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9화
비올사를 떠난 진압군은 협곡까지 흐르는 강을 따라 진군했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탄 기사들이 성기사들과 함께 앞장섰고 그 뒤를 신관들이 따랐다. 그리고 병사들이 뒤를 이었다.
진군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호루스 협곡에 대한 조사를 시작해야 하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병력에 부담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외부 세력, 특히 플로드 백작가와 허구한 날 치고받고 하던 경험은 어디가지 않는다. 총사령관직을 맡은 미헨 타이너는 완벽하게 진군 속도를 조절했다.
그렇게 병력이 진군을 시작한 지 얼마. 그들은 스티프 요새에 다다랐다.
협곡의 입구에 수문장처럼 서 있는 요새는 굉장히 단단해 보였다. 스틸월 영지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만큼 평소에 꽤 신경 써 관리를 해온 것이다.
하지만 들인 노력이 무색하게도 요새 위에 흩날리는 깃발은 스틸월 영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저 토 나올 것 같은 깃발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크와 와이그가 혀를 찼다. 요새 위로 휘날리는 깃발들은 모두 밸리드의 것이었다. 요새가 밸리드의 손아귀에 넘어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저 놈들은 저 깃발을 정말로 자랑스럽다고 걸어놓은 걸까요? 감각이란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게 깃발로 만들기는커녕 어디 내보이기 부끄러운 문장이란 걸 알 텐데요.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 아닙니까.”
“지크 님도 참. 밸리드 놈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런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니까 밸르 같은 걸 믿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와이그 님?”
“성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솔직히 아직도 밸리드 놈들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데에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밸리드 신도가 될 정도로 저능한 지능을 갖고 있으면서 대체 어떻게 언어를 습득할 수 있었을까요?”
사이좋게 밸리드를 까는 담소를 나누는 지크와 루벨라와 와이그. 전투를 앞두고 있는 이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여유가 넘쳤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여유를 가진 이들은 그들을 포함해 무척이나 소수였다. 많은 경험을 쌓은 스틸월의 병사들도 목숨을 건 전투를 앞두고는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예라는 직함이 어딜 가는 건 아닌지, 그들은 긴장이란 감정을 장애가 아닌 전투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 바꿨다.
요새에 밸리드의 깃발이 나부끼는 걸 본 진압군은 경계를 위해 일부 병력을 빼놓은 뒤 바로 진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지크는 요새를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일행과 루벨라, 와이그도 지크와 함께 움직였다.
“밸리드 놈들이 어떻게 요새 전체를 손에 넣었나 생각을 했는데, 저 짓거리를 했군요.”
아마 요새 내 고위 상층부들을 대다수 포섭했으리라고 생각이 되긴 했지만, 지크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요새 내 주둔군 전부가 밸리드에게 넘어갔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당연히 밸리드가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요새를 장악하려 했을 때 만만치 않은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새는 결국 밸리드에 떨어졌다. 사람들은 처음 요새에 걸린 밸리드의 깃발을 봤을 때 결국 요새 주둔군의 저항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틀린 모양이었다.
“애초에 저항 자체를 못 했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지크는 슬쩍 옆을 쳐다봤다. 루벨라가 그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인상으로 요새를 쏘아보고 있었다. 작게 이를 가는 소리까지 들리는 게 그녀가 얼마나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런 되먹잖은 짓거리를…!”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위협적이다. 하지만 지크는 그녀를 이해했다.
‘어쩔 수 없지. 그녀 인생 최악의 시기에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 현실로 일어난 거니까.’
지크는 다시 한번 요새의 성벽 위를 바라봤다.
날카로운 창날이 반짝인다. 과연 스틸월 영지에서도 중요 요새였던 만큼 무기의 상태가 좋다.
하지만 그 무기를 갖고 있는 자는 예전과 같은 스틸월의 정예병이 아니었다.
피부는커녕 근육조차 없이 하얀 뼈를 그대로 드러내는 외관. 텅 빈 동공에서 불길하게 어른거리는 소름끼치는 빛.
언데드. 그 중에서도 스켈레톤이라 불리는 존재가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스켈레톤 아니, 언데드는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성벽 위에 서 있는 수많은 언데드가 보인다. 그것들은 밸리드 신도들의 지휘를 받으며 진압군을 막아내기 위해 무기를 들고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와이그가 불쾌한 투로 입을 열었다.
“도시 제물의 의식. 빌어먹을 놈들이 개 같은 짓거리를…!”
예전, 회귀 후 지크가 처음 루벨라와 만났을 때 포르티에서 진행되고 있던 끔찍한 음모. 그때의 음모는 지크의 등장으로 박살 났다.
하지만 아무래도 스티프 요새에는 지크 같은 인물이 없었던 모양이다.
뒤에서 한스가 다른 일행에게 도시 제물의 의식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 어렴풋이 들으며 지크는 현 상황을 냉정히 파악하기 시작했다.
“많은 병사들이 언데드로 변해 우리를 공격할 건 확실하군요.”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죽여 카르나 님의 품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아쉽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최선이에요.”
분노를 억누르며 와이그가 말했다. 지크도 이견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언데드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데드만 신경 쓸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도시 제물의 의식에서 언데드 군단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생명력을 빨아들인 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에 관해서는 와이그도 적잖이 걱정이 되는지 그의 목소리가 침중해졌다.
