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7화
“최선을 다해 무대를 만든 이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야.”
“당연히 평가는 별개지?”
“그럼! 무대를 끝까지 봐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못할망정 좋은 평가까지 강요를 한단 말이야? 양심은 없어도 상도덕은 있어야지. 어차피 무대를 만든 주인공의 ‘나는 정말로 잘났어!’, ‘나는 이 세상 최고야!’ 같은, 자아도취용 무대가 될 게 뻔한데. 오히려 무대를 만든 놈이 나를 떠받들어야 해. ‘이딴 멋대가리 없는 무대를 그토록 진지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이야.”
“그건 그래.”
라일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 분명 그렌 제너드는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망상 속에 몸부림치는 멍청한 녀석이고 회귀의 힘도 잃었다지만, 그가 거쳐온 엄청난 시간은 분명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물론이야. 나도 그것까지 무시할 생각은 없어.”
아무리 그렌이 망상 추구형 병신이라고는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을 하나의 목적에만 파고들었다면 일가를 이루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지크는 회귀 전 그렌에게 한 번 패하지 않았던가.
“다만 예전과는 반대로 녀석은 이쪽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데 반해, 이쪽은 저쪽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파악하고 있지. 그냥 저 녀석만 쭉 유리하던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달라.”
지크는 히죽 웃었다.
“정말로 녀석을 골려 먹기에 이만큼 좋은 환경도 없지.”
“너 그 웃음 아무 데서나 보이지 마. 익숙한 나도 바로 멀어지고 싶은 만큼 소름 돋으니까.”
아무리 지크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식사가 끝났다. 지크는 식탁과 의자, 빈 접시 등을 모조리 마법 상자 안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라일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간다.”
“그래. 네가 호루스 협곡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성과를 내볼게.”
“누누이 말했다만 급할 건 없어. 어차피 이번 사건은 단시간에 끝나진 않을 테니까.”
라일라를 다독인 지크가 유적을 나가려 할 때였다.
꾸욱!
뒤에서 뭔가가 등을 눌렀다. 지크는 힐끔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데….’
지크에게 이렇게 가까이 기척을 숨기고 다가올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어마어마한 강자일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그런 존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자라고 해도 등 바로 뒤까지 접근하는 동안 지크가 그 기척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그렇다면 등을 누른 원인은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뜻.
지크는 바로 짚이는 데가 있었다.
스윽!
뒤에 잘 메어놨던 윈두르를 꺼내 들었다. 핑계를 댈 생각도 없다는 듯 윈두르는 구부린 날 하나를 계속 유지했다.
“또냐.”
이미 자신의 검의 일탈 행위(?)를 본 것도 여러 번.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 이번엔 또 뭐냐?”
검한테 말을 건다는, 다른 사람이 본다면 미쳤다고 생각할 만한 언행을 지크는 태연히 했다. 하지만 말을 건 지크도 그걸 보는 라일라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윈두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만 꽂혀 있었다.
그리고 윈두르는 둘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스윽!
검날이 움직여 한쪽을 가리킨다. 라일라가 있는 쪽이었다.
‘수정을 가리키는 건가?’
지크도 라일라도 처음엔 윈두르가 라일라 뒤에 있는 거대 수정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크가 수정에 다가가기 위해 움직이자 윈두르의 날이 가리키는 방향이 변했다.
지크는 윈두르에 시선을 두고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그때마다 윈두르는 계속 날을 휘었다.
그쯤 되니 윈두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지크도 라일라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
라일라가 당황한 눈빛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인데?”
지크는 라일라를 가운데 두고 작은 원을 그리며 돌았다. 윈두르는 계속 라일라를 가리켰다.
“일단 너한테 용무가 있는 건 확실한 모양이야. 짐작 가는 거 있어?”
“아니. 전혀.”
뜬금없이 윈두르의 표적(?)이 된 라일라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흐음.”
지크는 윈두르의 의도를 유추하려는 듯 나뭇가지같이 생긴 검신을 몇 번이고 훑었다. 다음에는 윈두르와 라일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자!”
지크가 라일라에게 다가와 윈두르를 건넸다.
“어, 어?”
아니, 그건 억지로 떠넘긴다는 표현이 옳았다. 당황한 라일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크는 라일라의 손에 윈두르를 억지로 쥐여 줬다.
스으윽!
순간 계속 라일라를 가리키고 있던 윈두르의 날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치 원하는 바를 이뤘다는 것 같았다.
“원래대로 돌아갔어?”
“역시.”
예상이 맞았다.
“너한테 용건이 있는 모양이야.”
“윈두르가 왜?”
“나야 모르지.”
분명 지크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는 그의 애검이었지만 단 한 번도 친절하게 설명해 준 적이 없는 검이기도 했다.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크는 그 의견에 반대였다.
‘저 녀석, 설사 말을 할 줄 안다고 해도 제 할 말만 하고 입을 꾹 다물 놈이야.’
지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기를 해도 좋았다.
“그래도 생각을 해보자면 이 유적의 조사에 필요해서가 아니겠냐?”
지크가 유적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떠오르는 이유라곤 솔직히 그것밖에 없었다. 라일라도 이견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짐작된다고 해서 모든 의문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어떻게?”
라일라가 어려운 얼굴로 물었다. 지크도 대답이 궁했다.
“뭐, 그 녀석을 갖고 연구를 하다 보면 뭔가 방법이 나오지 않겠냐.”
