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66화 (466/628)

제466화

“…만들어진다고요?”

“네. 밸리드 이 발칙한 생선 대가리 놈들이 발상의 전환을 한 겁니다. 물가 근처에 신전을 세우지 말고 신전 앞에 거대한 호수를 만들자고 말이죠.”

“…그게 가능합니까?”

와이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의심의 눈초리가 지크를 향해 쏟아졌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호수라면 지크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마력을 능숙하게 다루는 초인들 몇 명이 모인다면 작은 저수지 같은 것 정도야 며칠이면 순식간에 만들 수 있을 테니.

하지만 호수의 규모는 너무 컸다. 정말로 국가에서 마음먹고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은 무리였다.

게다가 혹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밸리드가 이런 호수를 만드는데 주변 영지에서 가만히 두겠는가. 설사 스틸월 영지가 밸리드와 내통하고 있다고 해도 다른 영지까지 호수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이상 이런 대규모 호수를 몰래 만드는 건 무리였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죠. 하지만 정말로 이 모형이 현실의 지형을 그대로 나타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크는 손가락을 들어 모형의 옆을 가리켰다.

“이곳을 막아버리면 말이죠.”

“거기 뭐가 있나요?”

“성녀님은 이곳 지리에 대해 잘 모르시겠지만, 이 모형으로 표현된 지형 너머, 그러니까 제가 가리키는 곳 즈음에 굉장히 특이한 지형이 하나 있습니다.”

“호루스 협곡 말씀이시군요.”

그렌이 끼어들었다. 지크가 주도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아마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려 하는 모양이다.

‘유치한 녀석.’

저 정도면 비웃음을 넘어 동정심까지 들 정도다. 물론 지크도 그렌이 주목을 받는 걸 방해하겠다는 의도로 이 되도 않는 추리극을 펼치고 있는바, 근본으로 따지자면 그렌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지크는 그에 관해서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제너드 씨는 잘 아시는군요.”

“어떤 지형인가요?”

루벨라가 물었다.

“양옆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들어선, 폭이 좁은 지형입니다. 절벽 사이로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죠.”

“과연! 그곳을 막는다면 강…!”

“네, 제너드 씨의 생각이 맞습니다.”

끼어들려는 그렌의 말을 지크가 다시 가로챘다. 적어도 여기서 그렌에게 필요 이상으로 발언할 기회를 줄 생각은 지크에겐 눈곱만큼도 없었다.

물론 억지로 그렌의 말을 끊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게 했다.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그렌의 생각을 긍정한다는 식으로 말을 이끌었다.

실제로 지크가 말을 끊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크의 말로 인해 지크와 그렌 사이의 대화를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던 루벨라, 와이그와 말이 끊긴 그렌 본인뿐.

“어떠한 방법으로든 이 협곡 자체를 무너뜨린다면 갈 곳 잃은 강물이 범람해 주변 땅을 뒤덮겠죠. 지대가 낮으면 낮을수록 피해가 클 겁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게 이 호수라는 겁니까.”

와이그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놈들. 이제는 하다하다 자기들 신전에 필요하다고 멀쩡한 땅을 수몰시키겠다니.”

“어쩌면 정말로 그 바퀴벌레들에게 어울리는 짓일지도 몰라요. 자기 집 짓겠다고 주변에 있는 대로 민폐를 끼치는 게 딱 해충의 행동 원리잖아요.”

그 지위에도 외모에도 어울리지 않는 루벨라의 폭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루벨라를 바라봤다.

특히 땅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모두 책상 위로 올려놓고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들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는 이를 외면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가 아니니만큼 그들도 슬슬 현실을 볼 때가 된 것이다. 절대로 루벨라가 저런 말들을 쉽사리 내뱉게 만든 일등 공신이 지크 자신이어서가 아니었다.

“아마 시기는 한 달 뒤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그때 즈음해서 이 지방에 우기가 올 겁니다.”

“…비가 평소보다 많이 오는 시기를 잡아서 협곡을 무너뜨려 강을 막는다. 확실히 호수를 만들기엔 가장 알맞은 시기로군요.”

와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바로 그 호루스 협곡이란 곳을 조사해야겠습니다.”

“아마 밸리드 녀석들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지 않다면 이미 상당한 준비를 해놓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협곡을 무너뜨려 강물을 막는다는 계획이 하루 이틀 준비한다고 실행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조사를 진행해야겠군요.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준비가 덜 끝났을 때 말입니다.”

와이그가 루벨라를 쳐다봤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대한 보고와 협곡의 조사를 맡을 사람들을 꾸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방에 혹 다른 정보가 있진 않을지 수색해 주세요.”

성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다른 이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루벨라는 와이그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첼시와 윈스틴이 질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카르위먼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위 권한이 있는 성녀와 그 성녀의 호위를 도맡으며 카르위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성녀의 기사. 두 사람이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지위를 가장 싫어하는 자들에게 빼앗겼으니 두 사람의 반응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여기서 루벨라, 와이그를 노려봐 봤자 얻을 건 없다. 오히려 그런 기색을 다른 성기사들이 눈치챈다면 입지만 좁아질 뿐이다. 때문에 둘은 지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지위를 갖고 있는 저 둘을 끌어내릴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면서.

