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1화
꼰대. 그 말을 듣는 순간 루벨라와 와이그는 사태의 심각성도 잊고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아무리 백작이 밸리드의 신도가 아닐까 의심받는 자라고 해도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고위 귀족이기도 하다. 여기서 웃음을 터뜨린다면 분명 카르위먼의 이름에 흠을 내게 될 것이다.
때문에 둘은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웃음을 참을 수 있었다. 성녀와 성기사가 되기 위해 받은 엄숙한 정신 훈련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험! 험!”
트레얼은 난감함에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진 못했다. 슬쩍 백작의 눈치를 봤다.
트레얼은 백작이 앉아 있는 의자 뒤에 서 있었기에 백작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백작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충분히 예상이 갔다.
트레얼의 예상대로 백작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꼰대라는 직설적이고 겁 없는 표현에 당연히 심기가 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크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말투는 거칠고 꼰대라는 모욕적인 말을 사용하긴 했지만, 분명 지크는 백작가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크 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군요.”
예상치 못한 단어에 잠시 웃음보가 터질 뻔했지만, 루벨라는 순식간에 그 감정을 지웠다.
가벼운 지크의 태도와는 달리 루벨라와 카르위먼으로서는 이건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 양반은 옛날부터 왕국의 강철벽이라는 이름에 환장하는 인간이었죠. 절대 그 이름에 먹칠할 일을 만드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물며 밸리드를 추종하다뇨. 밸리드 놈들의 대가리를 먼저 깼으면 깼지, 지지할 인간은 아닙니다.”
“지크 님 개인의 감이라는 거군요. 혹시 명확한 근거 같은 건 있을까요?”
“없습니다.”
백작과 트레얼이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예상 외로 거칠긴 하지만 지크가 백작가의 편을 드니 오해를 풀 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지크 또한 그들의 혐의를 벗겨줄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의 의심은 안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트레얼은 카르위먼의 성녀와 최강 성기사라는 조합 앞에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지크를 쳐다봤다.
‘저분이 백작가에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면.’
이미 끝난 일이라고 수천수만 번을 되뇌었지만, 다시금 아쉬움이 넘쳐흘렀다.
만약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인 지크가 후계자가 된다면 이 일은 아무리 최악으로 흘러간다 하더라도 수습할 수 있다.
백작이 끝내 혐의를 벗지 못하더라도 지크가 스틸월 백작이 된다면 일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에게 밸리드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울 녀석은 없을 테니까.
트레얼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도 지크와 루벨라의 이야기는 계속 됐다.
“그렇군요. 한데, 그렇다면 아무래도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지크 님은 엄연한 스틸월 백작가의 관계자니까요.”
“한탄이 나오면서도 아쉬우며 언뜻 분노조차 느껴질 말이지만, 인정합니다. 아무래도 의절했다고 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은 많겠죠.”
핏줄이란 건 그런 것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히 말하자면, 전 절대로 스틸월이 좋아서 도와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스틸월 가문이 지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전 별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충격적인 말이었다. 백작과 트레얼은 스틸월의 멸망이라는 민감한 주제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고, 루벨라와 와이그는 지크의 단호한 말에 놀랐다.
물론 백작과 트레얼 또한 충격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크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게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스틸월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 왜 돕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여러분들께는 한 가지 이유면 충분할 것 같네요.”
지크는 상체를 숙이고 루벨라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춘 후, 장난기를 가득 담아 말했다.
“밸리드 놈들을 족치는 데 여러 생각 할 필요 있나요?”
루벨라의 눈이 몇 번 깜박였다. 그 후, 그녀의 눈꼬리가 아름답게 휘었다.
“후, 후후, 후후후후! 아하하하하하! 그렇네요! 밸리드를 처리하는 데 여러 생각할 필요는 없죠!”
“하하하하하! 이거 참, 지크 님에겐 여러 가지로 배우게 됩니다! 암요! 밸리드 놈들을 족치려면 그게 어떤 사이라도 충분히 협력할 수 있죠!”
지크의 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루벨라와 와이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 루벨라와 와이그는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긴장하고 있던 백작까지 끌어들여 소소한 담소를 나눴다.
마치 친분을 나누기 위해 온 손님처럼.
백작과 트레얼은 깨달았다. 지금, 적어도 루벨라와 와이그 안에서 스틸월 백작은 완전히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고.
얼마 후, 지크와 루벨라, 와이그가 응접실을 떠났다. 스틸월 백작이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지만 루벨라와 와이그는 돌아가지 않는다.
지크와 함께 주도에 있다는 신전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동안 그들은 비올사에 있는 카르위먼의 신전에서 머물 것이다.
방금 전까지 이야기가 오고가던 응접실이 침묵에 잠겼다. 반쯤 식은 찻잔만이 지금껏 여기에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껏 백작의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트레얼이 백작의 앞에 앉았다.
“다행히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모양입니다.”
“그렇군.”
모든 혐의가 풀린 건 아니지만, 적어도 카르위먼의 성녀가 자신들을 믿게 됐단 건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이렇게 천천히 오해를 풀어 나가죠. 그리고 감히 대 스틸월 백작가에 이딴 흉계를 꾸민 녀석을 찾아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이미 일련의 사건이 우연이 아님을 백작과 트레얼도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야지.”
백작도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감히 스틸월 백작가를 우롱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련님의 말 몇 마디에 성녀님이 대번에 오해를 접는 건 예상 외였습니다. 정말로 대단해지셨군요.”