윈두르는 새침데기 같은 녀석이지만 할 때는 하는 녀석이기도 했다. 자기가 움직여야 할 때가 된다면 알아서 라일라를 도와줄 것이다.
“잠깐! 설마 윈두르를 두고 가게?”
라일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크의 발언으로 보건대 정말로 윈두르를 두고 갈 셈인 것 같았다.
윈두르는 클로원의 자취를 쫓는 단서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이자 지크의 애검이었다. 그것도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검. 한데 지크는 그걸 너무도 쉽게 라일라에게 맡기려 하고 있었다.
“윈두르가 네게 가고 싶어 하니 별수 있냐. 생각해보면 그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윈두르가 있으면 네가 마음대로 유적을 나갔다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네 주무기잖아.”
“그래. 주무기지. 하지만 내가 누구냐. 천하의 지크 님 아니겠냐. 윈두르가 분명 다른 검들과 비교를 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성능 좋은 검이라고 해도 검은 검이다. 평범한 검을 든다고 해도 나는 전혀 문제없어. 검에 휘둘릴 정도로 허접한 녀석이 아니니까.”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말에서 거짓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완벽한 그의 본심이었으니까.
라일라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이 거절을 해봤자 지크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안 것이다. 게다가 윈두르가 정체된 조사를 해결할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분명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녀가 할 최선의 말은 이것이었다.
“알았어. 윈두르는 내가 잠시 맡아둘게. 그리고 다음에 볼 때는 꼭 성과를 보여주겠어.”
“그거면 충분해.”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크는 유적을 나왔다. 윈두르가 없으니 라일라가 유적의 입구까지 따라와 문을 열어줬다.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굳게 새겨진 결의가 생생했다.
아마 다음에 유적을 방문했을 때는 유적에 대한 성과를 충분히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허전하긴 하군.’
지크는 슬쩍 등을 매만졌다. 언제나 그곳에 메여 있던 검이 만져지지 않자 조금 어색했다. 그러나 금방 적응될 것이다.
지크는 마법 상자에서 검 하나를 꺼냈다. 윈두르나 에스텔레이드, 토르니움 같은 극강의 검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명검 소리를 들을 만한 검이다. 지크는 검을 허리춤에 찼다.
그렇게 지크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나오셨군요, 도련님.”
복도에서 마주친 트레얼이 지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크가 유적에서 나오는 걸 기다린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성녀님과 와이그 님께서 오셨습니다. 두 분께서 도련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아마 밸리드의 신전에서 찾은 정보를 갖고 온 모양이다.
“어딥니까?”
“지금 백작님과 함께 응접실에 계십니다.”
“가 보죠.”
지크는 트레얼을 따라 백작가의 응접실로 향했다.
* * *
지크는 응접실 의자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얼마 전 봤던 광경이 다시 재현되어 있었다.
백작과 지크, 루벨라, 와이그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고 트레얼은 백작의 뒤에 꼿꼿이 서 있다.
찻잔을 내려놓고 지크가 입을 열었다.
“밸리드 신전에서 나온 서류들의 정보를 가져오셨다고요.”
“그래요.”
루벨라가 자기 옆에 있는 서류를 들어 보였다. 서류는 몇 장 안 됐다. 하지만 거기엔 분명 밸리드 신전에 있던 서류들의 정보를 가려내고 요약한 정보가 들어 있을 것이다.
루벨라는 그걸 지크의 앞에 내밀었다.
“대다수는 영지에 있는 다른 신전들의 위치와 상태에 대해서 적혀 있었습니다. 상당수는 이미 찾아낸 신전들이라 별로 쓸모없는 정보였지만, 몇몇 신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이어서 당장 성기사들을 급파했습니다.”
와이그가 부연 설명을 했다. 지크는 서류를 들어 찬찬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방 안에는 지크가 서류를 뒤적이며 내는,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대강 정보를 훑어본 지크는 슬쩍 스틸월 백작을 쳐다봤다. 착각일까.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딱딱하게 굳어 있는 듯 보였다.
‘하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하겠지.’
지크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일단 제 추측이 맞았다는 게 증명됐군요.”
“네. 밸리드 놈들이 거대한 호수를 만들려 했던 게 확실해졌어요.”
서류 중 일부는 호수를 만들기 위한 계획들이 쓰여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이미 지크가 추론한 것이었으니까. 물론 지크의 추론이 정확했다는 걸 증명하는 자료로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크는 그에 대해서도 썩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렌 제너드의 존재가 그렇게 만들었다. 만약 지크가 잘못된 정보를 말했다면 그렌이 뽐내듯 그 추론이 틀렸다고 말했을 테니까.
즉, 그렌이 입을 닥치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크는 자신의 추론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서류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백작의 얼굴을 굳게 만든 원인일 터였다.
“스티프 요새라….”
지크가 그 말을 입에 담은 순간 백작이 신음을 흘렸고 트레얼이 한숨을 쉬었다.
스티프 요새. 그것은 호루스 협곡 근처에 있는 요새였다.
호루스 협곡은 영지의 경계와 꽤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특성상 군사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다.
그 근처에서 스틸월 영지로 수월하게 진군할 수 있는 진격로는 호루스 협곡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스틸월 백작가는 호루스 협곡을 틀어막는 위치에 요새를 건설했고, 그것이 바로 스티프 요새였다.
서류에는 바로 그 스티프 요새에 대한 정보가 쓰여 있었다.
‘스티프 요새에 밸리드의 영향력이 극히 높다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