 놈들이 눈앞에 있었다면, 와이그는 정말로 그들의 생살을 씹었을 것이다. 내기를 해도 좋았다.
와이그의 눈이 음울하게 전면을 바라봤다. 지크도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보이는 건 스티프 요새의 전경. 맹렬히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보이는 상황은 무척이나 끔찍했다.
호루스 협곡과 가까이 있는 만큼 스티프 요새는 돌덩이들의 폭격에 많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건물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끝까지 저항하던 밸리드 놈들 때문에 요새 안의 건물들은 상당히 파괴된 상태.
그 때문에 안 그래도 부족하던 피난처가 더더욱 줄어, 상당수의 병력이 떨어져 내리는 돌덩이들에 그대로 노출됐다. 당연히 크고 작은 부상을 입는 자들이 속출했고 목숨을 잃은 자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건물 안으로 피한 자들이 모두 멀쩡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건물들은 커다란 돌덩이들을 막지 못하고 구멍이 숭숭 뚫렸다.
당연히 안에 있는 자들도 무사하진 못했다. 심지어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덮친 건물은 완전히 박살 나 건물 안에 있던 이들이 몰살당하기까지 했다.
물론 기사들과 성기사들이 최대한 돌덩이들을 요격했고, 부상자들은 바로바로 신관들이 치료를 했지만 모든 병력을 살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직접적인 전투력이 없는 신관들이나 미숙한 기사, 성기사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나왔다.
스티프 요새를 함락시키고 조사에 투입해야 한다며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것이 끔찍한 결과로 돌아와 버렸다.
다행히 카르위먼의 많은 신관들이 동행한 터라 돌덩이들이 떨어질 때만 피해가 심했을 뿐, 지금은 죽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부상당한 인원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전투 중에 죽었다면 각오라도 되어 있었지, 이번 죽음은 너무나 뜬금없이 찾아와 더 비극적이었다.
와이그가 그답지 않은 침통한 표정을 짓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이그와는 달리 지크는 의외로 담담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애초에 지크는 이번 일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지만 이미 밸리드 놈들의 철저한 준비성을 보아오지 않았는가. 시간에 늦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아무리 지크가 보기 드문 천재라지만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걸로 쓸데없이 마음 아파할 정도로 감성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아무리 부드러워졌다고 해도 회귀 전 마왕이라 불리던 성격은 어디 가지 않은 것이다.
물론 와이그도 생각만은 지크와 같았다. 하지만 정의로운 카르위먼의 성기사로서 그는 죽고 부상 입은 사람들을 보며 아픈 마음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그에 반해 마왕이었던 지크는 그런 쓸모없는 감정 대신 차가운 이성으로 지금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확실해졌어. 그렌 놈은 공을 세우기 위해 이번 원정에 참여한 게 아니야.’
정확히는 꾸준히 세우려 노력했던 자잘한 공적이 아닌, 호루스 협곡 붕괴를 막는 공을 말함이다.
‘만약 협곡의 붕괴를 막아낸 영웅이라는 칭호를 듣고 싶었다면 뭔가 해결책을 세워 놨었겠지.’
하지만 그렌은 딱히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지크가 그렌을 꾸준히 방해해 온 것 때문에 준비해놓은 해결책을 사용하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지크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자그마치 주변 영지를 통째로 구하는 커다란 공적이다. 공적을 세우려 들었다면 어떻게든 그 해결책을 추구한 낌새 정도는 보였어야 해.’
용사란 칭호에 엄청나게 집착하는 그렌이라면 더더욱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먼저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한 게 그였다.
거기서 나오는 해답은 하나뿐이다.
그렌은 애초에 호루스 협곡 붕괴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가 허겁지겁 밸리드의 비밀 공간에 달려온 이유도 전혀 달라진다.
‘막으러 온 건 맞을 거야. 단, 막으려던 건 협곡의 붕괴가 아닌, 협곡의 붕괴를 저지하려는 우리였겠지.’
협곡의 붕괴는 녀석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 지크 일행이 당장이라도 밸리드의 저항을 깨뜨리고 석상이나 진을 부술 낌새가 보였다면 교묘하게 방해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국 지크 일행은 밸리드의 저항을 끝끝내 분쇄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렌의 방해도 없었다.
지크는 당시의 상황을 그렇게 판단했다.
‘그렇다면 왜 놈이 협곡 붕괴의 정보를 우리에게 흘렸냐는 의문이 남는데.’
주변에 알려진 정보는 철저한 수색 끝에 발견한 밸리드의 신전에서 협곡 붕괴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었지만 지크는 지금 이 상황이 철저히 그렌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즉, 그렌이 그 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린 의도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 정보가 없었다면 밸리드 놈들이 우리의 방해를 받지 않았을 테니 붕괴는 더욱 크게 일어났겠지.’
