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73화 (473/628)

제473화

그렌의 등장은 굉장히 뜬금없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반대편 절벽을 수색하고 있어야 했으니까.

와이그도 그렌의 등장에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한심하게 생각하는 지크와 달리 와이그는 제법 그렌의 등장을 반겼다.

지크의 말 때문에 그렌을 조금 의심스럽게 보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진 그렌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찾진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와이그는 그렌의 등장을 순수한 지원군의 참전이란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물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한지라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묻지는 못했지만, 지크는 물어볼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핑계야 만들면 그만이니까.’

괜히 물어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그렌이 전투에 합류했지만 밸리드 신도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물로 가득 찬 공동이라는 환경과 그들에게 강한 힘을 계속 부여해주는 석상 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크 일행이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이 굉장한 실력을 보유한 일행이니만큼 그들은 강화된 밸리드의 공격을 차분하게 막아내고 도리어 역공까지 가했다.

전투는 백중세였다. 얼핏 보면 서로 승부를 내지 못하고 영원히 싸우고만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씩이긴 하지만, 전투의 흐름은 분명 지크 일행에게 기울고 있었다.

지크 일행은 조금씩 석상 쪽으로 다가갔다. 느리긴 했지만 착실하게 한 발 한 발 전진해 나갔다. 밸리드 신도들도 그걸 느낀 모양이다. 그들의 움직임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하지만 지크 일행은 고작 그 정도 발악으로 막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밸리드 신도들의 얼굴에 초조함이 맴돌았다. 석상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문제는 석상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진이었다. 몇 걸음만 더 접근하면 지크 일행은 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때 만약 지크 일행이 진을 손상시킨다면?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석상만큼은 아니지만 진도 이번 계획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지크 일행이 진을 가만히 놔두길 바랄 수도 없었다. 실제로 지크 일행의 눈빛이 진을 스치고 가는 걸 밸리드 신도들은 놓치지 않았다.

종종 지크 일행은 밸리드 신도나 석상이 아닌 진을 노리고 공격하기도 했다. 당연히 지크 일행은 진에 발을 디디는 즉시, 진을 손상시킬 게 뻔했다.

당연히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석상의 힘이 대단하긴 했지만, 그들은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들의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특수한 용도로 석상의 힘을 조정 중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이대로 있다간 진을 지키긴커녕 석상마저 지크 일행의 손에 박살 날 미래가 선했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밸리드 신도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동료의 눈에 어린 굳은 결심을 읽고는, 자신과 생각이 같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은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지크도 그들의 낌새를 눈치챘다.

‘쯧!’

지크는 속으로 혀를 차고 조금 더 속도를 높이려 애썼다.

하지만 지크 일행의 전진을 결국은 막을 수 없던 밸리드 신도들처럼, 지크 일행도 지금 이상의 속력을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 정도로 밸리드 신도들의 저항은 강했다.

갑자기 세 명의 밸리드 신도들이 아예 두 손을 밸르의 석상에 갖다 댔다. 마치 지크 일행의 접근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 셋을 제외한 밸리드 신도들은 역으로 석상에서 떨어져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지크 일행을 향해 공격을 계속했다.

우우우웅!

물이 진동했다. 밸르의 석상에서 빛이 나며 흘러나오는 기운이 급증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좋은 현상은 아닐 게 분명했다.

밸르의 석상에 달라붙은 셋을 제외한 밸리드 신도들이 저항을 계속했지만, 석상에게서 받는 힘이 끊어진 그들은 지크 일행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력의 차이를 자신들의 목숨으로 메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은 지크 일행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지크 일행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성공적이었다. 지크 일행의 전진은 조금씩이지만 늦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석상에서 나오는 빛은 점점 더 강해졌다.

서걱!

지크의 검이 밸리드 신도의 몸을 갈랐다. 물속에 시뻘건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가 저항하는 마지막 신도였다. 방해꾼이 모조리 사라지자 지크 일행은 석상을 부수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늦었다.

퍼엉! 퍼엉! 퍼엉!

밸르의 석상에 손을 댄 밸리드 신도들의 몸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새로운 핏물이 안 그래도 빨개진 물속에 붉은 색채를 덧칠했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광경.

하지만 터져나가기 전 밸리드 신도들의 얼굴은 그들의 최후와는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그건 그들의 목적을 이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콰앙!

지크가 발에 마력을 가득 담아 진 위를 굴렀다. 그의 족적이 진에 또렷이 박혔다. 진을 손상시키기 위한 행위였다.

그러나 석상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와이그가 검에 힘을 잔뜩 담아 밸르의 석상을 향해 휘둘렀다. 어마어마한 파괴의 힘 앞에 석상이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쿠웅!

그러나 석상은 멀쩡했다. 와이그의 검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와이그가 얼굴을 구긴 채 연신 검을 휘둘렀다.

쿠웅! 쿠웅! 쿠웅!

