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3화
“역시 오실 줄 알았습니다.”
지크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그렌이 말했다. 여전히 반쯤 거리를 둔 태도였지만 이번엔 제법 반가워하는 티가 났다.
전력의 확충을 기뻐하며 앞으로 같이 싸워야 하기에 쓸데없는 충돌을 일으키지 않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그러나 지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자식, 뭔가 꿍꿍이가 있군.’
아마 지크 자신에게 뭔가를 보여주려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됐다. 다만 그게 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하나 확실한 건, 지크를 기쁘게 해주려는 목적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스틸월과 밸리드의 연관성이 있는 무언가를 내 앞에 늘어놓고 조롱하는 건데.’
하지만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뭐, 보여주지 못해 안달인 것 같으니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그렌은 지크를 포함해 루벨라와 와이그와도 한 차례 악수를 나눈 후 돌아갔다. 루벨라와 와이그의 시선이 그렌의 등을 좇다가 곧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역시 윈드네도 있네요.”
“네, 성녀님. 거기에 또 다른 그리운 얼굴도 보이는군요.”
말은 그립다고 하지만 와이그의 태도를 보면 오히려 다시는 보기 싫은 작자를 본 게 분명했다.
“윈스틴 다이너 경이라고 했던가요?”
“알고 계십니까, 지크 님?”
“얼마 전 소규모 밸리드 신전을 부수고 돌아다닐 때 소규모 성기사 집단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 성기사들을 이끌고 있던 사람이 저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공적을 얻을 기미가 보이자마자 바로 움직인 모양이군요. 하여간 늑대 같은 녀석 같으니.”
와이그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천하의 벨리 와이그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싫어하다니.
“와이그 님께서는 상당히 좋지 않게 보시는 모양입니다.”
“좋고 좋지 않고를 떠나서, 첼시 윈드네가 성녀 후보였을 당시 그녀의 전담 호위를 맡았던 자가 바로 저잡니다.”
지크는 첼시와 윈스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다지 친해 보이지 않는군요.”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긴 하지만 예전 성녀 후보와 그 호위 기사였다고 하기에는 서로가 무척 대면대면해 보였다. 루벨라, 와이그와 비교해 보면 더더욱 그래 보였다.
“서로간의 신뢰라고는 전혀 없을 테니까요. 윈스틴 다이너는 무척이나 저를 싫어합니다. 시기와 질투죠. 그래서 어떻게든 저를 넘어서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가 첼시 윈드네의 호위 기사가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첼시 윈드네를 성녀로 추대해서 절 깎아내리겠다는 의도였죠. 당연히 실패했지만요.”
윈스틴의 실패를 입에 담았을 때, 와이그는 제법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윈스틴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물론 첼시 윈드네의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어서 손을 잡았죠.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딱 그 짝이었습니다. 그리고 루벨라 님이 성녀가 된 후로 결국 저 꼴이 된 거죠. 아마 지금 그 꼴이 된 것도 서로를 탓하고 있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다면 카르위먼의 인재 판별 시스템에 구멍이 뚫린 건 확실해지는군요.”
“제가 저번에 지크 님이 하신 이야기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 대표적인 이유가 저 두 사람입니다.”
그렌 제너드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저 둘에게 신세를 졌군.’
물론 그 신세를 갚을 생각은 없었다.
지크는 전투에 앞서 신전을 스윽 둘러봤다.
“이상하군요.”
“지크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지크가 의문을 표하자, 루벨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이 없어요.”
밸리드의 신전이 반드시 끼고 있어야 하는 물이 여기선 보이지 않았다.
“혹시 동굴 밖에 커다란 호수 같은 것이 있나요?”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루벨라의 질문에 지크가 부정했다. 비올사 근처이기에 대략적인 지형은 알고 있다. 비올사의 사람들이 식수원으로 삼고 있는 커다란 강 하나가 있긴 하지만 그건 비올사를 중심으로 이곳과 반대편에 있었다.
애초에 이 대형 신전을 다른 이들이 빨리 찾아내지 못한 이유도 거기 있었다. 보통 밸리드의 신전을 찾는다면 먼저 의심 가는 지역에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낸 다음 그 물을 중심으로 탐색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그렌이 찾아냈다는 이 지역에는 밸리드의 신전이 들어설 만큼의 물이 없었다. 하물며 여기 있는 신전은 규모가 꽤 크다. 당연히 근처에 있는 물의 규모도 커야 했다.
‘하지만 없단 말이지.’
지크는 그렌이 이 지역에서 신전을 찾았다고 했을 때, 예전 밸리드 북부 지부처럼 지하에 거대한 호수라도 존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신전 주위에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물 없는 곳에 세워진 밸리드의 신전이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혹시 카르위먼에서는 이런 경우를 알고 있습니까?”
“적어도 저는 몰라요.”
“저도 모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밸리드 놈들을 족치고 다녔다고 자부하지만 근처에 물이 없는 밸리드 놈들의 신전은 처음 봅니다.”
루벨라도 와이그도 부정했다.
그저 이 두 사람이 모르는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루벨라는 카르위먼의 온갖 역사와 숙적인 밸리드의 정보를 기억하는 성녀였고 와이그는 평생을 밸리드 놈들을 깨부수며 밸리드 도살자라는 이명까지 얻은 성기사였다.
저 둘조차 모른다는 것은 지금 상황이 극히 희귀한 것이라는 뜻이다.
“역시 그렇군요.”
“제너드 씨는 이 신전을 어떻게 찾아냈을까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원 근처를 뒤지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루벨라가 의문스럽게 말했다.