하지만 지크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황은 이미 나조차 붕괴의 규모를 줄일 수 있었을 뿐, 막지 못할 정도로 진행되어 있었어. 최소한의 붕괴는 어떻게든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렇다면 의외로 그 의도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어.’
요새를 공략할 때의 공적이라든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무언가가 있다든가.
‘하나 확실한 건, 이번 일로 그렌의 다음 목표가 촉발될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그리고 지크는 어렴풋이 그 이유가 잡히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두고 봐야지.’
다음 정보가 들어오면 조금 더 그렌의 음모의 전모가 구체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가 들어올 때까지의 기다림도 그리 길지 않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지크는 다시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미헨을 포함해 진압군의 수뇌부는 열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백작에게 보고를 할 전령도 보내진 상태다.
‘이미 다른 영지들에도 조심하란 전령을 보냈다고 했지.’
진압군이 실패한다면 그 재앙이 스틸월 백작령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니, 백작은 일찌감치 다른 영지에 경고를 한 상태였다. 다른 영지에서 백작의 경고를 수용하고 대비를 했다면 예상보다 피해가 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순 없을 것이다.
지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치 앞으로 스틸월 영지에 펼쳐질 고난을 걱정이라도 하듯, 빗줄기를 쏟아내는 하늘은 어두컴컴할 뿐이었다.
* * *
사상자들을 수습한 진압군은 바로 회군을 시작했다. 적이 사라진 이상,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계속 그 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요새는 방치됐다. 살펴본 결과 강의 범람이 스티프 요새조차 침수시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미 성벽 근처까지 강물이 차오른 상태였다.
붕괴된 협곡은 여전히 강물의 진행을 막아서고 있었다. 혹시 병력으로 무너져내린 돌덩이들을 치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미헨을 포함한 기사들이 잠시 협곡을 둘러봤지만, 차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두 개의 절벽 사이로 쌓인 돌덩이들을, 아무리 머릿수가 많다 하더라도 뚜렷한 계획도 없이 치울 수는 없었다.
혹 스녹이라면 해결할 수 있는지 미헨이 물어보기도 했다. 요새를 무척이나 쉽사리 붕괴시킨 그의 활약에 감탄한 바 있던 미헨이다.
그러나 스녹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가 대지의 환수 노웸과 계약을 맺어 대지의 힘을 다룰 수 있더라도 힘의 한계는 있다. 붕괴의 규모가 너무도 커 스녹이라도 단시간 내에 돌덩이들을 모두 치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급속도로 들어차는 물도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강물은 쌓인 돌덩이들을 넘어설 것이다. 그렇다면 작업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강물이 범람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미헨이 급히 귀환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었다. 강물의 대규모 범람은 이재민을 만들 수밖에 없고, 피난 유도와 혼란 수습을 위해서는 반드시 병력이 필요했다. 쓸데없이 협곡에 병력을 놀려 둘 여유가 없었다.
비올사로 돌아온 병력은 바로 다른 임무를 맡고 영지의 각 지역으로 흩어졌다. 성기사와 신관들도 백작의 요청을 받고 영지민들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지크는 일행을 데리고 백작가로 들어갔다. 백작가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트레얼을 포함해 백작가의 중진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눈에 보였다.
백작의 삐죽대는 수염은 평소보다도 더 헝클어져 있었고 언제나 단정한 모습으로 침착한 태도를 일관했던 트레얼마저 들뜬 머리를 관리할 새도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인들의 얼굴도 무척이나 어두웠다. 둘 이상이 모여 불안감에 수군거리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평소 백작가를 돌아다니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조용히 지크를 쏘아보던 백작 부인마저 백짓장 같은 얼굴로 지크에게 어떤 악감정도 표현하지 않고 조용히 스쳐갈 정도였다.
아마 스틸월 영지 전체의 분위기도 지금의 백작가와 비슷할 거라고 지크는 생각했다.
지크는 슬쩍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쏟아붓고 있는 빗줄기가 보인다. 백작가를 감싸 안은 음울한 기운과 결합해 축축한 바깥의 풍경이 분위기를 더욱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의 마음속은 주변 인간들과 전혀 달랐다.
한스와 스녹마저 걱정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지크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의 얼굴에 구김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나와 상관도 없는데, 뭐.’
스틸월 영지가 어떻게 되는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영지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렌을 어떻게 골려먹을지 생각하는 게 더욱 보람 있었다.
단, 영지 일을 돕겠다는 일행들을 막을 이유도 없어, 지크는 흔쾌히 허락했다. 일행은 모두 자신이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그쯤 되니 지크도 할 일이 없었다. 심심하니 시간도 죽일 겸 그도 살짝 영지를 도와줘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돌아와 있었구나.”
라일라가 지크를 찾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