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0화
요새의 일각을 순식간에 무너뜨린 지크 일행. 하지만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요새 안으로 돌입할 공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재촉해 무너진 성벽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녹이 다시 한번 성벽에 손을 갖다 댔다.
“막아!”
위에서 발악하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성벽이 붕괴해 버리자 위기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모양이다.
다시 한번 지크 일행을 향해 맹공격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지크와 한스의 검에 모든 공격이 차단당했다. 그리고 그동안 스녹은 옆 성벽에서 그랬던 것처럼 성벽의 아랫돌을 모조리 빼버렸다.
우르르르릉!
성벽이 무너져 내리며 또 하나의 입구가 뚫렸다.
지크 일행은 만족하지 못하고 옆으로 또 한 번 움직였다.
그들의 성벽 무너뜨리기는 병사들이 무너진 성벽에 슬슬 도착하려 할 때 즈음 끝났다. 괜히 성벽을 더 무너뜨리려 하다가 아군이 성벽 잔해에 휩쓸릴 수도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요새에 뚫린 입구는 세 군데. 스틸월이 다시 요새를 탈환한다 해도 보수에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호루스 협곡의 조사를 진행해야 했다. 시간과 희생을 모두 줄이려면 요새 일부를 허무는 것쯤은 어쩔 수 없었다.
할 일을 끝낸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돌아봤다.
“됐다. 너희들은 가서 하려던 거 해.”
엘레나와 라라의 보호를 말함이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움직였다. 엘레나와 라라가 지금쯤 어디 있을지는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지크는 마지막으로 뚫린 성벽의 구멍을 쳐다봤다. 아직도 뿌연 흙먼지가 채 가라앉지 않은 그곳을 바라보며 지크는 잠시 생각했다.
‘성벽으로 올라가 적 병력을 작살 낼까, 아니면 성안으로 뛰어들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성벽부터 청소한다.’
이게 인간끼리의 싸움이라면 성안으로 뛰어드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 일단 지휘부를 작살 내면 흐름은 아군에게 극도로 유리해질 테니까. 아니, 그것만으로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전쟁은 평범한 전쟁이 아니다. 언데드를 이끄는 밸리드 토벌전. 포로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전장이다. 마지막 한 명의 밸리드 신도, 한 구의 언데드까지 박살 나야만 끝나는 전투.
‘병력을 한 명이라도 많이 도시 안으로 집어넣는 게 나아.’
그러려면 성벽 위에서 계속 공격을 하고 있는 적 병력을 쓸어버려야 한다. 성벽 위까지 올라가는 것도 어렵진 않았다. 성벽이 멀쩡할 때도 성벽을 밟고 올라갈 수 있는 지크다. 성벽의 잔해가 디딤돌 역할을 해주는 지금은 더더욱 쉬웠다.
툭!
지크는 가볍게 성벽 위에 발을 디뎠다. 그 순간 성벽 위에 있던 적들이 지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창들이 지크를 향해 쇄도했다. 그에 대항해 지크의 검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타타타탕!
거친 쇳소리가 짧은 순간에 여러 번 겹치며 언데드들의 창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지크는 텅 비어버린 언데드들의 품속으로 여유 있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기분 좋은 절삭음과 함께 지크에게 달려들던 언데드들이 우수수 조각났다. 지크는 그것들의 잔해를 밟으며 전진했다. 그리고 계속 검을 휘둘렀다.
퍼엉! 퍼엉!
언데드들 사이로 날카로운 물줄기들이 연이어 날아왔다. 밸리드 신도들의 공격이었다.
‘역시 빈약해.’
지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물줄기를 바라봤다. 요새 하나를 통째로 점거한 놈들치고 밸리드의 신도들은 얼마 없는 모양이었다.
만약 밸리드 신도들이 상당수 있었다면 당장 이런 조그만 물줄기를 쏘아 보내는 게 아니라 요새 옆으로 흐르는 강물을 대단위 의식을 사용해 동원했을 것이다.
‘애초에 요새에 스며든 밸리드 신도들이 별로 없었던 건가.’
도시 제물의 의식이라면 그다지 많은 신도들이 필요 없다. 포르티에서도 의식을 진행하던 건 부시장 자리에서 암약하고 있던 그로팀 한 명뿐이었지 않은가.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
‘밸리드 놈들이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수도 있어.’