하지만 석상이 부서지는 속 시원한 파괴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속절없이 와이그의 검이 튕겨 나오는 둔중한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

곧 다른 이들도 석상의 파괴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도 신통치 않았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지크의 검은 와이그의 검과 마찬가지로 튕겨 나왔고, 한스가 휘두른 에스텔레이드의 빛도 석상을 부술 수 없었다.

스녹이 대지의 힘을 사용해 석상을 붕괴시키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그렌의 공격도 마찬가지.

그 와중에도 석상의 빛은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콰직!

석상의 표면에 미세한 금이 갔다. 드디어 그들의 공격이 통한 것일까.

그러나 지크 일행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석상에 생긴 금은 그들의 공격 때문이 아니었다.

화아아악!

금 사이로 엄청난 힘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금은 서서히 석상 전체로 퍼져나갔다. 힘의 방출도 덩달아 올라갔다.

지크 일행은 이제 석상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있었다.

폭발할 게 분명했다.

툭!

누군가 지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렌이었다. 그는 딱딱한 얼굴을 한 채 지크를 쳐다봤다.

스윽!

그가 통로 쪽으로 손가락을 폈다. 무슨 의도인지는 뻔했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을 하자는 것이었다.

지크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가 보기에도 이미 사태는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괜히 우물쭈물하다가는 그들까지 폭발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지크는 한스와 스녹에게 탈출할 것을 지시했다. 둘도 별다른 반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에게 배운 만큼 그들의 사고방식도 은근히 지크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지크에 대한 신뢰가 큰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와이그도 침중한 표정으로 탈출에 동의했다. 경험 많은 그도 여기 있는 것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다만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도 특히나 밸리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그이니만큼, 느끼는 굴욕감 또한 가장 컸다.

그들은 석상에서 등을 돌리고 통로를 향해 뛰었다. 그리 길지 않은 통로라 그들이 지면으로 나오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깥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더욱 굵었다. 조금만 서 있어도 온몸이 홀딱 젖을 것 같았지만, 아예 물속에서 전투까지 하고 나와 푹 젖어 있는 지크 일행에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깨끗한 비에 핏물이 씻겨 내려가 개운함마저 느껴졌다.

바깥으로 나온 지크 일행이었지만 사태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곧 폭발이 절벽을 집어삼킬 것이다. 폭발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안전지대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다시 달렸다. 몸에 부딪치는 빗방울이 따갑다. 그들은 최대한 석상이 있는 곳과 거리를 벌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빛과 함께 그들의 뒤를 덮쳤다.

쿠르르릉!

거대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을 만큼 커다란 흔들림이었다.

일행은 뒤를 돌아봤다.

시야를 방해하는 거센 빗방울 사이로 허공으로 높이 떠오른 돌덩이들이 보였다. 사람 주먹만 한 작은 것들부터 집채만 한 거대한 바윗덩이까지 자기 무게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유롭게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언뜻 보면 신비롭게까지 보인다.

하지만 그 광경이 자아낼 비참한 재앙은 사람들의 환상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힘을 갖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유를 얻어 허공을 노닌 것도 잠시, 돌덩이들은 곧 지엄한 현실의 힘 앞에 아래로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육중한 질량을 갖고 있는 돌덩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질량이라는 건 그 자체로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다. 돌덩이들이 떨어져 내린 곳이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가까이에 있는 스티프 요새부터 조금 떨어져 있는 마을들까지. 협곡 주변에 있는 생물들은 예상치도 못한 재앙에 몸을 웅크리고 떨어야 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쿠르르르릉!

절벽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언제나 꼿꼿이 선 채 도도한 강줄기를 내려다볼 것처럼 보이던 호루스 협곡의 절벽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거인이 끌과 망치로 계속 절벽을 내려치는 것 같다.

본래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절벽의 윗부분이 움푹 파였다. 그 잔해가 협곡 아래에 쌓여 강물을 꽉 틀어막았다.

당연히 흐르던 강물은 정체됐다. 하늘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들이 더해져 강의 수위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강이 원래의 영역을 넘어 슬금슬금 밖으로 세력을 뻗쳤다. 지금 당장은 강가가 침수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협곡이 막혀버린 이상 그걸로 끝날 리가 없다.

지크 일행은 다시 절벽으로 향했다.

폭발 때문에 커다랗게 파인 지형을 조심조심 내려가 아까보다 훨씬 높이가 낮아진 절벽 끝에 섰다.

후두둑!

돌 부스러기가 그들의 발에 차여 협곡 아래로 떨어졌다. 원래라면 그것들 중 일부는 강물에 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퐁당!’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돌과 돌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만이 날 뿐.

“젠장!”

와이그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한스와 스녹의 표정도 어두웠다. 눈앞에 쌓인 대량의 돌무더기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뻔했던 것이다.

지크는 힐끗 그렌을 쳐다봤다. 그는 딱딱히 얼굴을 굳히고 협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을 막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지크는 그건 아니라고 딱 잘라 단언할 수 있었다.

하나 분명한 건, 이 거대한 사건은 분명 그렌이 꾸미고 있는 음모에 중대한 변곡점이 되리란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