원래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저 자랑스러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밸리드 놈들의 신전을 찾아내는 공을 세운 것에 감탄만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루벨라는 그렌의 행동에 의문을 표했다. 분명 지크가 했던 그렌에 대한 평가의 영향이었다.
와이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확실히 조금 이상하긴 하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꼭 의심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다른 이들은 전부 수원 근처를 뒤지니 자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곳을 찾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지크도 와이그의 말에 동의했다.
‘아마 녀석이 준비한 핑계도 저것과 그리 다르지 않겠지.’
하지만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그렌을 수상쩍게 생각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그렌에 대한 이미지를 부수고 놈의 본모습을 끌어낼 것이다.
‘그만큼 보람찬 일이 또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스트레스가 쫙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분에 잠겨 있기만 해도 되는 때가 아니었다.
“의문은 조금 있다가 제너드 씨에게 물어보는 걸로 하고, 일단 우리도 전투 준비를 하도록 하죠.”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밸리드 놈들이 농성을 한다는 이유로 상당한 전력을 모은 그렌이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필요 있어 보이진 않았다.
콰아아!
그렌이 든 토르니움에 마력이 넘실거렸다. 탐욕스럽게 주인의 마력을 빨아먹은 토르니움은 마검이란 명칭이 붙었던 검답게 압도적인 폭력을 토해냈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끄어어억!”
그의 앞을 가로막던 밸리드의 신도들이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마냥 힘없이 날아갔다. 사지가 박살 난 건 물론이고 핏빛 내장조차 허공에 흩날리는 걸 보니 아무리 좋게 봐준다고 해도 살아날 수는 없으리라.
그 후로도 그렌은 엄청난 기세를 내뿜으며 밸리드 신도들을 몰아붙였다. 그의 모습을 보고 여기저기서 감탄을 터뜨렸다. 그 정도로 그렌의 실력은 눈부셨다.
지크는 그 모습을 진중히 쳐다봤다.
‘강해졌군.’
그것도 그냥 강해진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그렌 제너드의 실력은 지크는커녕 한스에게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스는 감당하지 못해. 어쩌면 단순 능력만큼은 나보다도 더 강할 수 있겠는걸.’
물론 지크는 자신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렌의 능력이 급상승한 것도 분명하다.
“강하시군요, 저분.”
지크의 옆에서 덤벼드는 밸리드 신도 하나를 두 쪽으로 쪼갠 와이그가 그렌을 보며 말했다. 그렌의 강함에 제법 감탄한 모양새다.
하지만 칭찬만 늘어놓진 않았다.
“하지만 뭔가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이는군요.”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저렇게 실력이 급상승할 순 없다. 천하의 지크조차 엄청난 빠르기로 강해졌고 또 강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단계를 밟아왔다. 편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것도 일부.
‘애초에 일정 이상 경지를 지난다면 편법이 잘 안 먹히니까.’
에너지 드레인을 한 번만 사용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깨어나는 마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다른 마력을 집어넣어 정체된 마력을 깨부수는 효율도 극감한다.
그러나 지크가 마지막으로 본 그렌의 경지는 편법이 그다지 통하지 않을 경지였다. 즉, 웬만한 편법으로는 저렇게 갑작스럽게 강해지지 못한다.
생각나는 건 단 하나.
‘클로원의 기술인가.’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클로원의 편법이라도 저 정도까지 한 번에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가능했다면 저 녀석 성격상 이미 예전에 편법을 썼겠지. 분명 부작용이 있을 거야.’
움직일 때마다 계속 눈에 밟히는 어색함이 그 증거다. 다만 부작용이 고작 저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분명 치명적인 무언가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가볍다면 약간의 장애를 안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심하면 목숨을 잃겠지.’
지크는 혀를 찼다. 그렌이 왜 저렇게 무리하게 경지를 끌어올렸는지 예상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밀리는 게 싫어서 저렇게 목숨 내버리는 짓을 한 건가?’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 없다.
‘아니,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회귀를 하면 된다는 얄팍한 생각도 있었을 거야.’
그 생각이 얼마나 무른 생각이었는지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앞장서서 밸리드들을 토벌하던 그렌이 살짝 뒤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지크와 마주쳤다가 지나갔다. 후방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지만, 지크의 생각은 달랐다.
‘하여간 저 또라이 같으니.’
저건 어린 아이가 주변 아이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를 자랑하며 그 반응을 확인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아마 자랑의 주 대상은 나겠지.’
‘어떠냐!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라는 그렌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생생히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겸사겸사 다른 이들에게도 능력을 자랑하고.’
그 의도는 제법 통한 모양이었다. 스틸월의 기사와 병사, 카르위먼의 성기사들은 앞장 선 그렌의 무위에 사기가 올라 신전으로 짓쳐들어왔다.
동굴 안이라는 협소한 공간과 스틸월과 카르위먼이라는 소속의 차이 때문에 복잡한 전술을 사용하지 못해 단순한 진영을 이룬 뒤 그저 밀어붙일 뿐인 연합군이었지만 그렌의 활약과 개개인의 월등한 전투 능력으로 인해 그들은 밸리드를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지크는 그렌을 쳐다봤다. 밸리드들을 무참히 도륙하는 그 실력은 분명 굉장히 뛰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지크의 눈에는 한심함만이 가득 들어찼다.
‘클로원의 유산을 사용하고도 고작 그딴 실력이었냐, 저 녀석은.’
회귀 전의 그렌의 실력을 떠올리고는 지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