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5화
그 방은 상당히 너저분한 방이었다. 방 한쪽에 있는 책상 위로 온갖 서류가 널브러져 있었다. 정리라는 단어와는 정말로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어 깔끔한 사람이라면 진절머리를 칠 게 분명한 그런 광경이었다.
서류들은 땅바닥까지 흩뿌려져 있었다. 성기사 몇이 그 서류들을 주워 다시 책상으로 올리는 중이었다.
“누구야! 아무도 들어오지 말…!”
입구 근처에 서 있던 윈스틴이 신경질적으로 외치다 루벨라와 와이그를 보고 입을 닫았다.
“중요한 발견을 했다고 해서 밖에 계신 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들어와 봤답니다. 설마 다이너 경이 말한 아무도에 저와 와이그 님이 포함되어 있진 않겠죠?”
“물론입니다, 성녀님. 방을 수색하는 데 많은 인원이 있으면 오히려 방해가 될 게 뻔해서 그런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성녀님과 와이그 님은 얘기가 다르죠.”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던 첼시가 조금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지금은 길이 갈렸다지만, 성녀 후보였던 시절 자신의 호위 기사였던 자가 라이벌이었던 루벨라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이다.
“뭔가 발견한 건 있나?”
와이그의 질문에 윈스틴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뿐, 그는 담담히 질문에 대답했다.
“서류들을 대량으로 발견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스틸월 영지에서 일어나는 소동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어 한곳에 잘 모아두도록 했습니다.”
와이그가 땅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모으던 성기사들을 쳐다봤다. 그들이 와이그를 향해 살짝 묵례했다. 와이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짓으로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성기사들이 다시 서류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외엔 없나?”
“특이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윈스틴은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섰다. 그의 몸이 가리고 있던 방의 중앙부가 지크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그렌 일행이 어떤 물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루벨라와 와이그, 윈스틴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지크 일행이 오기 전에는 그 물체를 조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크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물체로 향했다.
루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체 앞으로 걸어갔다.
“…모형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루벨라의 곁에 서며 와이그도 동의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그것은 어떤 지형을 표현하고 있었다. 산이 있고 평야가 있으며 강 그리고 도시가 있다. 재질은 나무. 어찌나 섬세하게 만들어졌는지, 마치 자신이 하늘을 나는 새가 되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런 식으로 보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크도 두 사람의 곁에 섰다. 그도 모형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그렌에게 더 집중되어 있었다.
‘이제 슬슬 뭔가를 보여주겠지.’
밸리드의 음모를 파헤치는 공적을 세울 절호의 기회다. 녀석이 각본을 짰다면 당연히 여기서 뭔가가 튀어나와야 한다.
그렌은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지크는 헛웃음이 터지는 걸 참기 위해 모형 쪽에 집중했다. 뻔한 연기를 계속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배를 잡고 굴러다닐 것 같았다.
“어떤 곳의 지형을 표현한 것 같죠, 와이그 님?”
“그렇습니다, 성녀님. 아마도 밸리드 놈들이 더러운 계략을 꾸미는 곳이 분명할 겁니다.”
“어디인지는 아시겠나요?”
“글쎄요. 저도 세계의 모든 지형을 아는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와이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지금 우리가 있는 곳 근방이 아닐까 합니다만, 글쎄요. 그렇다고 하기엔 이게 걸리는군요.”
와이그가 모형의 한 곳을 가리켰다. 아무런 색채의 차이 없이 지형을 표시하기 위해 여러 굴곡이 져 있는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와이그가 가리킨 곳은 매끈한 솜씨로 평평하게 깎여 있었다.
“호수인가요?”
“밸리드 놈들이 물에 환장하는 걸 생각하면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상당히 크네요.”
“그렇죠. 모형에 새겨진 도시와 비교해서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이 근방에 이런 커다란 호수는 없죠.”
와이그의 시선이 지크를 향했다.
“혹시 지크 님은 이 근방에서 이런 커다란 호수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일단 확인차 스틸월 영지의 출신인 지크에게 물어보기는 하지만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는 투였다.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와이그가 이번엔 윈스틴에게 물었다.
“우리가 오기 전에 의견 교환을 한번 해봤을 텐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희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커다란 호수가 주변에는 보이지 않으니 다른 곳을 조각한 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의 의견은 모형이 표현한 지형은 이 근방이 아닌 걸로 모인 모양이었다.
“그럼 여긴 어딜까요? 밸리드 신도들이 괜히 이런 모형을 만들어 놓은 건 아닐 테니 무언가 의도가 있을 텐데. 사람을 시켜서 찾아봐야 할까요? 밸리드 신도들이 좋은 일을 하려는 건 절대 아닐 테니까요.”
“현실의 지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뭔가 다른 의도로 만들어진 상상 속의 지형일 수도 있죠. 물론 성녀님께서 말씀하신, 밸리드 놈들이 좋을 일을 하려는 게 절대 아닐 거라는 건 저도 열렬히 동의를 하지만 말이죠.”
루벨라와 와이그가 의견을 나눈다. 다른 이들도 모형을 유심히 살피거나 아니면 성기사들이 책상 위에 쌓아놓은 서류들을 들추며 밸리드의 의도를 추측했다.
지크도 생각에 잠겼다. 물론 다른 이들처럼 머리를 쥐어 짜내는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그렌 제너드 놈이 답을 말해줄 테니까.’
그렌은 여전히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가장 돋보일 타이밍을 재고 있을 터.
