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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64화 (464/628)

제464화

콰아아앙!

토르니움에서 뻗어나간 막강한 공격에 입구가 있던 밸리드 신전 벽 일부가 붕괴됐다. 연합군은 그대로 신전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끝났군요.”

연합군 무리 뒤쪽에 있던 와이그가 담담히 말했다.

“와이그 님은 돌입하지 않으십니까?”

밸리드 도살자라는 이명이 붙을 만큼 밸리드 신도들을 무참히 도륙하기로 유명한 그가 밸리드와의 싸움에서 이렇게 후방에 머문다는 것은 분명 어색한 일이었다.

“일단은 전 성녀님의 호위로 온 것이라서 말입니다. 손이 근질근질거리긴 하지만 제 임무를 방기할 수는 없죠.”

“어머! 전 괜찮아요. 지크 님도 있고 다른 분들도 계시는걸요. 원한다면 어서 다녀오세요.”

지금 여기에는 카르위먼의 성기사들도 많다. 아무리 성녀의 호위로 따라온 와이그라고 할지라도 성녀의 신변에 문제가 될 가능성은 적으니, 그가 전투의 가장 앞줄에서 검을 휘두른다고 해서 별말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때문에 루벨라가 권했지만 와이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죠. 다른 이들에게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게 맞습니다.”

와이그는 무너져 내린 밸리드의 신전 벽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신전 안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크 님의 말씀 때문에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어서 말이죠.”

그게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제너드 말이군요.”

“지크 님께서 그토록 안 좋게 보는 이유가 있겠죠. 한 번 뒤쪽에서 차분히 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인간인지 말이죠.”

“그건 저도 같아요.”

루벨라 또한 와이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번 전투 내내 그렌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얻은 것은 있었습니까?”

지크가 물었다.

“아직은 없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작해야 전투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만 가지고 사람의 본성을 알아내는 건, 천하의 루벨라와 와이그라고 해도 갖지 못한 능력이다.

하지만 완전히 허탕을 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굳이 말하자면 약간의 과시욕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그건 저도 성녀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죠. 사람 대부분은 과시욕을 가지고 있고 그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면도 있으니까요. 물론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면도 있고 말이죠.”

“어쨌든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요.”

그러며 루벨라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우리도 들어가요.”

“네?”

“어차피 와이그 님도 그분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선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안으로 들어가야겠죠?”

마치 집 뒤쪽 정원에 식후 산책이라도 가자는 듯한 태평한 어조다. 저 앞에서 아직도 칼 소리와 폭음, 비명 소리가 울리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일단 말씀드립니다만, 저 안은 아직 무척 위험할 겁니다. 건물 내라는 특성상 기습적인 공격을 당할 가능성도 높고요. 아무리 아군이 완벽히 점령을 끝냈다고 생각되는 공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걱정할 필요 있나요? 와이그 님께서 지켜주실 텐데요.”

루벨라가 싱긋 웃는다. 와이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성녀님이 그렇게 믿음을 주시니 거절할 수도 없겠군요. 네, 들어갑시다.”

와이그의 시선이 지크를 향했다.

“지크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도 따라 들어가죠. 이래 봬도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몸이니, 성녀님을 지키기 위해 한 손 보태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크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후후! 그러면 더더욱 제 신변에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네요. 와이그 님에 지크 님까지 저를 지켜주신다는데 누가 절 위협할 수 있겠어요?”

그러며 루벨라는 신전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양옆을 지크와 와이그가 호위했다.

세 사람은 무너진 신전의 벽을 타고 넘었다. 그들의 앞에 엉망이 된 밸리드 신전의 내부가 드러났다. 곳곳에 시체가 널려있고 피가 흥건했다.

하지만 지크와 와이그는 물론이고 루벨라도 시체들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시체들이 전부 카르위먼으로서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밸리드 신도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투의 소음이 들리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간혹 죽은 척을 하거나 숨어 있던 밸리드 신도들이 덤벼들기도 했다. 성녀인 루벨라를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루벨라에게 해를 끼치긴커녕 접근하기도 전에 지크 혹은 와이그의 검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신전을 돌아다니길 얼마. 그들은 목적했던 그렌을 찾을 수 있었다.

신전 안에서도 그렌의 활약은 눈이 부셨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밸리드 신도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그 모습은 마치 드디어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았다는 기쁨의 몸부림처럼도 보였다.

지크는 그 모습을 냉정하게 지켜봤다. 전투에 끼어들진 않았다. 어차피 본격적인 싸움은 이 전투가 끝난 후에 전개될 테니까.

* * *

전투가 끝났다. 밸리드의 신도들은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전부 죽었다. 연합군은 뒤처리를 시작했다. 시체와 잔해들을 한곳에 모았다.

뒤처리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은 혹시 밸리드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신전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건 지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여긴 별게 없네요.”

방 안을 스윽 돌아본 루벨라가 조금 실망한 어투로 말했다. 밸리드 신도들의 생활 공간이었던 듯 침상 몇 개가 전부인 공간엔 정보라고 부를 만한 건 없었다.

일행은 방을 빠져나왔다. 그들의 앞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 급히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본 와이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군요.”

“의심을 하는 집단과 의심을 받는 집단이 섞여 있으니 당연한 일이죠.”