예전, 지크가 백작과 말다툼을 할 때 지크를 지크 씨라 부르며 선을 그었던 트레얼이었지만 지금은 그도 지크를 도련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크가 스틸월에 협력하면서 암묵적으로 굳어진 호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얼마나 그들에게 신뢰를 줬으면 말만으로 이 심각한 사안에 성녀의 동의를 이끌어냈을까.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트레얼은 여기가 잠시 백작의 앞인 걸 잊었다.
“…….”
백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트레얼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의 실언을 눈치 챈 것이다. 그가 아무리 지크를 높게 평가해도 지크는 어디까지나 백작에게 추방된 자다.
괜히 지크에게 좋은 소리를 하는 건 백작의 권위를 건드리게 되는 일이다. 과거의 추방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백작이 고작 그런 것으로 트레얼을 면박 주진 않는다. 트레얼의 능력과 충심을 백작은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백작가 안에서 줄줄이 밸리드의 끄나풀이 나오고 있는 와중에도 철저하게 트레얼을 신임하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그것만 믿고 뻔뻔하게 백작을 대할 정도로 트레얼도 멍청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의 불쾌감이 드러날 만도 하건만, 백작은 계속 침묵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태도에 묘한 상념이 감돌았다.
* * *
지크의 밸리드 신전 수색에 루벨라와 와이그가 합류하게 됐다. 몇몇 성기사도 따라붙으려 했지만, 루벨라가 수색은 흩어져 하는 게 좋다며 그들을 떼어냈다.
루벨라의 합류를 지크는 거부하지 않았다. 밸리드 놈들을 족치는 데 카르위먼만큼 전문적인 집단도 없다.
“지크 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 계세요?”
루벨라가 질문했다. 소문이 돌았을 때부터 밸리드를 찾아 나선 지크의 생각을 공유하고자 함이었다. 그의 능력을 상당히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스틸월에 악감정을 가진 이가 친 흉계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이 스틸월 백작가에 안 좋게 돌아가고 있긴 하죠.”
지크의 의견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안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전부 머릿속에 떠올려 본 일이기도 했다. 일부는 심각하게 스틸월 백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일명 용의자들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금 스틸월 백작가가 강한 의심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
“하지만 물증이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혹시 이 상황이 어떤 이 혹은 세력의 음모가 아닐까 생각하던 사람들도, 스틸월 백작가와 밸리드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계속 나오기 시작하자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음모를 꾸민 이가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스틸월에 관한 소문도 진짜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아예 순수하게 스틸월이 감춰온 어두운 면이 결국은 터져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시 지크 님은 누가 이 흉계를 꾸몄는지 예상가는 자가 있나요?”
“있긴 있습니다만, 확정적이진 않아서 말씀은 드리지 못하겠네요.”
“그런가요?”
루벨라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비올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종종 그들과 같은 목적으로 수색을 하고 있는 스틸월의 기사와 병사들이나 카르위먼의 성기사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과 정보를 공유하긴 했지만 썩 좋은 정보가 들어오진 않았다.
“하여간 누가 생선 대가리 아니랄까봐 숨는 데는 아주 바퀴벌레 저리가라 할 정도란 말이야.”
“솔직히 밸르의 대가리는 생선이 아니라 바퀴벌레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크와 루벨라가 작게 투덜거렸다. 와이그는 한 걸음 뒤에서 성녀가 거친 소리를 내뱉는 걸 인자한 눈으로 보며 허허 웃고 있었다.
그때, 지크 일행이 또다시 한 무리와 마주쳤다.
이미 스틸월의 기사든 카르위먼의 성기사든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마주쳤기 때문에 이제 와 다른 한 무리와 마주쳤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그 무리는 평범한 무리가 아니었다.
“여, 또 보는군요.”
지크가 손을 흔들었다. 상대 무리의 리더격으로 보이는 자, 그렌이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지크 씨도 비올사에 있다는 밸리드의 신전을 찾으시는 모양이군요.”
“그렇죠. 바퀴벌레의 둥지는 미리미리 치워놔야 눈에 띄지 않으니까요.”
“그렇군요.”
두 사람은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형식적인 대화를 주고받은 후 떨어졌다. 이미 얼마 전에도 밸리드의 신전 앞에서 한 번 마주치지 않았던가. 서로의 겉모습만으로는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두 무리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인연이 있는 자들이 지크, 그렌 말고 또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네, 첼시. 그동안 잘 지냈니?”
루벨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을 걸었다. 그렌의 옆에 있던 첼시가 미소 지었다.
“덕분에. 너는 어때?”
“으음, 좀 힘들어. 아무래도 성녀로서의 의무가 좀 무거워야 말이지. 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지고 있어. 의무가 무겁다고 해도 성녀로서 부여된 일이니, 피할 수는 없잖니? 난 성녀니까.”
“성녀로서의 의무가 무겁긴 하지.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래도 힘을 내렴. 성녀라는 고귀한 자리에 앉았으니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지.”
“응원 고마워. 그래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야. 이 무거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도 그렇고 해서 어떻게든 버텨볼 생각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보기 좋다. 그래, 그렇게 긍정적으로 힘을 내렴. 자리에 무너지지 말고.”
두 사람 다 웃는 얼굴에 말투는 명랑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지크는 눈곱만큼도 긍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 싸움 한번 엄청나군.’
두 사람이 친해 보인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