하지만 생각해보니 녀석이 말을 해주는 것을 조용히 기다리기만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먼저 선수를 치면 녀석이 기분 나빠할 테니까.’
물론 그것만으로 그렌의 계획을 틀어버릴 수는 없을 테지만 그게 대순가. 그렌 제너드를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는 기회인 것을. 그리고 그것은 지크의 기쁨이었다.
‘조금 본격적으로 생각을 해볼까?’
지크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이건 이 근방의 모형일 가능성이 커.’
지금껏 계속 스틸월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던가. 당연히 이 모형도 스틸월과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지형은 아니야.’
썩어도 스틸월 백작가의 계승자였다. 스틸월 백작가의 대략적인 지형은 알고 있었다. 지크는 바로 모형 안에서 스틸월 영지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상당히 넓은 곳을 재현해놨군.’
모형은 스틸월 영지만이 아니라 옆 영지, 그리고 다른 나라의 영지인 플로드 영지마저 나타내고 있었다.
‘아마도 저곳이 비올사일 테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저곳이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일 테지.’
하지만 지크라도 호수에 관해서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정말로 모형이 지크의 추측대로 스틸월 영지를 포함해 영지 몇 개를 구현해 놓은 것이라면 호수의 크기가 너무도 거대했다.
게다가 호수가 영지들에 미치는 영향도 무척이나 컸다. 스틸월 영지는 거의 반 정도가 호수에 잠겨 있었고 옆 영지는 거의 전부가 호수에 수몰됐다. 플로드 영지 또한 상당 부분이 호수 아래로 사라져 있는 상태.
‘호수로 표시된 곳에 상당히 큰 강이 흐르고 있긴 하지만 호수에 비하면 큰 것도 아냐.’
우기 때 대규모로 범람하긴 하지만 그것으로도 모형의 호수에 비빌 바는 못 된다.
‘정말로 밸리드 놈들이 그저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모형인가?’
아니면 희망 사항일 수도 있다. 실제로 모형을 보면 커다란 호수의 가에 지크 일행이 있는 신전이 자리하게 된다. 많은 물이 있는 곳 주변에 신전을 세우는 밸리드의 특성에 완벽히 들어맞는 환경이 되는 것이다.
‘응?’
거기서 지크는 무언가 아귀가 맞는 걸 느꼈다.
‘여기 신전은 규모에 걸맞지 않게 주변에 물이 없어. 루벨라와 와이그조차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 특이한 일이지.’
하지만 눈앞의 모형은 완벽하게 밸리드 신전의 조건에 부합하고 있었다.
‘여기는 분명 밸리드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곳이야. 하지만 놈들이 갑자기 주변에 적절한 물도 없는 마른 땅에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는 건 믿기 힘들어.’
많은 물 주변에 신전을 세운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신전을 세우기도 힘들고 신전을 세워도 쉽게 탐색되는 일이 많아 조건을 바꾼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렇게 환경과 조건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면 교리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밸리드는 분명 종교고 종교는 교리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교리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아마 사람들에게 터부시되는 교리부터 먼저 바꿔 세력을 늘리려고 했을 터.
따라서 세워질 신전의 규모에 걸맞은 대량의 물이란 조건은 일단 건재하다고 봐야 한다.
‘그럼 이 신전도 반드시 물이 필요할 거야.’
그것도 규모에 맞는 대량의 물이.
그러나 지금 그 물은 밸리드들이 만들어 놓은 모형에 존재할 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밸리드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호수를 그들의 모형에 새겨놓은 것이다.
마치 앞으로 호수를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지크의 시선이 호수를 훑었다.
호수의 시작은 어떤 강줄기에서 흘러나온 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 강은 분명 현실에도 존재하는, 모형에 호수가 존재하는 곳을 흐르고 있는 커다란 강의 상류였다.
‘그리고 호수의 끝은…!’
지크가 급히 움직였다. 생각을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지크에게 향했다.
“뭔가 알아낸 게 있나요, 지크 님?”
루벨라가 안색을 환하게 하며 물었다.
지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모형을 살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지만 루벨라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크의 방해를 하지 않도록 조용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루벨라도 와이그도 첼시도 피나도 윈스틴도 그 외 다른 성기사도.
그리고 그렌 제너드도.
지크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후우!”
잠시 모형을 살피던 지크가 허리를 펴고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 지크 님?”
그렌이 물어왔다. 좋은 대답이 나오면 좋겠다는 듯 그의 어조에 기대감이 풍겼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지크는 그렌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불안감을 읽은 것만 같았다.
“일단 그럴듯한 가설 하나는 세웠습니다.”
“그게 뭔가요?”
루벨라가 기대에 찬 눈으로 지크에게 다가왔다. 그렌과는 다르게 그녀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기대감만이 느껴졌다. 지크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했다.
“일단 이 모형은 이 근방을 표현한 게 맞을 겁니다. 다만, 그 크기는 예상보다도 더 큽니다. 스틸월 영지를 포함해 총 세 개의 영지 주변을 표현한 겁니다.”
“하지만 이 근방에 이런 커다란 호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모형이 영지 세 개를 포함한 크기라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크기일 텐데요. 설마 이만한 호수가 숨겨져 있을 리도 없고요.”
와이그가 의문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숨겨져 있을 린 없죠. 이 호수는 앞으로 만들어질 테니까요.”
지크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마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정도로 그 내용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지크는 그렌의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