지크도 움직이는 무리들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스틸월에서 나오신 분들은 카르위먼의 성기사 분들과 힘을 합쳐 밸리드와 싸웠고 신전을 함락하는 데 훌륭히 한 손을 보태셨어요. 한데 아직 의심하는 건가요?”

기분이 나쁜 듯 루벨라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스틸월이 혐의를 벗는 건 힘듭니다. 어차피 신전이 드러난 것, 오히려 직접적으로 신전을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의 혐의를 벗으려 들 것이라는 생각도 가능하니까요. 거기서 한 발 앞으로 더 나간다면, 공격을 하는 와중 스틸월과 밸리드 사이를 의심할 만한 증거들을 부수기 위해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는 의심도 가능합니다.”

“…정말 골치 아프군요.”

“무척 가슴이 아프지만 성녀님도 앞으로 익숙해지셔야 할 세계입니다.”

와이그의 첨언이 루벨라의 마음을 아프게 후볐다.

“뭐, 그래도 신전을 수색하는 데 스틸월의 병력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나마 최악의 관계까지는 가지 않은 상황이죠.”

지크가 앞에 무너져내린 커다란 돌덩이를 치우며 말했다. 루벨라가 뚫린 통로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신전에서 뭔가가 발견될까요?”

반쯤은 호기심에서 던진 말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지크의 대답은 단호했다.

“발견될 겁니다. 그것도 스틸월과 밸리드 사이를 의심할 만한 그럴듯한 단서가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죠? 지금의 소동은 스틸월을 어떻게든 끌어내리기 위한 악의적인 흉계 아래에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제 생각이 맞다면 지금 여기보다 더 단서를 던져놓기 좋은 곳은 없습니다. 신전의 규모를 보면 이곳은 스틸월 영지에 존재하는 자잘한 신전들을 통솔하는 곳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죠. 아마 비밀통로 혹은 비밀 방 안에 숨겨진 형태가 아닐까 합니다만.”

지크의 말이 끝난 바로 다음이었다.

“비밀 통로다! 비밀 통로가 발견됐어!”

루벨라와 와이그의 시선이 지크를 향한다. 지크는 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보통 이런 계획을 세우는 놈들의 머릿속은 다 비슷비슷하니까요.”

“…다음에 혹 카르위먼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지크 님의 힘을 빌려야겠네요.”

“동감합니다.”

루벨라의 의견에 와이그는 열렬히 찬동했다.

* * *

지크 일행은 바로 소리가 들린 곳을 찾았다. 이미 그곳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행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성녀인 루벨라와 카르위먼 최강 성기사인 와이그가 있는 무리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곧 그들은 사람들의 가장 앞에 설 수 있었다.

지크는 발견됐다는 비밀 통로를 살폈다. 비밀 통로는 벽에 뚫려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건대 아마 특수한 기관으로 벽의 일부가 밀려나야만 드러나는 식의 통로인 모양이었다.

통로 앞에는 성기사 두 명이 경비를 서서 통로에 들어가려는 인원을 통제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통로에 접근하는 이는 스틸월에서 파견된 병력은 물론이고 같은 카르위먼의 성기사마저 막아서고 있었지만, 루벨라와 와이그 앞에서까지 고압적으로 나오진 못했다.

“통로를 통제하고 있는 건가?”

와이그가 질문을 던지자 경비를 서고 있던 성기사 한 명이 즉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이너 경의 명령으로 통로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윈스틴 다이너. 그 이름이 나오자 와이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다이너 경이라면 그럴 명령을 내릴 직위에 있긴 하지. 이유는?”

“안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안에 어떤 단서 같은 것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들어왔을 시 훼손될 수도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하여 다이너 경을 비롯한 소수의 인원이 일단 안의 동향을 보고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명분도 나무랄 데 없다.

“들어간 자는?”

“다이너 경과 다이너 경이 뽑은 성기사 다섯 명.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제너드 경과 그 동료분들입니다. 그 동료 중 한 명은 예전 성녀 후보에까지 올라가셨던 첼시 윈드네 님이십니다.”

지크는 실소를 흘리려던 걸 참았다. 딱 그렌 제너드가 상황을 주도하기 좋은 상황이지 않은가.

솔직히 뻔한 질문이었지만 일단 지크는 경비에게 묻기로 했다.

“이 통로, 누가 발견했습니까?”

경비의 입에서는 예상된 대답이 돌아왔다.

“제너드 경이십니다.”

루벨라와 와이그가 살짝 지크를 쳐다봤다. 그렌을 조금 의심하게 된 그들이니만큼 이 통로를 발견한 이가 그렌이란 말에 약간의 찝찝함을 느낀 것이다.

“우리도 들어가 보죠.”

와이그의 말에 루벨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들어가도 되겠죠? 다이너 경이 아무도 통로에 들이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제가 그 아무도에 포함될 것 같진 않아서요.”

“물론입니다, 성녀님!”

경비들은 언제든 들어가도 좋다는 듯 입구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지크 일행이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경비들은 다시 통로 앞에 서서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 * *

통로 안은 어두웠다. 일단 바닥과 벽, 천장이 잘 정리되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거나 하진 않았다. 통로도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 그들은 통로와 연결된 방에 도착했다.

그곳엔 먼저 들어갔다는 윈스틴과 성기사들. 첼시와 피나.

그리고 그렌 제너드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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