그것도 요새 수성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제쳐둬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에.
생각나는 건 한 가지밖에 없다. 지크는 요새 너머 호루스 협곡을 바라봤다. 깎아지를 듯한 두 개의 절벽이 서로 마주 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다. 마치 자신의 키가 상대보다 더 크다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뽐내는 듯했다.
저만큼 커다란 덩치가 무너져 내린다면 당연히 강은 꽉 틀어막힐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도도함을 잃고 주변으로 그 덩치를 불리며 애먼 화풀이를 해댈 것이다.
자신의 앞을 갑자기 가로막은, 돌무더기로 만들어진 벽을 넘어설 때까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생각을 해봤자 의미가 없다. 당장은 이 요새를 점령하는 게 급선무다. 지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속도를 냈다. 그리고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버렸다.
콰아아앙!
저 멀리서 아련한 폭음이 들렸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요새 안으로 커다란 폭발이 이는 게 보였다.
엘레나가 본격적으로 참전한 것이다. 훌륭한 스승과 타고난 재능, 여러 경험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엘레나는 자신의 성장을 세상에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엄청난 화염 마법으로 적진을 초토화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군.’
아무래도 지금껏 거쳐온 소규모 전투와 지금의 대단위 전투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수많은 병력이 덮쳐오는 그 박력은 직접 겪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스녹 녀석이 잘 도와주는 모양이야.’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하는 돌덩이들이 그 추측에 신뢰성을 얹었다.
‘엘레나가 멘탈이 강한 까닭도 있겠지. 적이 언데드란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테고.’
마법이란 인간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데 무척이나 뛰어난 능력이다. 아마 단체로 태워버리는 것이 언데드가 아닌 인간이었다면 엘레나가 지금처럼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마법을 날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콰아앙!
요새 안에서 또 다른 폭음이 일었다. 이번 건 마법에 의한 것이 아닌, 검에 의한 것이었다.
한스와 라라가 쏟아져 들어가는 병력 앞에서 연신 검을 흩뿌리고 있었다. 가로막는 건 언데드건 밸리드 신도건 모조리 조각이 났다.
지크가 본 인간들 중 세 손가락에 들어가는 재능의 한스는 물론이고 라라 또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었다.
‘저런 인재인데 검을 버리게 하려 했다니.’
지크는 혀를 찼다. 자기 적성도 아닌 방패를 들고 지크 토벌대에까지 꼈던 그녀다. 타고난 재능은 정말로 압도적이다. 한스보다는 못하다지만 한스야 지크조차 감탄할 정도의 괴물이었으니 논외로 해야 한다.
지크는 슬쩍 눈을 돌려 라라를 들러리 및 액세서리 취급을 하려 한 놈이자 엄청난 기세로 요새를 돌파하고 있는 이를 쳐다봤다.
그렌 제너드도 당연히 이번 전투에 참여를 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어떻게든 남들보다 뛰어난 공을 세우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지크에게 절절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순수한 의도라면 좋았겠지만.’
당장이라도 성벽을 뛰어 내려가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접었다.
그렌의 동료들도 제법 활약을 하는 게 보였지만, 아무래도 지크의 일행보다는 손색이 보여 그다지 관심이 가는 편은 아니었다.
콰앙! 콰앙!
또 다른 성벽에서 와이그가 날뛰는 모습이 보인다. 루벨라를 비롯한 신관들이 압도적인 성력을 퍼부어 언데드들을 말 그대로 녹여버렸다.
거기에 스틸월 영지의 정예 기사들의 파도가 전장을 해일처럼 휩쓸었다.
스틸월의 병력에 카르위먼, 그렌의 일행 그리고 무엇보다 지크의 일행이 합류한 진압군은, 밸리드 세력이 아무리 요새란 방벽을 끼고 있더라도 그들을 무참히 쓸어버렸다.
전투는 반나절이 되지 않아 끝났다.