루벨라 와이그에 이어 지크도 방을 떠나기로 했다. 그도 협곡에 대한 대비를 하려는 것이다.

‘저 서류들이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협곡에 대한 정보가 먼저야.’

어차피 저 정보들 중 중요한 것들은 잘 정리되어 루벨라와 와이그에게 보고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크에게도 저 정보를 공유할 것이다.

‘슬슬 그렌 제너드 저놈이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물론 아직 완벽히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추상적인 형태가 잡혀가는 건 분명했다.

지크는 방의 출구로 향하던 중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렌이 첼시, 피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는 모양이다.

그의 얼굴은 제법 심각하게 보이긴 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지크는 지금 그렌의 속이 뒤집어져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주목을 받을 기회를 지크가 완전히 박살 냈으니까.

‘곧 그 심정을 얼굴에도 표현하게 해 주마.’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지크는 방을 나갔다.

* * *

그렌은 흘끗 지크가 나간 곳을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가 이가 갈리는 걸 참았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본성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갈고 싶을 정도로 그렌이 화가 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개자식!’

그 누구도 현 상황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할 때, 자신이 나서서 세세한 추리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 했다. 이미 어떤 상황에서 어떤 표정과 어조로 예측을 풀어나갈지 계획까지 전부 끝낸 상태였다. 실행만 하면 되는 상황.

그러나 그의 계획은 지크가 끼어들면서 박살 났다.

마치 그렌의 계획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대담한 추리로 그렌이 하려던 일을 빼앗았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렌의 배알은 뒤틀렸다.

하지만 지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지크가 허황된 추리를 했다면 그를 막고 마음속으로 조롱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상황이 펼쳐진다면 처음 세웠던 계획보다도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지크에게 우위를 잡고 자신이 지크보다 더 뛰어나다는 증명이 됐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그렌에게 좋을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지크의 추측은 무척이나 정확했다. 그렌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녀석이 어디서 정보를 얻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없었다. 지크는 분명 눈앞에서 보인 모형 하나만으로 사실을 알아낸 것이었다.

물론 지크가 추리를 성공한 데에는 그렌이 이곳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을 거라는 확신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렌이 그걸 알 리 없었다.

어쨌든 지크의 나무랄 데 없는 추리는 그렌의 활약을 모조리 앗아가 버렸다.

지크의 추측이 정확히 사실을 짚어 오자 그렌은 초조감에 지크의 말에 끼어들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크의 대처에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렌이 꿈꿨던, 밸리드의 음모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알아내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상적으로 인식하게 하려 했던 계획은 화려하게 박살 나버렸다.

‘너무 시간을 끌었어!’

괜히 고민을 하는 척 시간을 끌어대 지크에게 먼저 발언권을 준 것이 문제였다. 고민 시간을 줄이고 바로 자신의 ‘예측’을 말했어야 한다.

정말로 뼈저린 실패.

하지만 그렌은 실망 속에서도 자신을 다독였다.

‘괜찮아. 어차피 이번 건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잖아.’

그저 이번 사건에서 주목을 조금 더 받아보고자 계획한 일일 뿐.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 계획만 성공한다면 그는 무척이나 커다란 명성을 얻을 것이다. 방금 전과 같은 너절한 사건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그렌은 방금 전의 지크를 떠올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자신의 예측을 말하던 그.

‘흥! 이딴 자잘한 주목 따위는 얼마든지 가져가라.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내가 될 거니까.’

자만심이 아니다. 자신은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될 때까지 하면 그만이다.

그렌은 조금 전 있었던 굴욕을 애써 기억 저편으로 흘려보냈다.

* * *

밸리드의 신전을 점령한 후, 호루스 협곡으로 향하기 전 일단 백작가로 돌아온 지크는 라일라를 찾아갔다.

지크와의 약속을 지킨 듯 백작가의 사람들은 유적지가 있는 구멍엔 일체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접근한다고 해봤자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순 없었겠지만.

지크는 문을 열고 유적으로 들어가 라일라와 만났다. 그녀는 계속 연구에 매진 중이었다. 다만 그다지 성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크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식탁을 꺼내고 그 위를 음식으로 가득 채운 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식사를 하며 지크는 신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풀었다.

“커다란 호수를 인공적으로 만들겠다니. 밸리드 녀석들도 스케일이 참 커.”

“그래도 언뜻 납득이 가는 스케일이기도 해. 도시 제물의 의식 같은 짓을 하는 녀석들이잖아.”

지크의 말에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호루스 협곡으로 갈 거야?”

“그래. 그렌 제너드가 다음 무대로 정한 곳 같으니, 불평 않고 따라가야지.”

지크는 음식을 입에 넣은 후 포크를 까닥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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