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1화
지크가 찍은 절벽이 밸리드 놈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절벽이 아니었다면 그렌은 분명 지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밸리드를 발견한 공적을 자신이 독식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렌은 지크에게 협력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렌의 협력이란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정도로 지크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의 의도야 뻔했다. 지크가 가리킨 절벽에 그렌이 원하는 것 즉, 밸리드 놈들이 있기에 공동으로 조사를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지크는 거절했다.
“제너드 씨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군요.”
그렌이 뭐라 반박하려 할 때, 지크가 한발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제너드 씨의 실력이라면 그런 실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그렌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우리 둘이 사이는 별로 좋지 않지만 각자의 실력은 인정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도 없지만, 제너드 씨도 충분히 빠르고 꼼꼼하게 조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닙니까?”
반문하긴 했지만 지크는 절대 그렌이 아니라는 말을 꺼낼 리 없다고 확신했다.
‘내 말을 부정한다면 자기 능력이 떨어진다고 인정하는 건데, 저 용사 병신이 그럴 리가 있나.’
그렌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한 번 숙이고 지크와의 동행을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렌은 지크의 예상대로 반응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저는 다른 절벽을 조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며 지크는 손을 내밀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제너드 씨.”
“지크 씨도요.”
그렌은 지크의 손을 한 번 맞잡은 후 호루스 협곡으로 향했다.
‘등신 새끼!’
그런 그렌의 등을 보며 지크는 속으로 낄낄댔다.
“우리도 간다.”
지크가 움직이자 한스, 스녹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그렌이 간 곳과 반대편 절벽으로 향했다.
깎아지를 듯한 절벽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평범한 사람은 물론, 어느 정도 단련을 한 사람도 도구가 없으면 등반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그런 절벽이다.
그러나 지크 일행에겐 평지보다 조금 더 수고를 들일 뿐인 지형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들 일행 중에는 스녹이 있지 않던가.
스녹이 자기 발밑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그그극!
그들이 딛고 있던 지반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크는 지반을 발로 살짝 두드려 보다가 지반 바깥으로 시선을 뻗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면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위를 쳐다봤다. 지면과는 반대로 절벽 꼭대기가 빠르게 다가왔다.
곧 그들은 절벽 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툭!
뺨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지크가 고개를 조금 더 들어 하늘을 올려봤다. 당장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시커멓게 울상을 짓고 있던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툭! 투툭!
빗방울이 하나둘 점점 늘어났다. 몸 이곳저곳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고 땅에도 물 자국들이 조금씩 세력권을 넓혀갔다.
쏴아아아아아!
곧 세찬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비가 거센지 평범한 사람은 앞을 잘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시작됐군.’
기나긴 우기의 시작이었다.
지크는 협곡 안쪽으로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봤다. 아직까지 강물은 평소처럼 흐르고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가 연신 강에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것만 빼면 강물은 조용히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로 덩치를 잔뜩 불린 강물이 숨겨뒀던 포악한 얼굴을 드러내며 주변을 휩쓸 것이다.
‘강물은 순식간에 불어나니까.’
요새 안에 있는 병력들을 살피니 허둥지둥 대비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다행히 요새가 있는 지대는 강의 범람에도 안전한 곳이다. 저쪽까지 물이 들어차지는 않을 것이다.
단, 요새를 공략하기 전 세워뒀던 임시 진영은 꽤나 저지대에 있어 수면을 취하러 들어갔던 기사들이 서둘러 나오는 게 보였다.
‘하여간 재수도 없지.’
어차피 저 진영을 계속 쓸 계획도 없었다. 요새가 정비될 때까지 하루 정도 기사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기사들도 요새로 옮길 계획이었다.
그들에게 휴식을 준 건 빨리 피로를 회복시키고 바로 수색에 투입하기 위해서였건만. 무정한 날씨가 그들의 휴식 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결국 기사들을 최대한 빨리 투입한다는 계획은 박살 났군,’
하지만 지크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알아서 잘 챙기겠지.’
예닐곱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총사령관인 미헨은 경험 많은 기사이니 충분히 저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일행이 올라온 절벽 아래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곧 사람 한 명이 절벽 아래에서 기어 올라왔다.
“오셨군요.”
지크의 말에 그, 와이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밸리드 놈들을 찾아내야 하는데 태평하게 쉬고 있을 수는 없죠!”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아무리 나이를 먹었기로서니 이 정도 전투로 피곤을 느끼진 않습니다. 마음만은 젊거든요.”
그러곤 다시 껄껄 웃었다.
‘하긴, 저 인간이 이 정도 전투로 지친다는 것 자체가 웃긴 노릇이지.’
그가 만약 피곤하다고 드러누웠다면, 혹시 누군가 저 작자를 어디에다가 숨겨두거나 살해하고 그의 행세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당장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아니, 저 인간을 남들 눈치 못 채게 숨겨두거나 살해할 수 있는 놈이 있나?’
그런 인간이 있다면 한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루벨라 님은 오지 않으셨군요.”
언제나 루벨라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와이그인지라 혹 루벨라도 동행하지 않았을까 살폈지만, 루벨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성녀님도 이번 전투에 살짝 피로를 느끼고 계셔서 말입니다. 밸리드 놈들이 상대라는 것만으로도 성녀님의 전투 의지가 활활 타오를 것을, 도시 제물의 의식까지 벌어졌으니 성녀님의 전투 의지가 남다를 수밖에요.”
