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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68화 (468/628)

제468화

“영향력이라면 얼마나 높은 겁니까?”

지크가 묻자 와이그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저희도 서류를 검토하다가 스티프 요새에 대해 알게 된 것이라서요. 백작님을 찾아온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스티프 요새는 엄연히 스틸월 백작령에 속해 있는 요새이니, 그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백작의 협력이 필수였다.

지크는 스틸월 백작을 쳐다봤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에 백작의 얼굴에 희미한 근심이 엿보였다.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음에도 미미하게 새어 나오는 감정을 막지 못하는 것이, 백작이 지금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알 바 아니지.’

스틸월 영지에 대한 걱정이 먼지만큼도 없는 지크가 백작을 쳐다봤다.

“들으셨죠?”

“…그래.”

꾹 닫혀 있던 백작의 입이 열렸다. 고뇌가 잔뜩 새겨진 목소리가 방 안에 나지막이 깔렸다.

“아는 것 있으십니까?”

“사람을 보냈다. 곧 보고가 올라오겠지.”

잘 모른다는 소리다.

‘하긴, 비올사에 밸리드의 끄나풀들이 스며들어 오는 것도 모르고 있던 백작이 멀리 떨어진 스티프 요새에 대해서 알 리가 없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지크는 다시 서류에 시선을 뒀다. 스티프 요새에 밸리드의 세력이 심어졌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 서류에도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그저 밸리드 놈들이 스티프 요새에 있는 세력들을 이용해 계획을 진행한다는 정보가 있었다고 묵묵히 쓰여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이란 건 당연히 바로 호루스 협곡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지크가 입을 열었다.

“생선 대가리 놈들이 요새 간덩이가 정말로 부었나 봅니다. 영지 세 개를 뒤덮는 호수를 인공적으로 만들겠다고 요새 하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다니요.”

“매일 물속에 대가리를 처박느라 분수를 파악하는 법을 까먹은 모양입니다.”

“와이그 님도 참. 그놈들은 원래 분수를 파악하는 법 따위는 모르잖아요.”

“이런. 생각해보니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성녀님의 말씀대로 놈들이 분수를 파악하는 법을 알 리가 없죠.”

와이그는 무척이나 시원스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아마 밸리드의 신도들이 둘의 대화를 들었다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칼 들고 난입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발언이었다.

그래봤자 역으로 목이 달아날 테지만.

“하지만 분명 골치가 아픈 것도 사실입니다. 밸리드 놈들이 스티프 요새 안에 생각 이상으로 세력을 구축했다면 호루스 협곡을 조사하는 것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를 테니까요.”

“어쩌면 와이그 님 생각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지크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생각 이상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스티프 요새에 밸리드 놈들이 영향력을 끼치는 정도가 아니라 요새가 통째로 밸리드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면, 우리는 호루스 협곡에 대한 조사를 하기도 전에 스티프 요새를 먼저 점령해야 합니다.”

방 안으로 충격이 내달렸다. 백작과 트레얼이 눈을 부릅떴고 루벨라와 와이그 또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되었겠습니까.”

트레얼이 지크의 말에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백작가 안에 밸리드 놈들의 끄나풀이 그렇게 많을 거라고는 누가 예측했을까요.”

“…….”

트레얼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럼 정말로 요새에 대한 공성전을 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루벨라가 한숨 쉬듯 물었다.

“사태가 최악으로 흐른다면 말이죠.”

“지크 님은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시나요?”

“제대로 된 정보가 없으니 정확한 추측을 할 순 없죠. 하지만 개인적으론 상당히 높다고 생각합니다. 녀석들이 이 일에 들인 공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죠.”

사람들은 침묵했다. 사건이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백작이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분노를 넘어 탈력감이 몸을 덮쳤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누릴 시간조차 없었다. 지크가 백작에게 말했다.

“정말로 스티프 요새를 공략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지금처럼 기사와 병사 일부를 파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본격적으로 군을 일으킬 필요가 있죠. 언제나 가능하겠습니까?”

“…아직 요새가 밸리드에게 넘어갔다는 확신은 없다.”

“그래서 확신이 든다면 움직이시겠다는 겁니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요. 저놈들이 호루스 협곡을 무너뜨리기 위한 준비가 얼마나 진척됐을지도 모르는 형국 아닙니까. 괜히 시간을 끌다가 협곡이 무너진다면 엄청난 피해가 나올 겁니다.”

백작은 피곤한 듯 눈가를 꾹꾹 눌렀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효과를 보기에는 백작에게 몰려든 짐이 너무 무거웠다.

“트레얼.”

“네, 백작님.”

“지금 당장 중앙군에 대기령을 내리게. 강철검 기사단과 강철창 기사단도 모두 소집하고. 필요할지 모르니 징병을 할 준비도 일단은 끝내놓게.”

“알겠습니다.”

트레얼은 다른 이들에게 살짝 묵례를 해 예를 표하고는 방을 나갔다.

“저희도 준비를 하도록 하죠, 성녀님.”

“알겠어요.”

루벨라와 와이그 또한 일어섰다. 지크도 더 이상 이 방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특히 다른 사람이 모두 떠난 후 백작과 단둘이서만 남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저도 그만 가보도록 하죠.”