진압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 * *
전투가 끝난 후의 스티프 요새는 처참했다. 파괴되고 불타오르는 요새 내 건물들과 사방에 쌓여 있는 언데드들의 잔해와 시체. 특히 파괴된 요새의 성벽이 그 이미지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이번 전투에서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승자는 후일을 생각지 않고 그저 승리에 기뻐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진압군은 달랐다. 그들의 목적은 스티프 요새를 공략하는 게 아닌, 호루스 협곡에서 일어나고 있는 협잡을 박살 내는 것이다.
호루스 협곡은 넓다. 게다가 보면 알듯 그 지형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말 그대로 커다란 절벽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형상. 밸리드 놈들이 협곡 어디서 협잡질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저 험한 절벽을 타고 위까지 올라가 샅샅이 뒤져야 한다.
그리고 그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없는 만큼, 절벽 위를 조사하는 인원들은 초인인 기사나 성기사들이 맡게 되겠지만 적어도 협곡 아래를 조사하는 건 일반 병사들을 동원해야 했다.
시간 여유 없이 수색을 해야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병력을 당장 동원할 수는 없었다. 쉽게 끝났다고는 해도 잘 관리된 요새 하나를 공략한 것이다. 병사들의 피로가 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루스 협곡의 조사도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 당연히 쉬는 기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미헨이 일단 병사들을 향해 요새를 정리하라 명령했다. 병사들이 시체들과 언데드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요새 밖에 세워둔 진영으로 향했다. 그들은 일단 급한 대로 잠을 청할 수 있게 만들어 둔 그곳에서 짧게 눈을 붙인 후 바로 협곡 조사로 투입될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기운이 팔팔한 자들도 있었다.
지크 일행도 그중 하나였다.
“준비됐냐?”
한스와 스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라와 엘레나는 빠졌다. 엘레나는 마법사인지라 반나절간의 전투에서 상당한 피로감을 호소했고 라라도 아직 이 파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스와 스녹은 툭 하면 지크식 강행군에, 그 사이사이 혹독한 훈련을 받은 터라 아직까지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레이그도 데리고 갈까 했지만, 녀석도 처음 겪어보는 대규모 전투에 꽤나 지쳐 있었다. 억지로라도 끌고 갈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녀석을 그렇게까지 키워줄 필요는 없다. 망나니 치료도 슬슬 차도를 보이고 있기도 했으니, 굳이 저 위험한 곳에 처박을 필요성은 없었다.
“그럼 가자.”
지크는 둘을 이끌고 호루스 협곡으로 향했다.
총사령관인 미헨이 걱정을 했지만 지크는 그저 정찰만 할 것이라는, 일행이라면 누구도 믿지 않을 핑계를 대며 협곡행을 강행했다.
하지만 협곡으로 향하는 인원은 지크 일행만이 아니었다.
“제너드 씨도 협곡을 조사하시려는 겁니까?”
역시 이런 일에 빠질 그렌이 아니었다. 요새 옆 협곡 입구에서 만난 그렌이 지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가 급한 일이니까요. 여유가 있는 사람이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뻔뻔하게 정의로운 얼굴을 뒤집어쓴 녀석의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지크는 슬쩍 협곡을 쳐다봤다. 분명 밸리드 놈들이 저 협곡 어딘가에서 수작질을 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협곡을 무너뜨리려면 절벽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겠지.’
이미 녀석들이 호수를 만들려던 이유는 신전이 진압군의 손에 박살 난 이후로 사라졌지만, 지크는 놈들이 계획을 중단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복수심 때문에라도 계속할 거야.’
신전 앞에 거대한 호수를 만드는 게 아니라 주변 영지에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 계획을 계속 이어갈 것이다.
밸리드란 그런 족속들이었다.
안정적인 봉쇄를 위해서라면 절벽 두 곳을 동시에 무너뜨려야 하겠지만, 진압군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급하게 한쪽 면이라도 붕괴시킬 가능성이 높다.
지크는 바로 한쪽 절벽을 가리켰다.
“저희는 저쪽을 맡겠습니다.”
그렌은 다른 쪽 절벽을 맡으라는 의미다. 그리고 지크는 그렌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인원이 얼마 되지 않으니, 차라리 협력해서 한쪽씩 착실하게 살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시간이 없다 하더라도 적은 인원으로 대충 훑고 지나가다 놈들을 놓치는 게 더 위험하니까요.”
지크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제대로 짚었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