“무리를 하셨군요.”
“그래도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이 많습니다.”
와이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성녀님의 경험이 부족했단 건 분명하지만요.”
“젊으시니까요.”
지크도 성녀의 무리를 탓하지 않았다.
“이것 참, 성녀님과 나이가 엇비슷한 지크 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래도 지크 님이 말씀하시면 묘한 설득력이 있단 말입니다.”
허허롭게 웃던 와이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슬슬 쥐새끼들을 찾아다니도록 하죠. 아니, 이제는 두더지 새끼들이라고 해야겠군요. 놈들의 신은 분명히 생선 대가리일 텐데 왜 땅만 파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와이그가 평소처럼 밸리드에 빈정거렸을 때,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쿠우!
스녹의 어깨에서 벌떡 일어난 노웸이 크게 울부짖었다.
“응? 아, 이런. 내가 말을 잘못했군.”
대지의 환수인 노웸이지만 그 겉모습은 영락없는 두더지다. 와이그의 두더지 비하에 노웸의 심기가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실언이었네. 내 사과하도록 하지.”
와이그가 정중히 사과를 했다. 노웸은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스녹의 어깨에 철푸덕 배를 깔고 엎드렸다.
그 모습을 와이그가 신기하게 쳐다봤다.
“대지의 환수라고 했죠? 언제 봐도 신기하기 그지없군요.”
“겉모습만이 아니라 능력도 대단합니다. 이번에도 도움을 받을 예정이죠.”
지크가 신호를 주자 스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웸도 코를 울린 후 스녹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스녹이 땅바닥에 손을 댔다.
“뭘 하는 겁니까?”
“밸리드 놈들을 찾는 겁니다. 솔직히 그 두… 쥐새끼들이 어느 곳에 땅을 파고 숨었는지 당장은 모르지 않습니까.”
두더지라고 하려 했다가 슬쩍 노웸의 눈치를 보고 지크는 말을 바꿨다. 다행히 노웸은 땅바닥에 코를 박고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지크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놈들은 분명 절벽 안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절벽을 무너뜨리려면 내부부터 붕괴시키는 게 가장 이상적이니까요.”
와이그도 지크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도 머리가 있는 이상 준비가 끝날 때까지 최대한 숨으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대지의 환수인 노웸과 그 계약자인 스녹이라면 놈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겠죠.”
“음, 확실히 무턱대고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낫겠군요.”
와이그는 지크 일행의 방법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아니, 방법이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밸리드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운 것이리라. 밸리드를 빨리 찾아내면 찾아낼수록 놈들을 더 빨리 족칠 수 있을 테니까.
와이그가 입을 벌려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이며 살기를 내뿜었다.
“놈들의 더러운 은신처만 찾아낼 수 있다면 놈들의 머리통을 터뜨리는 건 쉬운 일이지요.”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머리속으로 온갖 방법으로 밸리드의 머리통을 터뜨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와이그에게 지크가 단호하게 말했다.
“놈들이 도시 제물의 의식으로 얻은 힘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요새를 공략할 때는 결국 사용되지 않았죠.”
온갖 언데드와 밸리드 신도들 그리고 배신자들을 도륙할 때도 지크를 포함해 도시 제물의 의식을 알고 있는 자들은 연신 주변을 경계했다.
요새에 있던 자들에게서 뽑아낸 생명력은 분명 엄청나게 큰 힘이다. 만약 요새 공략전 때 밸리드가 그 힘을 진압군을 향해 사용했다면 지금처럼 수월하게 요새를 공략하진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 힘은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그 힘의 존재는 확실했고, 밸리드의 손에 있는 이상 그 힘이 되먹잖은 의도를 위해 사용될 건 뻔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 놈들이 그 힘을 이 절벽을 붕괴시키기 위해 사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도 지크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절벽을 붕괴시켜 강을 막는다는 게 말은 쉽지만 사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웬만큼 강력한 공격이 아니라면 잘 부서지지 않는다. 그것도 강물을 막아버릴 정도로 엄청난 암석을 떨궈낼 만큼 붕괴시키는 것이라면 더더욱.
당연히 생각나는 건 도시 제물의 의식으로 만들어낸 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밸리드 녀석들이라도 도시 제물의 의식으로 만들어낸 힘을 바로 다루지는 못합니다. 녀석들도 어느 정도 가공을 해야 하죠. 놈들이 지금 잠잠한 건 바로 그 가공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도 와이그 님과 같습니다. 그리고 가공이 끝나는 순간, 놈들은 망설일 것 없이 협곡을 붕괴시키겠죠.”
그리고 그건 막대한 비가 내리는 우기라는 시기와 합쳐져 순식간에 주변 영지에 수해라는 재앙을 내릴 것이다.
“역시 스녹 님에게만 맡기는 건 내키지 않는군요. 효율이 낮더라도 저도 놈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저도 같이 찾도록 하죠.”
지크도 스녹에게만 맡겨 놓을 생각은 없었다. 한스에게도 신호를 줘서 스녹을 제외한 셋은 절벽 널리 흩어졌다.
그러나 지크의 예상대로 결국 밸리드 놈들을 발견한 이는 스녹이었다.
그때까지도 비는 끝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