지크도 일어섰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잡혔던 임시 회의가 끝났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며 백작이 보냈다는 사람이 스티프 요새의 상황을 알아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백작이 보낸 사람이 요새 안에서 요새 사령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요새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단 소식이 잇달아 들어왔다.

지크가 말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 * *

스티프 요새가 밸리드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백작가의 움직임은 격렬해졌다. 백작가는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총동원해 원정군을 꾸렸다. 소식을 들은 카르위먼의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거기에 합류했다.

당연히 지크도 끼어들었다. 그를 따라 한스와 스녹, 엘레나, 라라도 원정군에 합류했다.

지크는 그레이그도 이번 원정에 끌어들였다.

“잘 쉬었냐?”

지금껏 계속 그레이그를 끌고 다닌 지크였지만, 아무래도 익숙지 않은 강행군에 그레이그의 피로도가 점차 높아지는 게 보여 저번 신전 급습 때에는 그레이그를 대동하지 않고 휴식을 줬다. 겸사겸사 제자들에게도 휴식을 줬기에, 이번 원정에서 그들의 컨디션은 굉장히 좋았다.

“그래.”

그레이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굳은 얼굴과 필요 이상으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가 무척 긴장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뭐, 당연히 그럴 테지.’

지금부터 하는 건 어엿한 전쟁이다. 첫 출진인 그레이그가 긴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작 부인은 그레이그가 이번 전투에 참가하는 것에 굉장히 반대를 표했다는 모양이지만 지크는 싹 무시했다. 백작 부인의 반대 따위 지크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이기는커녕 귀 기울일 이유조차 없는 소음일 뿐이었다.

백작마저 반대를 했다면 조금 귀찮아졌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백작은 그레이그의 참전을 별 고민 없이 허락했다. 아마도 사태가 점점 심각해짐에 따라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그레이그의 경험을 쌓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번은 승리 가능성이 높다.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라고는 스티프 요새 하나뿐이다. 게다가 스티프 요새는 어디까지나 호루스 협곡에서 오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지어진 요새다. 반대쪽인 스틸월 영지에서 오는 병력을 상대하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성기사들과 신관들마저 전쟁에 참가한다. 그중에는 성녀인 루벨라와 카르위먼 성기사 중 최강인 와이그마저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계자의 경험을 쌓아주기에 이번만큼 좋은 기회도 없었다.

혼란한 정세 속에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도 이런 기회를 놓칠 정도로 백작은 녹록지 않았다.

“다행이네. 그래도 긴장을 안 할 순 없겠지만 네 실력대로만 해라. 그러면 적어도 죽지는 않을 테니까.”

일단은 치료(?) 중인 녀석이니 지크는 답지 않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했다.

“알았어.”

그리고 답지 않게 그레이그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의 그 돌팔이 같은 처방이 정말로 효과가 있었던 듯 그레이그는 슬슬 얼마 전까지의 그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지크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적어도 부모님의 원수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 날아오진 않았다.

그레이그를 다독인 지크는 이번엔 자신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여, 컨디션들은 괜찮냐?”

지크의 질문에 네 명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한스가 대표로 대답했다.

지크는 네 명의 얼굴을 찬찬히 뜯었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예상대론가.’

한스와 스녹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혈색도 좋고 피로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을 앞뒀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엘레나와 라라는 그렇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지.’

한스와 스녹이야 지크에게 끌려다니며 정말로 온갖 경험을 해 온 자들이다. 그 경험의 밀도는 이 세계에서 꽤 많은 일들을 겪고 극복했다는 사람들과 비교해도 능가했으면 능가했지 절대 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와 라라는 달랐다.

엘레나는 지크 일행에 합류한 시간이 많이 늦은 편이었고 그전에는 마탑에서 공부만 했었다. 라라도 얘기를 나눠본 바로 썩 경험을 많이 쌓은 편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끌 ‘용사 파티’를 위해서라면 라라에게도 충분히 경험을 쌓게 만들어야 했지만, 그렌 제너드는 라라가 검을 포기할 낌새가 보이지 않자 그녀가 경험을 쌓을 수 있을 만한 상황을 모두 통제한 것이다.

‘하여간 들으면 들을수록 찌질한 놈이야.’

그렌의 성격이야 어떻든, 엘레나와 라라는 전쟁, 그것도 인간과의 전쟁이라는 것에 꽤 큰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녀들 정도의 인재라면 쉽게 적응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녀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레이그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그레이그는 백작가의 기사들이 알아서 지킬 터.

“한스. 스녹.”

“네!”

“네!”

“이번 전투에서 너희들이 책임지고 지켜라.”

지크는 한스를 보며 라라에게, 스녹을 보며 엘레나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저 둘이 지켜준다면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고 해도 죽진 않을 것이다.

엘레나는 다소 밝아진 표정을 지었지만 라라는 오히려 살짝 인상을 썼다. 그게 두 사람의 성향을 무척이나 잘 보여주고 있어 지크는 살짝 웃음이 나왔다.

‘마법사와 검사의 차이겠지.’

후방에서 마법을 난사하는 게 보통인 마법사와 앞장서 적을 격퇴하는 검사는 아무래도 지켜진다는 상황에 갖는 상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라라도 거부하진 않았다. 그녀도 미숙한 자신이 괜히 자존심을 내세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오히려 이번 경험을 통해 실력을 상승시키겠다고 그녀는 열의를 불태웠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원정군은 스티프 요새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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