“그래도 자칫 포르티에서 만들어질 뻔한 힘보다는 작을 겁니다. 사람 숫자가 차이가 나니까요.”
“그다지 안심되는 말은 아니군요.”
와이그가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곧 그의 분위기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역전의 명장인 그인 만큼 감정을 조절하는 데 있어서도 노련했다.
“그래도 저 요새 공략을 포기할 순 없으니 그저 조심할 수밖에요. 그러니 성녀님도 분노는 억눌러 놓으십시오. 그 분노를 잘 벼려서 밸리드 놈들을 쓸어버릴 때 사용하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루벨라는 잠시 요새를 노려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지크는 살짝 진저리를 쳤다.
‘회귀 전 생각나네.’
그렌과 같이 자신을 향해 덤벼들던 그녀의 모습이 딱 저랬다. 물론 자신이 죽을 때 울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투 때 보였던 그녀의 박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루벨라와 와이그가 진영 안으로 사라진 후, 지크도 일행을 데리고 진영 안으로 들어갔다.
전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우르릉!
앞으로 펼쳐질 전쟁을 한탄하듯,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 들어찬 하늘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진압군의 병력이 요새 앞에 나란히 줄지어 섰다. 정말로 전투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긴장된 표정으로 병사들이 요새를 쳐다본다.
“공격하라!”
사령관의 커다란 외침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우와아아아아!>>
병사들이 거대한 함성을 내지르며 요새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지축이 뒤흔들린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그 위압감은 무시무시했다.
그에 비해 스티프 요새는 조용했다. 원래 말을 할 수 없는 언데드들은 물론이고 군데군데 보이는 밸리드의 신도들 또한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함성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전투 의지가 적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종교적 광기로 무장한 그들의 전투 의지는 진압군보다 훨씬 높을지도 몰랐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덮치는 것처럼 진압군이 요새를 향해 뛰어온다. 그런데 진압군 앞으로 점 몇 개가 보였다. 몇 명의 사람들이 병사들보다 훨씬 더 앞에서 요새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지크와 한스, 스녹이었다. 다리에 마력을 두른 지크와 한스, 거대하게 변한 노웸 위에 타고 있는 스녹의 속도는 병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병사들을 뒤로 멀찌감치 따돌리고 그들은 오로지 요새를 향해 돌격했다.
고작 세 명과 한 마리. 누가 봐도 요새를 무너뜨리기엔 어림없어 보이는 숫자다. 요새의 병력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다. 고작 그들에게 사용하기에는 화살이 아깝다는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완벽히 빗나갔다.
지크와 한스, 스녹은 순식간에 요새의 아래에 도달했다.
지크와 한스가 마치 스녹을 호위하는 것처럼 양옆으로 둘러쌌다. 스녹이 성벽에 손을 갖다댔다. 스녹의 시선이 지크와 마주쳤다.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웅!
스녹의 손에 대지의 마력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 마력은 스녹의 손을 타고 성벽으로 순식간에 흘러들었다.
그그그극!
성벽을 이루고 있던 잘 손질된 돌덩이 하나가 뽑혀 나와 땅에 뒹굴었다. 사람보다 거대한 돌덩이가 마치 깃털같이 하늘을 날아 지면에 떨어지는 모습이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그그그그극!
성벽을 이루고 있던 돌덩이들이 계속해서 뽑혀나간다. 그것도 성벽의 아랫돌만이 그랬다.
거대한 돌덩이로 쌓아 올려나간 성벽 아래의 돌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쿠르릉!
답은 붕괴다.
성벽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소리는 덤이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것인지 성벽 위에 있던 병력들이 지크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화살비가 쏟아지며 그 사이로 밸리드의 신관이 날린 게 분명한 날카로운 물줄기가 날아왔다. 성벽 바로 위에서는 뜨거운 물과 돌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지크와 한스는 괜히 거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웅! 후웅! 후웅!
지크가 검을 휘둘렀다. 평소의 윈두르가 아닌, 그저 잘 들고 튼튼한 게 전부인 평범한 검.
하지만 라일라에게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지크의 검기는 날아오던 화살들을 모조리 쳐냈다. 떨어지는 돌들도 갈랐으며 뜨거운 물은 검풍을 만들어 주변으로 흩어버렸다.
한스도 마찬가지.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번쩍이는 순간 그들은 노리던 모든 공격 수단이 깔끔하게 제거됐다.
그 와중에도 스녹은 계속해서 성벽의 아랫돌을 빼냈다.
콰르르르르릉!
결국 스티프 요새의 성벽이 엄청난 흙먼지를 뿜어내며 주저앉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있던 언데드들도 붕괴에 휘말려 떨어져 내렸다.
누구도 공략하지 못할 것처럼 도도하게 서 있던 요새의 위용을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허망한 최후였다.
<<우와아아아아!>>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사실 그들은 요새를 향해 내달리면서도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공성 병기가 전혀 없었던 탓이다. 하다 못해 성벽에 걸치고 올라갈 사다리조차 없었다.
아군이 성벽을 붕괴시킬 테니 그 곳으로 진입하면 된다고 듣긴 했지만, 눈앞의 성벽은 너무도 튼튼해 보여 저것이 붕괴될 거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한데, 지금 그 철벽같던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당연히 진압군의 사기는 드높아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